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5 9. 여정 =========================================================================
현실이 내게로 돌풍처럼 훅 끼쳐왔다. 몸서리치며 눈을 뜬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닿을 만치 바짝 가까이에 검은 눈이 떠 있었다. 질릴 만큼 검어서, 새파랗게 흰 피부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물이 담긴 양 그 맑고 고요한 반구가 무감정하게 날 비춰냈다.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이 내 로브 속을 파고들었다. 다짜고짜 옷깃을 들춰내는 손길에 잠기운이 삽시간에 달아난다.
“무, 무슨?”
그러나 마스터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 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이 로브 속에서 무언가를 움켜쥔다. 마스터는 그걸 그대로 매끄럽게 잡아 빼었다.
새벽으로 푸르게 물든 대기에 옅은 빛이 번져나간다. 은하수를 물들이는 별빛처럼 은은한 금빛. 마력을 발하듯, 검신이 온통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신비로운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마스터는 가볍게 검을 받쳐 들었다. 검은 본디 보이는 만큼 무거운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스터는 질량을 거스르듯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양 검을 들고 있었다.
“마력을 사용치 말라 했을 텐데.”
고요한 질책에 난 그제야 검에서 마력이 풍기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멀리서 감지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질적이고 뚜렷한 마력은 생생하게 와 닿았다. 하지만 난 무엇이 검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저는 그냥 잠을 잤을 뿐인데요…….”
난 볼멘소리를 내었다.
“네 의식이 검의 마력을 끌어당겼다. 마력을 요하는 일이기에.”
무의식이 한 일에 대해 내게 책임을 묻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지만, 마스터는 잠을 자는 와중에도 사고를 치는 제자를 탓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꿈은 마법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지. 무엇을 보았나.”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들에 대해서 말하는 게 껄끄럽게 느껴져서 목 언저리에서 말이 막힌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이야기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금빛 숲.”
내가 꿈속에서 그와 마주하고 했던 그 숲을 입에 담았을 때, 마스터의 낯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길을 따라가니, 마탑이 보였어요. 그리고 전 거기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어요.”
그들, 그게 누구를 의미할지 알 마스터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야는 탑의 마력을 손에 넣지 못했어요.”
“그랬겠지.”
“그래서 그들의 힘은 제한되어 있어요. 마법으로 탐색하는 건 어려울 테고,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추적할 것 같으세요?”
마법이 아닌 그 어떤 다른 방법, 내가 미처 듣지 못한 그것.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나와는 달리 마스터는 쾌히 답을 냈다.
“가장 간단히는 재력이겠지.”
“재력이라고요?”
낯설게 들리는 소리였다. 물론 마탑이 가난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마탑의 마법사란 먹지 않아도 죽지 않고 옷차림도 더럽혀지지 않으니 기본적인 의식주를 충족하기 위해 금전적인 무언가를 요하지 않는다. 즉 거래가 거의 불필요하다.
그래서 내 안에서 마탑의 이미지는 좀 절간 비슷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마법사는 수도승 정도? 외부에 나가면, 여관비 정도는 내야겠지만 어차피 계약한 나라를 방문하면 그곳 군주들이 알아서 대접해주니까.
“마탑에는 능히 제국을 살 만한 재화가 보관되어 있다. 엘리야가 그 관리를 맡고 있었지. 그건 마력처럼 귀속된 힘이 아니니, 운용할 만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많은 금은보화를 곳간에 쌓아두고 있다가 홀라당 빼앗겼을 때, 그 상실감은 어떠할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울분이 치밀다 못해 화병으로 쓰러지리라.
사실 그런 상상할 것도 없이 눈앞의 마스터는 그 억장이 무너질 만한 상황을 대단히 담담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무수한 세월 일구어놓은-이라고 표현하기엔 뭣하지만-터전을 부리던 머슴들에게 빼앗기고도 그는 태연했다. 배신당하고도 아무렇지 않듯이, 지독한 부동심이다. 그가 무엇을 빼앗긴들 미련과 괴로움에 몸부림칠까. 그건 내게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는 마스터가 마탑을 완벽하게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탑은 오로지 마스터의 것이고, 시간이 걸릴 뿐 언젠가는 그걸 다시 찾으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마탑의 시온은 마스터에게서 자유를 찾은 대신 불사를 잃었지만, 반면 그들이 거의 모든 걸 강탈한 마스터는 여전히 불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대비가 참으로 묘했다. 난 여운을 쫓아내듯 물었다.
“사람을 사서 우리를 추적할 거란 뜻인가요.”
“그것도 하나의 가능성이지.”
“바란에는 마탑에서 파견한 인원이 없나요? 룻이라든가 아모스요.”
“바란과 마탑은 아무런 연도 맺지 않았다. 샤자한에는 룻이 몇 파견되어 있을 것이나, 바란까지는 감시가 미치지 못할 것이다. 분리해둔 힘에 대해선 나 외의 누구도 아는 바가 없으니.”
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돈으로 정보를 사거나 현상금을 거는 식으로 그들에게 우리를 쫓을만한 확실한 방법이 있단 건 불안하긴 하지만, 그건 사람들과 엮이지 않으면 되니까.
몸을 숨기고, 접촉을 피한 채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건 특별나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야영을 계속해야 하니 고되긴 할 것이나, 편한 잠자리를 위해 마을에 들리는 건 좀 그랬다. 필요하면 이라칼을 내보내서 물자를 수급해도 되고, 요새 마스터도 여행에 꽤 익숙해진 것 같았지.
이런저런 궁리를 하자 그리 위험할 건 없을 것 같아서,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좀 더 경계심을 품는 게 좋을 터이나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듯하다.
그러나 확실히 안심하기엔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우연히 어떤 식으로 그들이 우리를 훼방 놓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란과 인접한 국경에 다다랐을 때의 일이었다.
“국경이 봉쇄되었다고요?”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에 띄는 붉은 로브를 벗어서 감추고, 대신 무난한 복식의 후드를 뒤집어쓴 난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 여행자일 터였다. 물론, ‘예쁜 아가씨’ 소리는 오며 가며 꽤 듣긴 했는데, 가벼운 치사에 불과했다. 하긴 뭐 내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미인은 아니지.
여하간 난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을 파는 잡화상에 정보를 캐기 위해 들어와 있었다. 바란에 접근했기에 바로 국경을 넘어서려 했건만, 앞서 나서서 주변을 살피고 온 이라칼이 난색을 표하며 경계가 철저하다고 전해왔다. 물론 마스터에게.
심지어 국경 근처에 다수의 마법사가 포진해있다는 것이다. 하도 샅샅이 틀어막고 있어서, 어지간해선 지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이라칼은 내게 불신 어린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건 내가 마력을 쓸 수 있든 없든, 마법을 쓸 수 있든 없든 내 실력을 못 믿겠단 뜻이이라. 상당히 거슬렸다. 샤자한에서 치른 경험으로 인해서 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내 마법 실력에 꽤 자신이 있는 터였다.
하지만 충돌은 금물이다. 그렇게 마법사가 많은데 혹시 몰래 지나다가 걸리면 무척 곤란해진다. 어쩌면 대규모 마법전이 일어날 수도……. 일반 마법사들이 그리 감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마스터는 분명히 범상치 않은 존재였고 눈에 띄고도 그대로 넘어갈 거라고 확신하긴 어려웠다.
마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를 추적하는 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양 막막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법을 사용하면 대기에 흔적이 남게 되어있고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덜미를 잡힐지 모른다. 소수나마 마탑의 마법사들이 파견된 샤자한은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그래서 난 국경을 무사히 지날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서, 혹은 왜 거기에 마법사들이 득실거리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마을을 방문하는 쪽을 택했다. 정말 오랜만에 들리는 마을이라 감회가 새롭다 못해 반가울 지경이다. 그야말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나와 말도 섞지 않는 이라칼과 애초에 말이 없는 마스터와 있다 보니, 하루에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적이 많았다. 마탑에서 수련을 할 때보다 더 심했다. 그땐 마법을 배워야 하니 물어볼 거라도 있어서 마스터와 대화 같지 않은 대화라도 나누긴 했으니까.
그런 와중에 이곳을 방문하니 무인도에 살고 있다가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내 정감과 호감이 한껏 깃든 초롱초롱한 눈빛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잡화상 주인은 그가 아는 내용을 적극적으로 털어놓았다.
“그래, 흑마법사인지 뭔지 때문에. 골치 아프게 되었지.”
“흑마법사요?”
“옆 나라, 트왈릿이 왕위계승 싸움이니 뭐니 해서 시끄러웠잖아. 그때 왕자들이 박 터지게 싸우고 있는 틈을 타 영주 한 명이 영지전을 벌여서 여러 영지를 꿀꺽했지. 그게 처음에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는데, 점점 점령한 영지가 넓어지고 세가 커지니까 트왈릿 왕족들도 계승권 전쟁에서 눈을 돌려 그를 주목하게 되었지. 위기감을 느낀 게야.”
“영주가 능력이 좋았나 봐요.”
“그게 문제였던 거지. 그 영주가 원래 세력이 크지 않고 가진 병력도 변변치 않았거든. 그래서 그렇게 된 게 좀 수상했지. 더군다나 흉흉한 소문이 퍼졌어.”
“어떤 건데요?”
“그 영주가 죽은 자를 부린다는 소문. 마법사길드에서 진상 조사를 나서서 알아보니 흑마법사를 끌어들였더군. 끌어들인 건지 흑마법사가 마법을 부려서 영주를 현혹한 건지는 모를 노릇이지. 어쨌거나 그가 자의로 그 짓을 한 건 사실이야. 트왈릿의 계승권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결국 영주는 붙잡혀 처형당했지. 아주 잠깐 영화를 누린 게지, 쯧쯧.”
“그래서 그 일이 국경봉쇄와는 무슨 상관인가요?”
“그 흑마법사 놈이 델피아로 도망 왔으니까 그렇지. 은밀히 다녀서 아무도 본 적은 없는 듯한데, 마법사길드에서 추적한 바로는 그렇다고 하니까. 아마도 바란으로 도망가려고 한다는 것 같더군.”
“바란으로…….”
“알다시피 마법사길드는 흑마법사라면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니는 이들이지. 그래서 델피아에서 협조를 구해서 저렇게 국경을 꽁꽁 틀어막은 거야. 오고 가는 사람마다 귀찮을 정도로 철저하게 검열하고, 통행시간도 제한한다더군. 국경에 결계인지 뭔지를 쳐놨다던데 덕분에 샛길도 이용하지 못해서 밀수꾼들이 싹 박멸되고 있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고 그런 거래가 이뤄지기 마련인데 괜히 엄한 곳에 불똥이 튀었다고 잡화상 주인아저씨는 투덜대었다. 추측건대 그도 밀수꾼들과 거래를 하긴 하는 듯싶었다.
“조금이라도 신분이 불명확하거나 수상한 자가 있으면 철저하게 수색한다고 하니 뒷돈을 주고 국경을 통과하는 일도 당분간 안 될 거라더군. 우리나라 왕실 측에선 유독 마법사 길드한테 우호적이니까. 이곳 영주도 마법사 길드한테 빌빌 긴다고. 아무튼, 바란으로 도피하는 건 아예 글러 먹었지.”
“바란에선 죄를 묻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근데 흑마법사 정도면 거기서도 꺼리지 않을까요?”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죽은 자를 부리는 불길한 흑마법사를 바란에서라고 한들 들여놓고 싶을까.
“그게 그렇지만은 않아. 그 흑마법사가 영주랑 엮이기 전엔 그냥 평범한 마법사로 알려졌나 봐. 뭐 사람을 죽여서 부리는 것도 아니고 죽은 시체를 부리는 거 보기 안 좋긴 해도 딱히 죄랄 수는 없지 않나. 영주가 허락했다는데. 그리고 공동묘지는 원래 영주 소유라고. 거기에 묻히는 대가로 그 이후로부터는 영주의 소유물이 되는 거지.”
……이 아저씨 생각이 꽤 트여있는데? 보통은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으려나. 우리나라에선 시체훼손도 죄를 묻는다고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좀 다를 것 같긴 하다.
“바란은 예로부터 흑마법사한테 관대하기로 유명한 동네지. 돈만 있으면 언제든 거류할 수 있고 말이야. 게다가 거긴 마법사 길드도 함부로 못 건드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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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챔스와 축구 결승전을 뚫고(보면서 씀)약속대로 31일까지(라고하기엔 30분 남았지만)
한 편 올립니다 ;ㅅ; 내가 봐서 진것같은 느낌이 든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