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4 9. 여정 =========================================================================
공간을 넘어 마탑의 문이 내게로 밀려왔다. 코앞 시야에 담겼다. 그 앞에 서는 건 놀랍도록 기이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양 너무도 생생했기에, 난 형체 불분명한 두려움 속에서 망설였다.
그러나 이 꿈이 언제까지고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난 손을 내밀어 굳게 닫힌 탑의 문을 만졌다.
아니, 만지려했다. 그리고 내 손은 빨려들듯이 문을 통과하고 말았다. 지금의 내 상태가 정신체나 다름없다는 걸 알아챈 난 생각할 것 없이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익숙한 풍경이다. 떠났던 때와 달라진 게 없는, 환한 홀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무수한 세월, 이곳은 이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으리라.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평상시 그대로의 마탑. 그러나 내부엔 어쩐지 괴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난 내가 무엇을 알고 싶은 건지 생각했다. 만약 이곳이 내 무의식 속에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면…….
시온은 어디 있지? 그 생각에 이르자마자, 반응하듯 시야가 바뀌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석에 끌려가듯 난 내가 원하던 장소에 이르렀다.
방이었다. 신비로운 문양이 가득한 온통 검은 벽면, 거미줄처럼 사방을 가로지르는 금빛 선. 내 형벌이 결정되었던 그 방. 안개처럼, 연기처럼 희뿌연 빛이 서려 대기에 일렁이고 있었다.
난 숨을 삼켰다. 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찾아야만 했던 이들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난 그들, 네 명의 시온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엘리야, 란델, 에스겔, 블레셋. 그 이름이 껄끄럽게 혀끝을 감돌았다.
친숙하나 이제는 멀어진 얼굴들. 하나의 중대한 의식을 치르는 양 저마다의 로브를 갖춰 입고, 시온이 한데 모여 있었다. 봉인의 마법을 펼치던 중에 공격을 당해 흐트러진 마력이 회복되었는지 변함없이 강력한 마력을 두른 그들은 각자의 색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늘이 드리운 얼굴.
난 그들이 크게 다치지 않았단 것에 안심했다. 이제는 적이 된 그들인데, 어리석게도. 가슴 속에서 치미는 안도를 어찌할 수 없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엘리아였다. 언제 가져다 두었는지 고급스러운 붉은 소파 위에 앉아 보랏빛 눈을 빛내는 금색 로브의 그는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했다.
또한 감히 눈을 뜨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울 만한, 지긋한 품격이 느껴졌다. 있어야 할 자리에 앉은 양 마스터의 자리를 온전히 차지한 그는 실로 군주다웠다.
—배덕의 군주.
그러나 난 그를 쉬이 비난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해는 증오나 배신감을 쉽게도 희석시키곤 하는 것이라. 그리고 어차피 그 두 가지 감정은 내가 느껴야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작 배신당한 당사자도 별반 감정을 느끼지 않는 듯하니.
엘리야가 입을 열었다. 가볍게 던지는 듯한 투였다.
“그래, 요엘은 어떻지?”
그 이름을 듣고 난 움찔했다.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던가. 때문에 난 짧게나마 가책에 시달린 터였다.
대답한 건 란델이었다.
“회복을 마쳐서 멀쩡합니다. 이를 득득 갈고 있지요.”
“살아남은 게 어디야.”
블레셋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이번 일에 동조했음에도, 함께 엘리야를 받듦에도 그는 여전히 요엘과 사이가 나쁜 것 같았다.
“가여운 요엘. 나는 그가 아힌에게 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단다. 그 아이가 시온이 된 지는 고작 일 년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난 내 이름이 언급되자 움찔거렸다. 그 말이 여기 숨어든 나를 정면으로 지목하는 것 같았기에. 그러나 내 존재가 감지되었다면 이리도 평온히 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리 없다. 난 불안한 기분을 추스르며 들려오는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마스터가 그 아이에게 그런 물건을 줬을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변수였습니다.”
란델이 온화한 낯으로 말을 붙이자 이어 블레셋이 코웃음 쳤다.
“자업자득이지요. 그 순진하고 멍청한 계집애를 잠깐 유인해내서 시간을 끄는 게 뭐 어렵다고. 그 쓸모없는 열등감 때문에 엘리야의 명을 무시하고 죽이려고 든 게 분명해요.”
블레셋이 시니컬하게 언급한, 나에 대한 적나라한 평가에 울컥한 난 눈을 부라렸다. 뭐라는 거야? 뒷담화가 면전에서 던져진, 딱 그런 기분이었다.
엘리야는 화사한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느긋하게 화답했다.
“너는 여전히 그 아이에게 우호적이구나.”
멍청하다고 한 게 우호적인 표현인가. 난 잠시 헷갈렸다. 하지만 엘리야가 그렇다면 그럴 터였다. 그와 척을 진 지금도, 내게 엘리야는 절대적인 기준처럼 생각되었다.
“그 애는 이젠 적이란다.”
그래서 그가 상냥한 투로 지적했을 때, 날카로운 무언가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싸늘한 유리조각 같은 것이-
블레셋이 나직이 반론을 가했다.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설득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 애는 그에게 너무도 가까웠단다. 바로 곁에 있었지. 어떤 이야기가 그 아이의 귀에 들어가면 마스터가 바로 알게 될 만큼.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어. 또한 그 애를 설득하기엔 시간이 부족했지. 그건 안타깝게 생각한단다. 게다가 그 애는-”
엘리야의 눈이 기억을 더듬듯이 허공을 짚었다.
“처음부터 예외였어. 마스터는 그 애를 처음부터 수중에 넣고 있었지. 나는 그 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단다. 어디서 왔는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추적해보려 했지만 실패했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뜨끔한 소리였다. 블레셋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혹시 마스터가 예견하고 있었을까요. 그래서 미리부터 준비한 것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꼭 그랬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단다. 정말로 이렇게 될 걸 알았다면, 과연 마스터가 우리에게 그토록 순순히 당했을까.”
그리 말하며 엘리야는 깍지를 꼈다. 그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어느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을 사람처럼.
다만 대화의 내용이 너무도 공교로웠기에 나는 이 광경을 아마도 마탑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일어났던 어떤 대화를, 기록된 영상을 꺼내보는 것처럼 목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바가 내가 알고 싶었던 것과 일치하기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시공간을 넘어서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필경 현재와 시차가 많이 나는 그 언젠가는 아니리라.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만큼 마스터는 강했지. 하지만 그러기에 방심했고, 그 방심이 우리에게 기회를 만들어줬지. 비록 그 과정에서 마스터를 놓치긴 했지만-”
보랏빛 눈동자에 일순, 광채가 스쳤다.
“우리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단다.”
세 명의 시온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엘리야는 틀림없이 그들의 지도자였다. 하나의 동조가 교감으로 오가며 끈으로 그들을 한데 묶었다. 엘리야를 중심으로 그들은 견고한 하나였다.
뜨겁고 진실 된 믿음이나 얕은 호감이 아닌 오랜 세월 한 방향을 바라봐온 결속. 또한 본연적인 갈망.
“마스터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침묵을 지키고 섰던 란델이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탑의 마력을 사용하는 방법. 그걸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엘리야의 입에서 노래하듯 음성이 흘러나왔다.
“존재하나 다룰 수 없는 힘이라.”
“마력이 유지되지 않으니 탑의 체계는 무너졌고 아모스와 룻의 일부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세월의 풍파를 맞아 재가 되어 사라진 자들이지요. 그리고 조력을 받아 아직 살아있긴 하되, 죽음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자들도 남아있습니다. 우리 시온도 이제 더 이상 불사자라 할 수 없겠지요.”
에스겔이 냉담하게 평했다.
“우리의 수명이 비이상적으로 길었던 건 탑의 마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하지만 그게 사라졌다고 해서 당장 죽음을 맞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요엘처럼 강력한 아모스가 아니라면 죽음이 코앞에 닥쳐온 양 두려울 겁니다. 그건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감정이니까요. 엘리야가 재빨리 그들의 생명력을 보존해주었다곤 해도 말입니다. 오랜 세월 엘리야가 그들을 다스렸다곤 하나, 모두가 우리를 따르는 건 아닙니다. 그저 지배자가 바뀌었기에 눈치를 보고 있을 뿐.”
“자유를 대가로 죽음을, 그걸 원할 자가 있던가.”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잖습니까. 탑 전체를 장악하고, 이전 주인을 봉인했는데 정작 그 강대한 마력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니!”
“몇 번이고 핵에 접근을 시도했지만, 흡사 자연물처럼 응답하지 않더구나. 섣불리 마력을 끌어다 쓰려고 건드렸다간 반동으로 몸을 부숴놓을지도 모르겠어.”
“오로지 단 한 명에게 귀속된 마력인가, 이 거대한 힘이? 그토록 뚜렷한 제한을 가지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야.”
“탑을 세운 것이 마스터이고 그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바가 많으니, 어떤 조처를 취해놓았을진 모를 노릇. 허나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를 찾아야 합니다.”
찾아내서, 고문이라도 불사해서 입을 열겠단 섬뜩한 의지가 느껴졌다. 란델의 온화한 낯이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확실히 다정함을 흉내 낼망정 언제든 비정해질 수 있는 자였다.
그들의 대화를 엿보며 나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 그들이 나보다도 마스터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 무수한 세월을 함께해 온 시온조차도 마스터에 대해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나처럼 마법생물과 마주쳐서 정보를 얻어내었을 것 같지 않았다. 또한, 이 일어나기 전에 마탑의 마력이 마스터에게서 비롯한 것이고, 마스터만이 거기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단 걸 알만한 어떤 상황도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몽환의 미로가 파괴되면서, 그 여파로 대기가 혼란해지고 이동한 마력의 자취를 가렸지요. 거기서도 여러 명의 룻과 아모스를 잃었습니다. 그간 힘을 회복해야했기에 추적이 불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충분히 시간이 지난 만큼 이제는 그들이 어디로 이동해서 숨어들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턱을 괴며 물었다.
“유귄은?”
“어디 있는지 소재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힘을 잃은 마스터를 아무 대가 없이 돕진 않을 겁니다. 그의 일족을 생각해서라도.”
“탑의 마력을 쓸 수 없는 지금, 대규모 탐색마법은 불가능합니다. 엘리야는 홀로 룻과 아모스의 생명력을 지탱하고 계시지요.”
“나, 란델, 블레셋. 움직일 수 있는 건 현재로선 셋뿐이지.”
“하지만 변수가 있잖아. 아힌이 가지고 있는 검은 어떻지?”
블레셋이 다분히 무시조로 말했다.
“탑의 마력이 담긴 검이었죠. 하지만 그게 어떤 굉장한 기물이든,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 애의 실력을 알잖아요. 마법사의 강함은 단순히 마력의 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죠.”
그리고 시온 중 누구도, 방심하지 않는다면 내게 질 리 없다. 더군다나 마스터라는 짐이 달린 내게. 난 그의 말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봉인이 파훼되었던 그 순간, 그 애는 우리 중에서 한 명 혹은 그 이상을 죽이고 빠져나갈 수 있었지. 그때는 우리 모두 완전히 무력해져 있었으니까.”
“그걸 판가름할 실력이 안 되었는지, 아니면 그리 모질어지지는 못했는지는 모를 일이지요.”
“혼란해하고 있다면 더욱 위협이 되지 못할 터.”
나에 대해서 너무도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어서 듣기가 거북해졌다. 그럼에도 난 귀를 기울였다. 우리를 추적할 만한 제대로 된 방안이 곧 논의될 터였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도 흘렀던가. 나는 내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건 곧 이 꿈속 세계와의 박리를 의미했다. 정신은 이전보다 더 집중하고 있는데, 화면이 지직거리듯 시야에 잔상이 일었다. 먼저 눈앞이 흐려지고 소리가 잦아들며,
“그들을 추적하는데 유효한-”
“우리가 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를 이용하면.”
이내 완전히 하얗게 잠겨갔다.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공백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난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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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올렸겠지!
31일내로 또 한 번 올라올 거예요 성실연재를 목표로!'ㅅ'
좋은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