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2 9. 여정 =========================================================================
조금 전까지 순한 양처럼 고구마를 먹던 마스터가 내게 시선을 향했다. 먹는 게 서툴 만도 한데 입가에 부스러기 하나 묻히지 않은 모습이 단정하여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난 딴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바란에 숨겨둔 힘이라는 거요. 그게 어떤 건지 알고 싶어요. 제 검처럼 물건의 모습을 하고 있나요? 인간이 사는 곳에 숨겨두기에는 너무도 큰 힘이잖아요. 이미 누구 손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마스터가 눈치채기 전에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거나요.”
마력석이 그러하듯 마력을 품은 무엇이 유용하다는 걸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회수한 검은 숲 전체에 안개를 흩뿌려서 스스로를 감추었지만, 바란은 사람이 사는 도시다. 만약 바란에 마스터의 숨겨진 힘이 있다면, 그건 어떤 식으로든 존재가 알려졌을 터이다. 그만한 마력을 담고 있는 기물을 모르고 넘어가기엔, 그들도 장님은 아닐 테니까.
그러므로 난 도착하기 전에 골치 아픈 상황을 좀 상정해 봐야 했다.
“그 검, 역시 왕의 마력이었구나. 그런 기물을 받다니, 인간 주제에.”
뭐라고 꿍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마스터는 특유의 명료한 대화방식으로 답했다.
“그 힘은 틀림없이 바란에 있다. 또한, 바란이 붕괴하지 않았다면 그 힘은 건재할 것이다.”
“붕괴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건?”
“바란의 도시는 고대유적 위에 세워졌다. 그 고대유적을 유지하는 근본이 되는 힘이니.”
“고대유적을 유지하는 근본이 된다면, 그 위에 도시를 세웠으니 이미 그 힘을 활용하고 있지 않을까요?”
“불가하다. 그는 마탑의 힘을 그들이 이용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마스터만이 다룰 수 있는 힘이라는 것. 그렇다면 내가 검을 회수할 수 있었던 건? 의문이 들었으나 난 빠르게 답을 찾았다. 마스터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에.
어쨌든 고대유적이란 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스터가 고대에 그 일을 했단 건 알겠다. 그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다기 보단 불가사의를 느낄 지경이었다. 난 좀 더 캐내 보려는 셈으로 한 가지 물음을 더했다.
“왜 바란에다가 힘을 심어두신 거예요? 고대유적을 유지하는 힘이라면,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을 것 같지는 않고 마스터가 의도하고 심어두셨을 거 같은데.”
내 검이야 숲에 떡하니 박혀 있었으나, 인간의 눈에 띄지 않을 장소였다. 거기라면 숨겨놨다고 할 만하지만 이 경우는 좀 다른 이야기다. 뭔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필요한 일이었다.”
마스터는 짤막하게 답하곤 눈을 내리감았다. 더 이상 질문을 허용하지 않겠단 단절감이 느껴졌다. 이건 말해줄 수 없단 거겠지? 뭘 또 꽁꽁 감추는 건지. 짜증이 인 난 차게 내뱉었다.
“네, 그러시겠지요.”
그러면서, 그가 잠들면 이라칼을 불러내어 정보를 캘 계획을 세웠다. 마스터를 혼자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가까우면서,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큼 적당히 먼 곳으로. 난 남은 고구마를 해치우고 있는 이라칼을 유의깊게 주시했다.
그리고 이십여 분이 지나 마스터가 수면에 들었다싶을 무렵, 다짜고짜 말했다.
“장작을 좀 구해와야겠어. 내일 아침까지 쓰기엔 부족할 것 같아.”
“그 정도는 네가 좀 하지.”
귀찮은 표정으로 툴툴대면서도 이라칼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난 그냥 나무와 장작감으로 쓰기 좋은 나무를 잘 구분할 줄 몰랐고, 이라칼은 덜 습윤한 재질의 나무를 고를 줄 알았으므로 장작을 구해오는 건 확실히 그의 몫이었다.
그가 적당히 멀어졌다 싶었을 때 난 재빨리 그를 따라나섰다.
“이라칼!”
“왜 따라온 거야? 왕을 혼자 내버려두면.”
“이 정도 거리는 괜찮잖아. 잠깐 말할 게 있어서.”
“뭔데?”
이라칼은 인간식의 화법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편이었다. 생활력은 있을망정 이리저리 구슬려서 살살 캐내는 화법에는 다소 약했다. 일전에 비밀을 누설한 적이 있어서 경계심을 품을 법도 했지만, 그리 치밀한 성미는 아니니.
“난 그동안 널 다시 봤어. 네가 너무 마스터를 열심히 섬기기에. 사실 처음에는 우리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았잖아. 알다시피 마스터는 쇠약해지셨고, 우리에겐 뒤를 쫓는 적이 있지. 그래서 처음에는 널 일행으로 받아들면서도 완전히 믿기는 어려웠는데, 이제는 네 진심을 알 것 같아.”
오그라드는 소리를 하면서도 난 제법 태연했다. 느는 건 뻔뻔함뿐이니.
“그, 그랬어? 당연한 거지. 왕이시잖아.”
이라칼은 금세 헤벌쭉해져서, 내게 심히 가책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 하지만 너희는 본능에 새겨진 대로 왕을 섬기잖아. 그리고 마스터는 쇠약해진 상태이니, 본능에 따르기를 거부할 수 있지. 예를 들어…… 이 기회를 틈타 왕에게 도전한다든가.”
난 말을 내뱉고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건 마스터도 언급한 적 있는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이라칼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감히 왕께 도전하다니, 그런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러면 너 말고 다른 괴… 마법생물체들도 마스터를 따를 거라는 이야기야? 그럼 그들도 불러들이는 쪽이 좋지 않겠어?”
그렇다면 내게는 더 잘된 일 아닌가. 이라칼 하나에게 마스터를 맡기긴 못 미더우니 마법생물체 여럿을 끌어들여 서로 감시하고 보좌하게 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당연히 가능한 거라면 마스터가 그들을 규합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그렇진 않아.”
이라칼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날 때부터 새겨진 본능이 우리를 지배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도 자유의지가 있어. 왕께선 본신의 몸이 아니니 우리를 따르게 할 지배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셔. 나도 겨우 알아봤다고. 하지만 알아보고도 복종심은 아주 미약하게 일어났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칼은 마스터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난 그 마음이 거짓되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가벼운 언동을 보건대 세상구경을 하고자 하거나,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왕께서는 우리를 복종시킬 수 있음에도 너무도 오랜 시간 자신을 감추며 우리를 자유롭게 했기 때문에… 좀처럼 그분을 따르지 들지 않을 거야. 아, 그래. 이 기회를 틈타 왕을 없애려는 그런 정신 나간 녀석이 있을 수도 있지. 멍청하거나 너무 오랫동안 살아서 뇌가 퇴화한 늙은이던가.”
“마스터께 적대적일 수도 있다는 거구나.”
“그래, 하지만 대개는 저 깊은 곳에 처박혀있으니 만날 일도 없어. 게다가 왕에게 다다를 수조차 없는 자들이, 불사에 가까운 왕을 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니 헛된 반항이지.”
“다다를 수 없다는 건?”
“왕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그 마탑의 마법사들이 과연 왕을 봉인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발치까지 근접한 그들조차도 왕을 죽이지는 못했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같은 논리야. 하물며 우리들은 왕의 근처에 머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어. 우리는 왕의 존재만을 알뿐, 그 실재를 가까이한 적이 없지.”
이라칼은 내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건, 입이 트였는지 마구 의미심장한 소리를 해댔다. 그 때문에 난 다소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난 내가 엘로힘을 부화시키며 마력을 한껏 끌어다 쓴 것이, 마스터를 뒤흔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게 마스터를 온전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은, 그 이유가 궁금한 것을 떠나서 자명하다.
“너는 마스터가 왜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인간들하고 엮일 이유가 없다고.”
여기까지 언급하는 건, 지난번 대화의 연장이었다. 제가 너무 많은 걸 털어놓고 있단 걸 눈치채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히도 이라칼은 별로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절대 비밀 같은 건 말해주면 안 될 상이다.
“우리의 왕이신데, 당연하지. 우리들이 비마법생물들과 같이 살아가지 않듯이, 왕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너 같은 인간과 함께하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나로서는 왕의 의중을 알 수 없지만 말이야.”
이라칼을 못마땅하게 쳇, 소리를 냈다.
“그건 마스터가 마탑의 주인이고, 날 거두었기 때문이지. 애초에 마탑은 왜 세운 거야?”
“그 마탑을 세운 이후로 왕께 제약이 생겼고,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졌지. 하지만 그 제약을 어째서 왕께서 감수해야 했는지는 몰라. 무언가 뜻하시는 바가 있겠지.”
불현듯 저 땅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어떤 기억이 무겁게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말.
‘내게 있어서 마력은 육신을 구성한다.’
왜인지는 모르게, 그 말이 첨예한 깨달음으로 뇌리를 긁었다. 그 마력은 마탑에서 난 것. 그러나 마탑의 근원이 되는 마력은 마스터에게서 비롯되었다. 기이한 순환 구조.
마법생물체라도 본연의 마력이 머무는 육신은 가지고 있다. 육신이 파괴된다는 것은 죽음을 말한다. 마력이 육신을 구성한다지만, 마력이 소실되어도 마스터가 완전히 존재의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건, 그 뜻은…….
어떤 의심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하지만 가시화되듯 명확한 실체는 아니었다. 어렴풋하게 이지러지는 연기 같은 것. 마스터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말할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속단하는 건 안 될 노릇이다.
난 이상스럽게 가라앉는 기분을 감추고 빙긋 웃었다.
“엘로힘을 알아? 그가 내게 이상한 말을 하던데, 해석해줄 수 있겠어? 넌 똑똑하니까.”
“엘로힘이라, 들어본 적 있지. 그는 몇천 년을 살아온 불새잖아. 나는 어리기에 그의 통찰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그래도, 뭐 들어줄 수는 있어.”
역시 이 녀석을 움직이는 건 약간의 칭찬과 아부같은데. 난 재빨리 물었다.
“그는 내가 유성이라고 말했지. 모든 걸 바꿔놓을 수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일 거라고 생각해?”
이라칼은 이채를 띤 눈으로, 잠시 생각해보는 듯하더니 내게 답을 해주려고 했다. 분명히 그 입술이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곧 이라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튀어나왔다.
“금, 제가…….”
이라칼이 무너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녀석의 눈에 고통이 차오르며 눈물이 고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난 당황하여 그에게 손을 뻗었다.
“네 손이 닿는다면 고통이 더해질 것이다.”
어둠 속을 미끄러지는 뱀처럼 그 음성이 들려온 순간, 온몸에 소름이 일어섰다. 너무도 놀라, 성대가 얼어버렸기에 망정이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모르게 정보를 캐내느라 뜨끔한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이 치달았다. 이성으로 논할 수 없는, 맹목적인 공포.
등뒤로 모닥불의 은은한 붉은빛을 진 채로 서 있는 마스터는 그 빛조차 바래는 양 검었고, 인형이 걸어 다니는 양 기괴했다. 그 감정을 담지 않은 채 날 응시하는 눈은 생명체의 것이라 하기엔 지독히도 어두웠다. 어떤 빛도 흡수되어 종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심연.
그러나 그 심연은 고요하게 자리하던 때와는 다르게 확연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 자신이 뭉개질 듯한 압박감 속에서 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마, 마스터 마력을 사용할 수 없으시다고 하셨잖아요.”
“본능에 새겨진 금제는 마력과는 무관한 것. 더욱이 그는 내게 복종을 자처한 자이니.”
적어도 마스터의 지근거리에서 비밀을 토설한다면, 금제에 걸리게 된다는 것일 터. 그래, 마스터는 둔하지 않았다. 이라칼이 자리를 비운 동시에 내가 따라갔다면 수상하게 여길 법하다. 작은 인기척에도 잠에서 쉽사리 깨어나는 이였으니. 난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외쳤다.
“물어볼 수도 있죠! 마스터가 말을 안 해주시니, 저도 알고 싶었다고요!”
“그러기에 좋은 기회라 여겼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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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거 로판이 아니라 호러판타지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호러판타지라고 할 걸 그랬나(고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