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9. 여정 =========================================================================
풀벌레 우는 아늑한 밤이었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귓전을 울린다. 열기가 훅 올라오는 불가에 앉아 일렁이는 불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캠프파이어라도 즐기는 양 운치가 있었다. 불꽃놀이까지 하면 딱 맞을 테지만, 그런 한가한 상황은 아니니.
산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대기는 고요했고 밤하늘에는 물속에서 반짝이는 수정처럼 맑은 별빛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 길옆에 오가는 여행자들에 의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숲 가까운 공터에서 우리는 불을 쬐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난 그 표현을 곱씹으며 흘낏 옆쪽을 돌아보았다. 둘 밖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그 단어에, 새로이 포함된 한 명이 맹수처럼 샛노란 눈으로 모닥불을 유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주저앉은 모습이 자유분방하여 거친 태를 냈다.
이라칼. 본신은 거대한 괴물인 이 새로운 일행과 함께 여행을 한 지 여러 날이 흘렀다. 강행군이라 할 만큼 거의 쉴 새 없는 여정이었다.
나보단 더 도움이 될 거라는 그의 말을 입증하듯 이라칼은 사고를 치긴커녕 이 미숙한 여행자들을 능숙하게 이끌었다. 그는 확실히 아주 쓸모 있었다. 일단 무력적으로도 강인하여 지치지도 않고, 말도 잘 돌보며 길도 잘 찾고 먹을 것도 곧잘 구해왔다.
다른 건 몰라도 가장 중요한 건 식량 문제. 되도록 마을에 들리지 않을 것이기에 가장 걱정되는 문제였다. 마스터는 세 끼 꼬박꼬박 먹어야 하는 어린이니까. 그렇다고 변변찮은 걸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난 기껏해야 열매를 주워오는 것밖에 할 수 없었으나 그는 달랐다. 사냥감을 잡아 오고,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버섯이나 나물도 캐왔다. 버섯이나 나물을 구분하는 건 숲지기가 하는 걸 봤다고 하는데, 몹시도 능숙해서 전직이 숲지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괴물이 육류가 아닌 버섯과 나물을 섭취할 것 같진 않은 걸.
하지만 그게 나았다. 제 야생성을 증명하듯, 이라칼이 어디선가 피를 뚝뚝 흘리는 새를 잡아와 눈앞에서 목을 비틀고 깃털을 뽑기 시작하자 난 비명을 지르다시피 그를 저지했다. 세상에.
나도 까탈 떨고 싶진 않다. 그래도 하도 끔찍스러운 광경이라 딴 데 가서 하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유희용 사냥도 아니고 먹기 위한 사냥을 하는데 뭐라고 할 건 없었지만, 도살 장면을 지켜보는 건 내 섬세한 감수성에 몹시 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이라칼은 ‘예민하긴’하고 투덜대면서도 이후론 손질된 고기만 가져와서 구웠다. 처음엔 안 먹어도 되겠거니 하고 찝찝하게 쳐다보던 나도, 갓 구운 고기 맛을 한 번 보고나니 흠뻑 빠져버려서 식사시간만 고대하게 되었다.
이라칼은 훌륭한 사냥꾼이라 음식을 그다지 많이 섭취하지 않는 마스터가 먹고도 남을 만큼 사냥감을 충분히 수급해왔고, 그 때문에 내 몫도 돌아왔던 것이다. 그가 가져다준 이점은 자연스레 내 마음도 바꿔놓았다.
무인도에 맨몸으로 떨어져서도 사는 데 지장 없을 능력자. 게다가 원래 먹을 걸 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간다지 않는가?
그 때문에 난 최근 들어 이라칼에게 대단히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라칼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여전히 내게 불만을 표하며 틱틱거리곤 했음에도 그마저도 귀여웠다.
이라칼은 마스터가 자기 위에 있는 건 당연하지만, 내가 그의 위에 있는 걸 괴물 특유의 본능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듯했다. 내가 그보다 강함에도 녀석은 호시탐탐 내게 기어오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이라칼을 부려 먹는 게 나고 말이다.
이라칼이 식사의 모든 걸 도맡는 건 아니었다. 그는 뭔가를 불에 맛있게 굽는 데는 소질이 있었지만, 그가 배우지 못한 요리는 전혀 시도하지 못했다. 늘 구운 고기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좀 더 다양하게 조리하는 건 내 몫이었다.
요리에 조예가 없는 나지만, 이라칼이 구해오는 식재료가 워낙 신선해서 뭘 하든 맛이 괜찮았다. 수프를 끓이든, 국을 끓이든 뭐든.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그 외의 거의 모든 건 순탄하게 흘러갔다.
결국, 이라칼이 하는 그 모든 일은 마스터를 위해서였다. 마스터의 정체를 까발린 녀석은 거기에 마음의 부채를 심히 느끼는 것 같았다. 아무리 마스터가 그 정체 모를 ‘왕’이란 존재라 하여도 생판 처음 만난 이인데, 녀석은 충실한 하인처럼, 아니 갓 회사에 취직한 의욕 넘치는 신입처럼 자기가 도움이 된다는 걸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 했다. 물론 나한테가 아니라 마스터한테.
다만 정작 그 마스터는 그 모든 걸 무심히 관조했다. 내가 감탄하고 말았던 갓 구운 새고기를 먹으면서도 미각을 느끼지 못하는지, 마스터는 그저 무반응이었다.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제 왕의 칭찬을 바라는 이라칼이 안쓰러워질 지경이다.
하지만 이라칼도 내가 맛있게 먹든 크게 관심이 없으니까, 쌤쌤이라고 치자.
여하간 이라칼은 우리 일행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녀석은 오늘도 제가 숲에서 캐내온 야생고구마를 불에 굽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매우 신중했다.
난 턱을 괴고 솔솔 풍기는 구수한 냄새를 맡았다. 잘 구워진 고구마의 노릇노릇한 속살을 생각하니 군침이 고였다. 이라칼은 날고기든 구운 고기든 다 먹지만, 굳이 따지자면 날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고구마도 날것으로 먹지는 않느냐고 물었더니 구워야 수분이 날아가서 당도가 높아진단다.
잠시 후, 난 그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다 된 거 아니야?”
“3분만 더 기다려.”
3분 짜장도 아니고,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게 만드나. 불만스레 생각하면서도 꼭 식충이가 된 것 같아 수긍하고 조신하게 기다렸다.
이라칼은 곧 불가에서 잘 구워진 고구마를 끄집어냈다. 화끈 열기가 느껴져 손이 델 것 같았지만, 난 주저 없이 고구마 하나를 집어 들어 깠다. 필연적으로 따라와야 할 통증은 없었다. 내 손 거죽이 남들보다 유독 두껍기 때문이 아니라, 요즘 들어 계속 몸 안에 축적하고 있는 탓에, 넘쳐흐르는 마력이 자연스레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노오란 살갗이 드러나고, 김이 폴폴 올라오는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문 난 잠시 행복감에 잠겼다. 야영 중에 갓 불로 구워낸 이 맛, 길거리에서 파는 것도 댈 게 아니다. 옆에서 이라칼이 조심스럽게 껍질을 까고 있었다. 상전보다 먼저 처먹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을 부라리는 얼굴에 웃음이 났다.
그래, 넌 열심히 수발을 들라고. 난 먹을 테니까.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세요.”
이라칼은 깐 고구마를 천에 둘둘 말아서 조막만 한 아이한테 공손히도 쥐여주었다. 그리고 마스터는 나 같은 조급함은 없는 듯, 드러난 고구마의 표면이 먹어도 혀가 데지 않을 만큼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먹어도 달리 칭찬 같은 건 하지 않을 텐데, 수라를 든 왕 앞에서 치하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양 이라칼은 기대에 찬 눈빛을 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를 상기하게 해서 기분이 씁쓸했다. 난 고구마 하나를 다 해치우고 새로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그를 일행에 들인 건 현재까지 보면 퍽 잘한 일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본성이 거칠지는 않다고 하나, 이라칼을 아직 완전히 믿는 건 무리였다. 그 믿음이, 지금의 내게는 중요했다.
녀석이 하는 걸 보면서, 쓸모가 줄어든 나 자신에 대해서 자격지심이 들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있다면 내가 없어도……. 상관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허전해지지 않았다곤 말 못하리라.
그래, 그게 내가 바라던 바였다. 누군가가 내 자리를 대체하거나 해서, 마스터에게서 내가 필요 없어지는 것. 혹은 내가 없이도 마스터가 안전해지는 것. 그렇게 되면 내가 떠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토록 빠르게, 내 자리를 대체할 이가 나타났다. 아직은 불분명하나 그가 계속 따를 참이라면 이라칼에게 마스터를 맡겨두고 이별을 고할 수 있었다. 이후 난 내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두면 되리라. 하지만 마스터는 내게 단순히 떠맡겨야 할 물건이 아니다.
그게 문제였다.
마스터를 떠난다는 데, 난 일순 공포심마저 느꼈다. 정겹다거나 다정스럽진 않아도 마스터가 있는 곳이 내게 집이었다. 그의 곁이 내 자리였다. 이제까지, 이곳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쭉 그랬다.
그런 그를 떠나서, 알아낼 수 있을지 확신조차 할 수 없는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을 떠돌아야 한다. 그 까마득함이라니.
특별히 소란스럽게 굴지 않은 한 위협이 될 만한 일은 없을 터. 마탑에서도 나보단 마스터를 추적하는 데 힘을 쓸 것이고, 그들이 날 쫓는다 한들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할 테지. 그것들은 두렵지 않다.
다만,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둘이라 하여 서로 사이가 돈독한 것도 아님에도. 내가 끝을 말한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말로 단절이기에.
내가 그를 떠난다면, 마스터는 그를 계약 위반으로 규정짓고, 힘을 되찾게 되는 날 내게 대가를 취하려 들 텐데.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내 갈망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토록 이분법적인 자라. 그럼에도 그와 갈라서는 게 두려워서.
그렇다고 해서 마스터에게서 직접, ‘떠나도 좋다.’라던가, ‘네가 필요 없다.’라는 말을 듣는 것도 원치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고구마나 먹자.
그 도피에 가까운 결론은 아주 빠르게 났고 받아들여지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난 목이 막히도록 빠르게 고구마를 목구멍으로 밀어 넘겼다. 내적 갈등이 심하면 입으로 뭘 먹어도 맛을 모른다던데 내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듯 마음이 이완된다.
마지막 남은 고구마에 손을 뻗는 순간, 눈앞에서 가로채였다. 동시에 타박이 날아왔다.
“그만 좀 먹어! 나도 먹어야지.”
……먹을 필요도 없으면서, 라고 퉁명스레 생각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오래 산 영물답게 이라칼도 덩치에 비해서 무척 조금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난 아예 먹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초인이 된 것 같지. 화장실도 안 가고, 그러고 보니 생리도 안 하네…….
마지막 건 걱정해야 할 만한 일이었지만, 난 흘려 넘겼다. 나도 모르게 임신한 게 아니라면, 아직은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다.
오늘 밤에는 슬슬 꺼내야 할 만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간 마스터가 며칠 몸이 안 좋기도 해서, 캐물을 만한 기회도 없었다.
이라칼과 나 둘 중 누구도 쉴 필요가 없었지만, 마스터는 그렇지 못했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여행만 하는 것도 몸에 무리가 가는 듯, 마을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마스터는 또다시 열이 올랐다.
이라칼은 왕이 아파한다는 사실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 경악했지만, 그 사실이 그만치나 쇠약한 왕을 보필하고 있다는 의무감으로 치환된 듯했다. 그가 구해온 약초가 잘 들어 마스터는 금세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다만 그 원래 상태라는 게 별로 건강하지는 않아서, 난 마스터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차에 앉아만 있으니 체력이 저하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하루에 조금씩 걷는 걸 권유해보았지만, 딱 한 시간 걸은 결과로 마스터는 다음날 종일 앓아야만 했다. 세상에, 몸이 어찌나 연약하신지!
그러므로 여행도 하고, 사람도 피하고, 음식도 구해오고 요양 가는 병약한 도련님 모시는 양 그동안 나름대로 바쁘게 지냈던 터였다. 그 모든 건 이제 안정을 찾았고, 이제 바란으로 가는 국경에 부쩍 가까워졌다. 하루 이틀이면 닿을 만한 거리다.
이라칼에게 들려줘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감도 있는데 따돌리고 말할 수도 없었기에, 난 미루어 두었던 의문을 꺼내었다.
“마스터,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 작품 후기 ============================
제대로 올렸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좀 세심함이 부족해서.....후 전에도 여러 개 연재하다가 이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시놉을 손보고 있어요, 음....
아무래도 200편까지 가는 건 좀 그러니 150~180안쪽에 끝내는 걸로!
쓰고싶은 소설이 많아서 장편병을 고쳐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