00116 9. 여정 =========================================================================
“그건 어째선데요?”
“……바란이 고대 유적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고대의 마력이 바란을 지키기에 마법사가 별로 아쉽지 않다는 거야. 도리어 마법사 길드 쪽에서 바란을 조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하더군. 근데 바란 지도부가 슬금슬금 건더기만 던져주고 정작 유적조사는 거부한다지?”
난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그거, 이런 국경지대의 잡화상 주인이 알 만큼 유명한 이야기인가?
“아이고 이런 이야기 다 하면 안 되는데! 하여튼 나도 참 입이 싸서 원. 아가씨가 이상하게 친근하단 말이야?”
내 반응이 뜨끔했는지, 잡화상 주인이 헛기침을 두어 번하며 냉큼 덧붙였다.
“뭐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고, 알 사람만 아는 얘기지. 나야 밀수꾼들과 거래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이야기 주워듣게 된 거고. 이런 이야기 어디 가서 안 할 거지?”
“제가 누구에게 말하겠어요?”
난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새삼 경계심이 돋은 양 그가 말을 삼켰기에, 그 이상의 정보는 캐낼 수 없었다. 난 몇 가지 물건을 산 뒤 넉넉하게 값을 치르고 돌아섰다.
……아무래도 내 마력이 강해졌기 때문일까. 일반인에게서 호의를 사고 정보를 이끌어내는 게 어렵잖게 느껴졌다. 아마 서서히 이루어진 변화이기에 체감하지 못한 것 같다.
얻은 것도, 걱정되는 것도 있었다. 마법사 길드가 조사하길 허락지 않는다는 그 바란의 고대 유적. 거기에 다다라야 한단 것. 하지만 그보다 우선한 걱정은, 마법사 길드가 국경을 봉쇄하고 있다는 건 알아냈지만 당최 어떻게 거길 통과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상념에 잠긴 채로 난 길을 걷는 도중 발견한 시장통에서 먹을거리를 골라보았다. 마을에 방문한 건 나만이 아니었고 다 같이 여관에 짐을 풀고 난 뒤 나 홀로 정보 수집 겸해서 따로 떨어져 나온 터였다.
이제껏 피해왔던 마을을 방문한 데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처음 출발할 때 구입한 물건, 이를테면 담요라던가 하는 것들은 그리 재질이 좋지 못했다. 험히 쓴 것도 아닌데 마찰 때문인지 너덜너덜, 허름해져서 슬슬 더 나은 새 물건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매일 같은 강행군에 지치고 말라서 비실비실하는 게 좀 미안했던 터라 수레를 끄는 말도 팔고 새 말로 바꾸는 게 나은 듯싶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라칼이 말로 변신해서 수레를 끄는 게 어떠냐 싶었지만. 뭐 본체로 끌어도 남의 눈에만 띄지 않는다면 상관없는 거 아닌가. 수레에 타는 건 마스터뿐이니까, 나쁘지 않을 성 싶었다.
그러나 내가 의견을 꺼내자마자 이라칼은 나와 말도 섞지 않는 주제에 질색팔색을 하고 눈을 부라렸다. 부리는 짐승 취급당한 양 몹시 자존심 상해하는 반응이었다. 덕분에 그에게 반감만 더 산 것 같다. 그의 뇌리 속에서 난 아주 악녀이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라칼도 나름대로 돌아다니면서 제 할 일을 하고 올 터였다. 마스터는, 방안에 머물고 있겠지. 실상 마스터가 할 만한 일도 없다. 더군다나 마스터는, 당당히 걸어 들어온 나와 이라칼과는 달리 꼭꼭 숨겨진 채로 여관에 들어온 터였다.
사실 검은 머리 여자가 검은 머리 아이와 함께 다니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나 그 검은 머리 아이가 눈에 띄는 외형과 분위기를 지녔다면,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가능성이 있고. 마스터가 변신한 모습을 포착한 마탑인이 여럿이니 생김새를 토대로 수소문하면, 가닥이 닿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가 그간 마을에 거의 들리지 않았더라도, 재력이란 무시 못할 것이니 우리의 행적을 추적해 들어올 수 있겠지.
생각해보니 굳이 마스터의 존재를 드러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이라칼과만 일행인 것처럼 위장한 채 마스터를 짐 상자에 숨겨서 방에 들였다. 보통 아이라면 방안에 홀로 갇혀 있게 되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할 테지만, 마스터는 틀림없이 양육하기 편한 타입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는 게 일상이니 새삼 어려워질 것도 없다.
마을 안이니 잠깐 자리를 비우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기에 일을 분담하여 이라칼은 말을 구해오는 걸 맡고, 나는 정보수집과 자질구레한 물건 같은 것을 구해오는 일을 하기로 했다. 둘이 나눠서 하니까 빨리 돌아올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이 같은 대화는 모두 내가 의견을 제시하고 이라칼이 도리질 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해괴한 양상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좀 졸라봤지만, 마스터는 날 싹 무시하면서 이라칼과의 대화를 허락지 않았고 어차피 이라칼도 잔뜩 나를 경계하는 것 같기에…….
여하간 아무와도 시시덕거리지 못하는 여행길은 몹시도 심심하고 외롭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잡화상 주인과 짧게나마 나눈 대화가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을 떠나서 즐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난 길거리에 열린 시장통에서 호빵을 닮은 앙꼬가 가득한 빵 몇 개를 사들고, 이라칼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달짝지근한 사탕을 몇 개 샀다. 굳이 먹을 필요가 없음에도 빵을 산 건, 왠지 먹음직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지. 여관에서 식사를 팔긴 하지만, 먹고 싶은 건 먹어야하는 법이다.
식재료는 떠나기 전에 본격적으로 마련할 참이기에, 난 어디서 사야 할지만 눈으로 대강 둘러보았다. 흑마법사니 마법사길드니, 분위기가 흉흉할 만도 한데 소리 높여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은 그리 근심이 없어 보였다.
어설프게나마 흑마법사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수배지가 나돌고 있으니 모를 것 같진 않은데. 달리 생각해보면 국경지대에 별일이 다 터지니 담대해질 만도 하겠다 싶었다.
모든 용무를 마친 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여관을 향해 바삐 발을 놀렸다. 이라칼은 먼저 돌아와 있겠지. 말은 제값을 받고 팔았을까? 내 돈은 아니지만 공금이 하도 든든해서 돈에 구애받지 않을 법하긴 한데, 이라칼이 바가지를 쓰진 않았을지 좀 신경이 쓰였다.
그날 마스터에게 벌을 받은 이후로 줄곧 토라져 있는데, 사탕을 주면 좀 달래지겠지? 생각하면서 골목 모퉁이를 돌고 있을 때였다.
앞에서 뭔가가 훅 튀어나왔다. 몸에 밴 듯이 조용하고, 은밀한 움직임. 내겐 마치 아주 작은, 쥐처럼 가벼운 동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림자 같은 인기척이었다. 소리도 거의 없었다. 물론 그런 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마력 덕분에 발달한 감각은 여전하니까.
별로 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내 몸은 훈련된 검사처럼 즉각 반응했다.
“붙잡아 드리려고 했는데…….”
내가 재빠르게 몸을 비키며 거리를 두자, 충돌을 방지하려고 허공으로 뻗어 나간 팔이 무색해졌다. 팔을 거둬 내리며 상대가 웃음을 흘렸다. 일순 경계심이 인 난 그를 날카롭게 훑었다.
평범한 여행자 복색의, 수수하지만 온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이목구비는 튀지 않지만 조화가 잘 갖춰져 있어서 준수한 편인데, 존재감이 흐릿하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사람들 틈새에 섞이면 그리 눈에 띄지 않을 인상이었다.
그러나 난,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인세에서 나보다 강한 마법사는 흔치 않다. 그리고 더 강한 마법사에게 스스로가 마법사인 걸 숨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청년은 마법사였다. 그에게는 상당한 마력의 기운이 잠재되어 있었다. 피하려던 마법사와 정면에서 마주한 난 싸늘하게 피가 식어 내렸다. 이게 우연일까.
나도 모르게, 경계하는 기색을 비친 모양이다. 청년이 사람 좋은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저- 아가씨,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해를 끼치지 않아요.”
손바닥을 내보이며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강조한다. 경계심 많은 아이를 달래는 듯한 그 실없는 태도와 몸짓에 누그러지려던 신경이 어떤 생각이 스치자마자 바짝 곤두섰다.
그래, 이 사람……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다.
선량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부드러운 인상, 상냥한 말씨. 바짝 언 심장도 사르륵 녹아내리게 하는, 푸른 호수와 같은 평온함.
―란델.
그 이름을 떠올린 건 필연이었다. 그리고 난 란델이 보기와는 달리 냉정하고 가차 없는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은 이를 대해본 경험 탓에, 난 청년이 란델과 비슷한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과민하여 누군가를 불쾌하게 할 수 있다곤 하나, 과민하여 경계심을 잃지 않는 쪽이 넋 놓고 있다가 당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어차피 누군가와 친분을 쌓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니.
더군다나 상대는 마법사가 아닌가. 마법사 길드에 소속되어 있을 게 분명한.
게다가 이 자, 좀 수상하다.
“아, 이거 참. 제가 많이 놀라게 해 드렸나 보군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냥 어깨를 으쓱해버리고 지나갈 만도 한데,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말을 섞으려는 듯이 굴기에, 난 내가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나 잠시 고민했다.
쌀쌀맞게 그를 내버려두고 돌아서려던 난 노선을 선회하여, 좀 더 원만하게 그를 뿌리치기로 했다. 괜히 마법사 길드 사람과 갈등을 빚으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니까.
“어, 어머 죄송해요. 제가 타지에 나온 게 처음이다 보니, 신경이 좀 곤두서서. 부딪히지 않았으니 되었죠.”
경계심을 걷은 양 자연스럽게 미소를 자아내며 난 선뜻 대꾸했다. 내가 듣기에도 상냥하게 들리는 말투였다. 뒤이어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려는데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랬군요. 타지에 나온 게 처음이시니 긴장하실 만도 하지요. 이런 아름다운 여성분이 홀로 여행하기에는 험한 세상이니까요. 잘하시는 겁니다.”
술술 나오는 찬사에 기쁘긴커녕 의구심이 솟구쳤다. 이자, 무슨 꿍꿍이지? 이런 말 하긴 슬프지만, 마탑에서 무시당하는 내가 마탑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새삼 엄청난 미인이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내게 작업을 거는 건, 뭐 아주 전무하지는 않은 경험이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분위기가 담백했다.
“다행히도 제겐 일행이 있어요. 저, 일행이 기다릴 텐데 이만 가봐야겠네요.”
깔끔하게 끊어낸 난 그를 비껴서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발짝, 옆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내 행로를 막아버렸다.
“이것도 인연인데, 이대로 보내긴 아쉽군요. 제가 지리를 좀 잘 아는데, 가시던 곳으로 안내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뭐하는 놈이야? 험한 말을 속으로 뇌까리며 난 눈앞의 제비 같은 작자를 노려보았다. 짧은 인내심이 순식간에 다하여, 짜증이 치밀었다.
난 불쾌감에 잠긴 채 그와 눈을 마주했다. 뭐라도 쏘아붙일 참으로. 그러나 난 잠시 말하는 걸 주저했다. 호두같이 부드러운 갈색빛 눈동자. 막을 씌운 듯이 모호하고, 여유로운 눈빛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기묘한 감각이 엄습한다. 그는 무언가 의도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성에게 품는 호감은 아니다. 열기라곤 전무한, 어떤 계획에 가까운. 우연히 길가다가 마주친 여자에게 무얼 의도하든, 그게 나에게 이로울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그가 내 정체를 알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건 하나의 자부심이고 확신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란 걸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진 특별한 힘은 내게 미묘한 우월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니 평범한 마법사에 불과한 자가, 나를 꿰뚫어보았을 리는 없다. 로브 차림인 것도 아니고, 난 그냥 보이는 그대로 여행 중인 여자일 뿐인걸. 그러니 그냥 집적거리는 낯선 남자를 상대하듯이 행동하는 게 적당하겠지.
난 빙긋 웃으며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이렇게 멋진 분이 저와 함께 가면 제 남편이 질투해버릴 거예요. 마을에서 칼부림이 나는 건 곤란하거든요.”
이라칼이 길길 날뛸 소리를 해버린 난 조신한 아녀자처럼 그와 거리를 두어 옆으로 비켜갔다. 왠지 선 채로 굳어버린 청년은 미처 날 잡지 못했다.
잠시 후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드는 것도 같았지만, 난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별 이상한 인간을 다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찜찜하긴 했지만, 따라오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걸로 일단락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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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페이스 등장입니다.
연재는 월 8회이상하려고 목표하고 있어요 ㅎㅎ 저번달엔 했으니 이번달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