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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10화 (110/155)

00110  8. 도주  =========================================================================

“나도 갈래.”

뭐라고?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녀석은 황급히 덧붙였다.

“새, 생각을 좀 해봤어. 내가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근데 지금 왕께선 상태가 좀……. 예전 같지 않으시잖아. 호위가 있으면 좋을 거라고. 보다시피 난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으니까 왕을 섬기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으니 동행하는 데 지장이 없단 걸 보여주려고 이러고 왔나 보다. 난 단칼에 잘랐다.

“내가 있는데 네가 동행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넌 왕을 두고 자리를 비웠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난 눈앞의 이 녀석 본모습이 어떤 건지 알았다. 그 때문에 외모차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녀석과 함께 여행한다는 게 굉장히 찝찝했다.

“네 눈동자는 너무 눈에 띄어!”

“이종족이라고 하면 돼. 내가 인간 세상에 나가본 게 이번이 처음일 것 같아? 어리숙한 인간 여자보다는 내 쪽이 더 도움이 된다고.”

으스대며 한다는 소리가 숫제 아니꼽기 그지없지만, 달리 반박할 말도 없다. 난 놈을 노려보는 그대로 마스터에게 물었다.

“마스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움을 받을지 말지는 당사자의 의견을 구해야 하는 법이지.

“묻겠는데.”

마스터는 요람처럼 몸을 묻고 있던 수레에 그대로 자리한 채 눈만 떴다. 흡사 왕가의 마차에 올라앉아 내려다보는 양 그 태에 알 수 없는 기세가 있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앞으로 내 명을 충실히 수행할 생각이 있나.”

“네, 물론이지요! 왕의 뜻이라면 그 무엇이든-”

들떠서 활짝 웃는 얼굴로 쏟아내는 녀석을 마스터는 무감동한 얼굴로 마주 보았다. 이내 선고처럼 그 말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저자를 죽여라.”

그 소리에, 나와 녀석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마스터의 턱짓이 가리키는 위치에는 어쩐지 잊고 있었던 사내, 숲지기가 서 있었다.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었다.”

그 명령에 나와 녀석은 약속한 듯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의식하지 않고 서로 민감한 이야기를 해버린 터라 아차 싶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죽이라고 하다니? 참 마스터는 숲지기와 녀석의 관계를 모르지 않던가.

“마스터, 그건 좀. 그러니까 저 둘은.”

말하면서 경각심이 들어서 난 곁눈질로 녀석 쪽을 살피며 몸을 굳혔다. 이 녀석은 괴물이고, 마스터가 왕이니까 그 뜻을 따라야 한다고 굳게 생각한다면 친분이 있었건 어쨌건 숲지기를 해치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짓을 벌이려고 했다간 내가 화를 낼 테고, 결코 동행을 허락지 않겠지만…….

다행히 얼빠진 낯짝을 보건대 그 정도로 말종은 아닌듯했다.

“저, 저어……. 저 필립은 저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해치고 싶지 않아요.”

“나를 섬기고 싶다고 말했으면서, 네 입놀림의 뒤처리도 하지 않을 셈이냐.”

마스터는 무섭도록 사정 봐주지 않았다. 느긋하게 되묻는 물음에서 예기가 배어 나온다. 살인멸구라니 잔인도 하시다고 비난하고 싶긴 한데, 생각 없이 떠벌리는 데 동조하다 보니 말이 막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난 짐짓 눈치를 살피고만 있었다.

숲지기가 질린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나, 나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만.”

“그를 어찌 믿지? 나에 대한 건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될 바였다. 당연한 순리이니.”

암흑을 뿌리듯 새카맣게 물든 눈이 녀석을 향해 꽂혔다.

“죽여서, 증명하라. 그리하면 동행을 허락하겠다.”

단순히 녀석과 동행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기엔 너무도 수위 높은 요구였다. 마스터를 ‘왕’이라 하였으니, 그의 명령에 대해서 본능적인 압박감을 느끼는지 녀석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본능과 감정의 저항 사이에서 심히 갈등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보기 안쓰러워서 절로 나서게 되었다.

“저, 꼭 죽이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요?”

“저자를 죽여서 입을 막는 게, 가장 간편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나는 재빨리 반박할 거리를 찾아냈다.

“하지만 숲지기가 마을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마을 사람들이 그를 찾을 거예요. 우리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그들 기억 속에 더 깊이 남을 거라고요.”

“그렇다면 마을을 몰살시키는 것도 괜찮겠군. 후한을 남기지 않게.”

떡하니 꺼낸다는 말이 너무도 스케일이 커서,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나도 혀가 굴러가지 않았다. 사람이 어쩜 저럴까. 진심이라는 게 더 소름 끼친다.

아, 사람이 아니지. 나날이 갱신하며 실감하는 마스터의 비인간성에 대한 고찰을 미루어두고, 난 반감이 그득 묻어나오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그건 안 된다고 말했지요? 만약 그런 명령을 내리신다면, 제가 저 녀석을 지금 당장 처리할 거예요. 마법을 써서라도.”

다분히 협박조였다. 그리고 정말로 난 그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간의 친분 때문에라도 안 된다고 당장 거절해버려야 했을 녀석이 망설이고 있는 게 몹시 아니꼬웠던 것이다.

마스터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분노하고 있는 걸까. 섬뜩한 압박감이 내게로 쏟아져 내렸다. 여기가 마탑이었고 그의 힘이 온전했다면 나는 감히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여기는 마탑이 아니고, 마스터는 그 사실을 주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돌연 옆에서 녀석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저, 저도 마법을 쓸 줄 알아요!”

그러더니 덮치듯이 숲지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너!”

말리기는 늦은 터, 녀석이 숲지기를 정말로 죽이기라도 했으면 베어버릴 참으로 난 황망히 로브에 손을 집어넣었다. 검, 내 검이 어디 있더라?

녀석은 숲지기를 자빠뜨린 뒤 손바닥을 그의 이마에 붙이고 있었다. 섬광이 일듯, 번쩍하는 빛이 지나가고 녀석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스터 쪽을 향해서 면목이 없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중얼댔다.

“기, 기억을 지웠어요. 절대 기억 못 할 거예요. 저도 이 이 정도 마법은 쓸 줄 안다고요.”

내가 마법을 쓰면 안 된다고 했지, 녀석에게는 제한이 없었다. 난 바로 마스터를 돌아봤다.

“수습은 했으니, 이걸로 용서해 주시면…….”

어쨌든 마스터의 명을 따르지 않은 건 사실이라 어물거리는 녀석을 두고 마스터는 시선을 거두었다.

“아힌.”

“네.”

“뜻대로 하라.”

그건 마치, 내게 한 걸음 양보하는 듯이 들리는 소리였다. 어쨌든 마스터도 내게 이 여행에 대한 사안을 결정할 권리가 있단 걸 인정한다는 뜻이리라. 하나의 성취를 이룬 듯이, 가슴이 뿌듯해졌다.

녀석은 막 죄책감 서린 얼굴로 숲지기를 옆쪽에 뉘어놓고 있었다. 처음의 반감과 달리, 녀석이 최소한의 기대를 충족시켜준 덕에, 난 녀석과 동행하는 데 긍정적이 되었다. 마법을 쓸 수도 있고, 유사시에 마스터를 보호할 수도 있다. 마탑의 시온과 비견되진 못하더라도 상당히 쓸 만한 일꾼…….

그리고 녀석은 굉장히 입이 쌌다. 그건 단점이지만 장점이기도 했다. 순종적인 체하면서 눈치 없이 나불거리는 게, 내가 마스터였다면 뒷목을 잡았으리라. 물론, 마스터가 정상이었다면 녀석을 살려둘 것 같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녀석은, 내게 마스터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었다. 좀 경계를 풀고 살살 꼬드기면 마스터가 없는 자리에서 이거저거 토설할지 몰랐다. 그게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장점이었다.

그리하여 난 결정을 내렸다.

“동행하는 게 좋겠어요. 그의 말대로, 제가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울 때 그가 마스터를 지킬 수도 있는 거니까요.”

불현듯 녀석이 아주 교활한 괴물이라, 마스터가 자리를 비운 새에 그를 해치려고 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게 잘 짜인 계획이라면?

마스터가 시온에게 뒤통수를 맞는 꼴을 보아서 그런지 의심병이 도져서 뭐든 쉽사리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수 없는 사실도 있었다. 놈이 그렇게 의뭉스럽고 잔악한 성품이라면 숲지기와 우정을 쌓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조차 꾸며낸 일이라고 해도, 일이 여기까지 되어오는 동안 그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색을 드러냈을 만하다.

그러니까 녀석이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한다는 그건, 믿어도 되지 않을까. 유사시엔 내가 마스터의 곁을 지키고 녀석을 보내면 되니까.

내가 별달리 조건을 달거나 까다롭게 굴지 않고 승낙을 표했음에도 녀석은 못마땅한 눈치였다. 왜 못마땅한 눈치냐면 네가 뭔데 그런 걸 정하냐는 거다. 즉 녀석을 일행에 넣을지 말지가 내 권한이 됨으로써 향후 필연적으로 내 아래에 놓이는 제 위치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것이었다.

하지만 입술을 불만스레 내밀면서도 녀석은 꾹꾹 눌러 참았다. 난 피식 웃으며 물었다.

“숲지기는 저대로 내버려둬도 되겠어? 맹수가 잡아먹을 수도 있잖아.”

“내 냄새를 묻혀놓았으니 건들지 않을 거야.”

“그래. 너, 이름이 뭐야?”

난 녀석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입으로 듣고 싶었다. 그래도 한동안, 어쩌면 꽤 길게 함께 여행하게 될 텐데 자기소개는 해두는 게 낫지 않겠어? 녀석은 불퉁하게 내뱉었다.

“이라칼.”

“그래, 이라칼. 난 아힌이야. 이젠 이름으로 부르라고.”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자 녀석이 마지못한 얼굴로 맞잡았다. 델 듯이 뜨거운 손이었다. 체온이 무척 높은 듯싶다. 난 턱짓하며 길을 가리켰다.

“출발하자.”

숲지기가 대충 어떻게 가면 될지 말해둔 바가 있어서, 그리로 가면 될 성싶었다. 이라칼이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듯 말은 좀처럼 걸음을 떼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라칼이 목덜미를 툭 치자 복종하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라칼은 마스터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곤 앞장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이라칼이 어린애 같은 인상과는 다르게 나보다 고작 십여 센티 작을 뿐이라는 걸 눈치챘다. 난 천천히 이라칼을 살피며 그의 앞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평범한 의상. 작지만 단단한 몸집에 이상적인 비율로 팔다리가 길게 뻗어있다. 인간으로 변신한 괴물은 대개 미형이라고 책에서 본 적 있다. 적의 방심을 유도하고 먹잇감을 미혹해서 해치우기 위함이라고.

그 말, 그대로의 생김이었다. 두드러지게 아름답진 않아도 모난데 없이 반듯하고 앳되어 귀여운 구석이 있는 이목구비다. 잔털 없는 복숭아색의 미끈한 피부는 노예상에서 보았던 가꾸어진 노예들의 것처럼 깨끗했다. 샛노란 눈동자엔 야성이 배어있어 일견 위협적이었지만, 반대로 야생의 새처럼 천진하게 비치기도 했다.

외형을 떠나서 내가 잊지 않아야 할 건, 녀석이 아무리 유순한 척하더라도, 마스터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본성은 맹수라는 것이다. 착한 맹수라도 타고난 손톱과 이빨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니.

여행길이니 별일이 다 있을 텐데 제 본체에 비하면 생쥐 같은 인간들을 상대로 그가 얼마나 인내할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일행에서 내가 그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단 건 알고 있겠지만, 내 통제에 녀석이 꼭 따라준다는 보장은 없다. 한 번 싸워서 꺾는 게 나을까.

……게다가 입도 무척 쌌지.

갑자기 걱정이 밀려들었다. 더불어 단단히 입단속을 해두어야겠다는 성급한 의무심이 솟구쳤다.

“이라칼.”

“왜.”

“너 사고 치지 마.”

“뭐라는 거야?”

“함부로 싸우지 말라고.”

“누가 싸운대?”

“그리고 마스터를 왕이라고 부르지도 마.”

“나도 알아, 그럼 뭐라고 불러?”

“펠.”

녀석은 마스터의 이름에 대해서 전혀 몰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펠은 내 동생이고, 넌 우리가 고용한 이종족 전사인 거야. 알았지?”

외형은 어리다 하나 실력으로 입증하면 될 터였다. 내가 세운 설정을 듣고 이라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일러주며 우리는 다음 마을을 향해 빠르게 이동해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는 만큼 미묘한 긴장감에 휩싸인 채로, 난 하나의 바람을 품었다.

이 새로운 동료와 어떻게 끝을 맺게 되던, 그 끝이 순조롭기를.

그것이 그를 일행으로 들인 내가 품을 수 있는 마지막 소망이었다.

============================ 작품 후기 ============================

챕터 종료.

몇몇분이 모 조연의 출연을 바라고 계시던데, 언젠가 나올 거예요.

의미심장한 대사를 던져서 재출연을 예고했음에도 안나오면 제게 돌을 던지시지요!

다음주내로 태양을 삼킨 꽃 외전을 완결지어야하므로(뭔가 의무심) 조만간 그쪽에 한편 올라갈 거예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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