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9. 여정 =========================================================================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난 도리어 반항적으로 그를 노려봤다. 한 배를 타고도 모든 걸 꽁꽁 감추고서, 내게 일부나마 드러나는 것도 극도로 경계해놓고서는 그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가? 난 내게 알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단호하리만치 분명한 대답이 돌아오자,
“내가 허락지 않은 무엇도 넌 알아서는 안 된다.”
밀려온 돌이 목구멍을 콱 막는 것 같다. 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도대체 왜? 마스터는 가볍게 시선을 돌려 궤적을 긋듯 이라칼에 다다랐다. 이라칼은 고통을 참으며 마스터 앞에 고개를 조아렸는데, 그 모습이 복종하는 노예를 보는 양 몹시도 거북했다.
“너와 아힌과의 모든 대화를 금한다.”
“마스터!”
일행이면서 말 한마디 나누지 말라는 소리야? 이해를 하고 말고의 수준이 아니었다. 분노에 두려움이 싹 달아나, 난 퍼뜩 다가서서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작디작은 몸이 붙들려 흔들린다.
“무슨 짓이세요?”
이갈림 섞인 물음에 마스터는 고요히 날 올려다봤다. 그의 두 눈은 내 어깨만큼의 높이에도 이르지 못하나, 진실로 올려다보는 눈길은 아니었다.
“네가 그에게서 답을 유인하니, 아예 불가하도록 막을 수밖에.”
진짜,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마스터가 원래 모습이었다면 감히 그를 향해 손을 올리지는 못했을 테고, 어린아이인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이지만, 진실로 그랬다. 냄비 끓듯 속에서 부글거리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그럼 말해보라고요!”
목에 왈칵 힘이 들어가, 공기 중에 새된 소리가 팍 터져나간다.
“왜 난 안 되는지! 왜, 도대체 왜냐고요! 그놈의 본능이란 이유만으로 생판 처음 보는 저 녀석도 마스터를 알아봤는데 왜 난 몰라야 하는지!”
마스터는 무정할 만치 차가운 눈으로 읊조렸다.
“너의 앎이 내게 해가 되기 때문이다.”
“해가…… 된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내가 뭐라도 되는데요!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요!”
기가 찼다. 정말 내가 뭐라도 되느냐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하는 거라곤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수발을 드는 것뿐인 내가, 어떻게 마스터에게 해가 될 수 있는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돕고 따르는 내게 그게 할 말인가?
마스터가 내 마음이 어떤지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꼴사납게 울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지만…… 분하고 속 터져서 눈물이 났다. 애써 참아 봐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난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뱉어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잖아요. 난 그것밖에 바라는 게 없는데.”
내가 원하는 건 돌아가는 것. 내 집으로. 내가 살던 세계로. 그 하나밖에 없는 내가, 무슨 이유로 당신에게 해를 끼치겠어. 그럴 능력이 되고 되지 않고를 떠나서.
마스터는 여전한 어조로 잘랐다.
“그것이 운명이니.”
몹시도 현실감 없는 말이었다. 운명, 그게 뭐라고. 가장 현실적인 이에게서 나온 그 비현실적인 말은, 그 자체로 힘을 담고 있는 양 나를 갈랐다. 슥 잘린 단면 그대로 분리되듯 따로 노는 괴리감.
이세벨. 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을 되뇌었다. 내게 운명이라는 단어는 그가 죽인 이름과 한몸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난 토해내듯 말했다.
“그 운명이란 게 뭔데요…….”
그래, 운명. 그게 마스터를 움직이는 단어였다. 엘리야가 말하지 않았나. 이세벨이 운명을 입 담는 순간, 마스터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고. 그 운명이란 게 뭐길래 당신은 그녀를 죽였지? 당신의 운명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기에.
“네게 가장 중요한 게 무어냐.”
마스터는 다짜고짜 물었다. 난 아연한 채 눈을 깜빡였다. 귀환. 그도 알고 나도 아는 뻔한 답이었다.
“그를 포기한다면 말해주마.”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 말뜻을 이해한 순간, 난 그를 찌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런 조건을 건다는 건, 결코 말해주지 않겠다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그래, 그 뜻 외에 다른 뭐가 있을까?
포기한다는 말, 거짓으로라도 못할 거 뭐 있겠냐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내가 혀를 놀리기도 전에 마스터의 말이 이어졌다.
“네겐 나를 따를 본능이 없다. 또한 네가 바라는 바가 있지. 그럼에도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음을 탓하나.”
내가 진정 그의 편이라기엔, 품은 목적과 뜻이 다르기에 도리어 마스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어 말하지 않는다는…… 소리인가.
내 입에 덜컥 자물쇠가 걸렸다. 그가 말한 그대로 속속들이 사실이니, 달리 반박할 말을 찾을 길이 없다. 어떻게 당신이 단정 짓느냐고, 내게 마냥 감추기만 하면 그걸로 다 되느냐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입안에서 갖은 외침이 맴돌았다.
그러나 마스터의 판단이다. 그가 그렇다는 데, 그리 확신한다는 데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뭘 조금이라도 알아야 논할 여지가 있는 거 아닌가.
입술만 짓씹고 있는 날 마스터는 고요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러나 단언컨대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자는 나뿐이니.”
일순,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귀를 거친 그 말이 뇌리에서 돌아든 순간, 난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그게 정말이냐고. 당신이…… 나를 돌려보낼 수 있는 거냐고.
……돌이켜보면 난 그 사실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다. 꽤 오래된 일이나 첫 만남에서. 멋모르고 혼란에 빠져있던 내게 그때 마스터가 한 말이 선연하다. 돌아갈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불가능에 가깝지. 그렇게 할 수 있더라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분명히 그리 말했었다. ‘내가’라고. 다시 말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가 마스터뿐이고 그가 그럴 의향이 없기에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그를 다시 언급함은 곧, 내게 희망이었다.
그러나 난 그가 던진 그물에 걸려든 양 몸을 떨었다. 동시에 이건 덫이었다. 나는 그의 말이 진실일 거라고 믿기 어려웠다. 날 돌려보내는 게 이 넓은 세상천지에서 어찌 그만 가능하단 말인가. 마스터가 무슨 근거로 그걸 장담할 수 있지? 나를 맘껏 이용해 먹기 위한 구실이 아닐까.
그러나 마스터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악인이건 간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가 답을 가지고 있단 게, 내가 그를 따를 구실이므로. 내가 원하는 건 돌아가는 것. 내가 원하는 건―
마스터와 헤어지지 않는 것.
가로와 세로로 뻗은 두 개의 선이 한 점에서 만나듯 두 가지 소망이 일치점을 찾았기에 의심의 속삭임은 의미 없는 메아리처럼 금세 숨을 죽였다. 귓가에 열이 올랐다. 혼란한 돌풍이 가슴이고 머리고 제멋대로 날뛰었다.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마스터는 내 손아귀를 벗어나 돌아섰다. 그가 멀어지자 이라칼이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멍하니 마스터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물었다.
“괜찮아?”
대답은 없었다. 그가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힐끔대며 거리를 두고 나서야 난 그와 내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단 사실을 자각했다. 오로지 마스터의 명에 의해서.
이라칼은 내가 그에게서 정보를 캐내려고 했단 걸 눈치챈 듯 ‘교활한 인간!’이라고 쓰여 있는 듯한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바짝 털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마스터에게 더 이상 묻지 않을 테니 이라칼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해봐야 그가 먼저 나와 말 섞는 걸 기피할 듯싶다.
그 와중에도 장작을 구해와야 한단 걸 잊지 않은 듯 마스터와 반대 방향으로 사라져가는 이라칼을 일별하고 난 등을 돌렸다. 마스터가 향한 쪽이었다.
의식이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감긴 눈꺼풀의 무게처럼 온몸이 짓눌리는 듯하다. 서서히 저 먼 물밑으로 가라앉는 양 수압이 그대로 느껴졌다. 숨을 조이는 듯한 압박감.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오고 가는 호흡은 편안하기만 하다.
다음 순간, 난 금빛 잎사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구를 쪼는 그 어른어른 찬란한 빛이 머리 위며 발아래 햇빛을 뿌려낸 양 온통 가득했다. 금빛 숲이었다. 내가 꿈속에서 마스터와 마주하곤 하던.
그러나 거기에 마스터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아도, 나는 그저 알았다. 눈부시게 흰 종잇장 위에 검은 얼룩이 찍힌 양 뚜렷하던 그의 존재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꿈속에서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그때의 그는 현실과 같이 어린 모습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니 마스터를 아예 만나지도 못하는,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분명히 이곳에 오게 된 까닭이 있으리라. 난 묘한 눈으로 사람의 자취 없는 이 신비로운 숲을 감상했다. 지평선을 온통 덮듯 무성한 잎사귀와 잔디의 금빛이 잔잔히 번져나는 장소. 이곳은 실존하는 장소일까, 아니면…….
여기가 이런 모습인 건 마스터의 영향이리라. 아마 마탑의 마력의 영향이기도 하겠지. 꿈은 보통 무의식의 반영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곳이 이런 형태를 취한다는 건, 무엇을 뜻함일까. 마스터의 무의식과 연관이 있는 건가. 몽환의 미로 역시도 이와 같은 모습이었으니.
난 뜻하지 않은 고민에 잠겼다. 숲은 흔히 생명력이 충만한 장소라 한다. 어떤 어둡거나 불길한 의미도 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풍경과 매치되지 않았다. 광원이라도 되듯 온통 순금빛을 발산하는 이 숲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으로 그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길이 있었다. 저 멀리서 빛에 에워싸인, 폭이 좁은 통로를 발견한 난 눈을 크게 떴다. 마스터를 만나고 나면 늘 허겁지겁 잠에서 깨곤 했기에, 이토록 차분히 이곳을 관찰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했을 만하다. 그동안은 마스터가 길목을 가로막고 서서 길을 가렸던, 그런 느낌이 있었다.
난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금단의 영역을 밟아가는 듯 긴장감이 명치를 타고 흐른다. 쓸데없이 호기심을 품는다고, 마스터가 금방이라도 나타나서 가로막고 질책을 던질 것 같았다.
문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마스터는 이제 그럴 수 없으니까. 마력 한 점 없는 몸으로 그가 내 무의식에 끼어드는 건 불가능하다. 이제 이건 오롯이 내 꿈이니, 내가 뭘 하든 마스터가 개입할 수는 없지. 아마 그는,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를걸.
꿈이라 반항심을 한껏 돋운 난 쾌재를 부르며 걸음을 빨리했다. 저편, 길의 끝에서 어른어른 어떤 풍경이 비쳤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어딘지 바로 깨닫지 못했다.
탑이었다. 불가사의하도록 하늘 높이 뻗은, 온통 칠흑의 돌로 이루어져 세상을 내려다보듯 그렇게 자리한 까마득한 탑. 인간의 기술로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마법의 소산이 눈앞에 모습을 비치고 있었다.
실제보다 작아서 그 위용도 덜할 뿐 더러 먼 풍경처럼 보였다. 그러하기에 시점을 바꾸어 보는 양 낯설었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탑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공간을 건너뛰는 듯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제 닿을 듯이 가까워져 있었다.
배신의 장소를 앞에 두고 난 멈춰 섰다. 기껏 벗어나서 더 멀리 도망쳐야 할 장소로 돌아가고 있다니. 두려움이 날 순식간에 휘감았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지? 그리움 따윈 남아있지 않은 장소였다. 도리어 피하고 싶을 뿐.
그러나 난 곧 생각을 달리했다. 이건 꿈이니, 내가 실제로 마탑에 돌아가는 건 아닐 터였다. 이 금빛 숲이 무언가 의미를 품고 있다면, 이곳과 하나의 길로 이어진 저 장소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으리라.
아마, 기회인지도 모르지.
눈앞에서 웜홀처럼 기이하게 시각화된, 빨려드는 듯 기이한 풍경을 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발을 내디뎠다.
============================ 작품 후기 ============================
인터스텔라 웜홀을 생각하시면 될듯(제가 감명깊게 봐서....)
성녀님은 이거보다 로맨스가 더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건 애들이 꼬꼬마이기 때문이죠. 아주 오랫동안 꼬꼬마일 예정.....(언제 다음 편이 올라갈지 모르므로)
태양을 삼킨 꽃 소장본 증정 이벤트를 하고 있습니다. 기한은 1월 31일까지.
태양을 삼킨 꽃 공지란이나 제 블로그(네이버에서 태양을 삼킨 꽃 검색하면 바로 뜸)에 자세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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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되시면 종이책 3권이 뙇! 이득! ><
......그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