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8. 도주 =========================================================================
“점심 먹고 출발하도록 하지요.”
난 통보식으로 던졌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간소하게 아침을 먹은 마스터는 드물게도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 있었다.
불씨가 남겨져 있다기보단 다 타버린 검은 재 같은 허무가 깔린 눈은 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생각하는 양 먼 곳의 하늘을 짚는 시선이 흡사 대기를 읽는 듯하다. 마스터는 그게 가능할 만한 능력자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입술을 달싹였다.
“행로는.”
당연한 듯이 보고를 요구하는 게 아니꼽기 그지없다. 어떻게 바란에 갈지 짜오긴 짜온 터라, 난 못마땅한 눈초리로 지도를 펴들었다. 내 세계에서라면 시골구석에 가서도 제대로 된 지도를 구할 수 있겠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이런 시골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지도가 변변할 리 없다.
마법이 좀 발달하여 측량은 그럭저럭 되는 편이지만, 상세하게 건물명 하나하나 나와 있진 않다. 그 때문에 내가 들고 있는 지도에는 우리가 머무는 이 마을이 속한 델피아와 샤자한을 포함한 인근 4국 정도의 간략한 지리만이 나와 있었다. 작은 마을은 그나마도 기재되어 있지 않고, 큰 규모의 마을만 간격을 두고 점점이 박혀있다.
그런 상황에서 온라인 길 찾기처럼 최적의 행로를 찾아내는 건 불가하다. 바란으로 갈 거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은근슬쩍 인근 국가들의 정세를 물어보았는데 다들 별로 아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 시골 마을에서 뭔가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래서 내가 짠 여행길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가끔 큰 도시나 마을에 들러서 물자를 수급하는 식으로, 대로를 따라가는 걸로. 산적이나 여행길에 있을 법한 위협은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았다.
난 손으로 지도위에 다소 단순한 형태의 선을 그었다.
“이런 식으로 가면 될 거 같아요. 다른 의견이라도 있으신가요?”
트집을 잡기라도 하면, 진작 말씀하시지 이제 와서 다른 말을 꺼내시면 어찌하느냐고 면박이라도 줄 참이었다. 마스터는 늘 그러하듯 내 불만 어린 기대에 응하지 않았다.
“그대로.”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국경을 통과하려면 신분증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데, 어쩌죠?”
“방도가 생기겠지.”
“어떤 방도요?”
대책 없이 하는 소리에 난 눈을 치켜떴다.
“보석이 있을 터, 관리를 매수한다면 되지 않겠느냐. 또한 국경이라고 해도 전역을 감시하고 있지 않을 테니 은밀히 행동한다면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갈 만하다.”
“그건, 그렇죠. 그런데 이 바란은…….”
난 잠시 말을 삼켰다. 마스터가 바란으로 가자길래 뭐하는 나라인가 알아보았더니 샤자한에 인접한 도시국가였다. 용병 출신들이 상인들과 뜻을 모아 세운 바란은 규모는 작으나 훈련된 정예군사가 있어서 다른 나라가 침범하기에 녹록하지 않으며 상업이 발달하여 대단히 부유한 국가라고 한다. 또한 중립을 표방하며 타국에서 저지른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하여, 많은 도망자들이 숨어든다고 했다.
여기서 이 도망자들이란 대개 정치적인 사유로 망명을 택한다거나 부당하게 형을 받은 자들을 말함이다. 이들이 죄를 저지르거나, 그러려는 시도를 보일 경우 엄벌한다고 하여 바란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적었다. 입국세도 물거니와 타국인이 바란에 일정 기간 이상 거류하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으니, 재력 있는 도망자들 아니면 택하지 못할 도피처였다.
우리도 비슷한 이유-반란-로 도망을 친 신세이긴 한데, 난 샤자한에 가까워지는 게 영 석연찮았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우릴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잖아? 게다가 바란이라는 도시국가 내에 마스터가 떼어둔 힘의 일부가 있다는 것도 미심쩍고.
뭔가를 숨겨두기엔 너무 협소한 곳이다. 물론 도시국가이니 그 규모는 작지 않겠지만, 거대한 마력을 품은 집약체를 감추기엔 말이다.
힘을 숨겨둔 곳에 분명히 이상 현상이 나타났을 텐데……. 어쨌거나 바란 관련해서 마법적인 현상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힘이 발산되지 않게 너무 꼭꼭 숨겨놔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자세한 건 출발하고 나서 이야기해요.”
마스터는 친절하게 설명한다는 말과 매우 거리가 먼 인종이었으니, 가면서 캐물어 볼 참이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드디어 출발할 수 있었다. 도착한 수레는 내가 처음 보았던 때보다 그럴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때를 벗기고 윤을 낸 외형은 허름한 태를 벗고 튼튼해 보였고, 개조해서 붙인 천장은 비를 막아줄 만큼 튼튼했으며, 안에는 푹신한 모포가 깔렸다. 아팠던 동생이 타고 갈 거라고 해서 신경 써준 듯하다.
난 걸어가며 길을 앞장설 셈이었지만, 너무 속도를 내지 않는다면 여자 한 명쯤 더 타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했기에 정 피로하면 그러기로 했다. 내가 끌고 가긴 할 건데 마스터도 마차를 모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말이 마스터를 목격하자마자 얼어붙은 듯이 파르르 떨며 유의미한 반응을 보였기에, 난 짐승조차 알아보는 마스터의 본질이 무엇일까 고민에 잠겨야만 했다. 원래 유순한 말이긴 해도 어쨌든 마스터가 몬다면, 더더욱 말을 잘 들을 것 같았다.
촌장을 비롯한 마을 원로들과 짧게 점심을 먹은 후-마법사와 함께 식사할 일이 흔치 않아서 무용담 정도로 삼을 느낌이었다-, 들고 온 짐이며 배달 온 짐을 모조리 정리해서 싣고, 빠트린 게 없는지 점검했다.
마스터는 타고나길 왕으로 태어난 양 손가락 까닥하지 않았고, 난 자폐증 걸렸다는 동생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막 부려 먹을 순 없었기에 일단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난 하녀가 아니란 말이지. 제자는 제자이긴 한데 고리짝 도제 관계처럼 온갖 잡일을 나 혼자서 다 챙기는 건 심히 문제가 있다. 육체적인 힘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선상에서 마스터도 제 역할은 해야 했다. 예를 들어, 여행계획을 짜는 거라던가. 요리를 돕는다던가.
후자의 경우는……. 달걀을 까는 마스터 같은 건, 좀 귀여울 것 같다. 난 망상을 뿌리치기 위해 머리를 휘저었다. 뭘 시킬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난 마스터를 마차에 태우곤, 말을 이끌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손을 흔들며 우리를 환송했다. 그 와중엔 섭섭한 듯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오래 머물지도 않았고, 별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찡했다. 하도 삭막하고 잔혹 무도한 인간들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사람다운 온기가 느껴질 때면 시린 몸이 찌릿하게 녹아드는 듯하다. 허허벌판 외딴곳에 떨어진 추위를 조금이나마 채워주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다시 생각해보니 이 세계에 온 시점에서 운이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이쪽 세계에 떨어진 후로 처음에 만난 그 여관 주인도 그랬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낯선 이에게 기꺼이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사람들. 마스터나 마탑의 사람들을 보며 끝 간데 모를 절망감을 느끼더라도, 탑 밖의 온기가 나를 지탱하게 했다.
내가 물렁하고, 얕보이는 인상이라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도 어쨌든 한몫은 할 것 같다.
여관 주인이 두툼한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와 과일을 잔뜩 싸주었기에 내일까지 먹을 만한 식량은 있었다. 물론 마스터가 먹을 것들이다. 마스터에게 섭식은 영양섭취를 위한 거라, 목적에만 충족한다면 맛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즉 마스터는 저녁때 먹은 거 아침에 또 못 먹는다거나 음식을 가린다거나 하는 윗전 특유의 까탈스러움이 존재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렇다고 많이 먹는 편은 아니니, 다 못 먹을 거 같으면 과일은 말 주지 뭐.
실은 내 쪽이 더 음식을 가렸다. 오랫동안 꿈도 꿔보지 못한 새콤한 김치나 따끈따끈한 쌀밥이 그리웠다. 그 때문에, 그를 제한 다른 음식은 뭐든 별로 당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난 오래 타향살이할 체질은 못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을 먹느라 고역스러워 하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었다. 전혀 순환되지 못하고 내 안에 고인 마력은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소요되고 있었고, 따라서 난 굳이 음식을 먹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마법사가 된 이후, 인간의 본능마저 잊어가는 느낌이다.
슬쩍 돌아보니, 마스터는 수레 위에서 담요를 덮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바퀴가 튼튼하여 흔들림이 적다지만, 그래도 이리 시끄러운데.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도 막을 친 양 그에게는 닿지 않는 듯했다. 이미 그만의 공간이 형성된 모습, 익숙한 것이다. 아마 결코 깨어지지 않을.
상념을 뒤로하고 난 수레를 이끌며 마을을 빠져나왔다. 이왕 평상복을 산 김에 인기척이 느껴지면 벗겠지만, 날이 쌀쌀하여 로브는 계속 입고 다니기로 했다. 고급스러운 붉은 로브를 입고 수레를 끄는 마법사라니! 그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광경일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이곳은 서늘한 가을이었다. 한 달 좀 덜 걸릴 여행 중엔 겨울에 가까워질 테지만, 바란 공화국은 델피아보단 따뜻하다고 했다. 피한을 가는 제비가 된 기분이라. 뭐, 나쁘진 않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비록 이런 상황이라도…… 마탑에만 콕 박혀 있다가, 임무에 연연하지 않고 이렇게 세상구경을 나오니 새로웠다. 자유롭게, 다른 세상을 여행하는 느낌이다. 그럴 마음은 없었지만, 내가 행로를 틀어서 온갖 곳을 뱅뱅 돈다고 해도 마스터가 어쩔 도리는 없을 터였다.
……그렇지, 관광지라도 물어보고 오는 편이 좋았을 텐데.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는 그때, 저 앞 언저리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종일 보이지 않았던가. 마지막 인사라도 남기려고 했는데.
난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곧 머쓱한 얼굴의 사내, 숲지기가 보였다.
“숲으로 돌아간 줄 알았어요.”
“이 일만 끝나면 그럴 생각이오. 그 전에, 며칠만 길을 안내해 드리려고 하오.”
침묵을 지켜준 것에 대한, 그 나름의 감사 표시리라. 목적지가 어딘지 밝힐 수 없단 데 생각이 미쳐 난 거절하려고 했다.
“괜찮아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다음 마을까지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소. 어차피 그리로 가실 게 아니오? 나를 따라오면 편하실 거요. 이 대로는 좀 돌아가는 길이고, 좀 가파르긴 한데 수레가 통과할 만한 빠른 길이 있으니.”
그건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난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다면 신세 좀 지겠어요. 근데 보다시피 수레에 자리는 없어요.”
“아가씨도 걸어가는 데 내가 수레에 타는 건 우스운 일이지. 갑시다.”
숲지기는 피식 웃으며 앞장섰다. 내가 괴물과 싸우는 걸 보았을 텐데, 그래도 아가씨 취급을 하다니. 그게 참 묘했지만,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건 날 하녀로 부리는 데 아무 거리낌 없는 어떤 분과 심히 비교가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숲지기와 동행하는 데는, 한 가지 계산이 또 있었다. 절대 잊을 리 없는 존재.
그 녀석은 숲지기와 동행한 후로 이십 분쯤 지난 시점에, 수풀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하도 소리를 버럭 내지르기에 놀랐다. 게다가 내가 예상한 모습이 아니었다. 독특한 외모를 하고 있다곤 하나, 인간 소년. 숲지기에게 들은 바 있었기에, 난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노란색 동공을 보고 바로 놈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난 인사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피차 예의를 따질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숲지기는 소년과 날 우려 섞인 얼굴로 번갈아 보았다. 소년은 숲지기의 존재에 움찔한 듯했지만, 기세를 죽이지는 않았다. 이내 소년은 제가 생각한 결론을 입 밖으로 냈다. 나로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