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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08화 (108/155)

00108  8. 도주  =========================================================================

난 헛웃음을 지었다. 마스터는 항상 반박할 수 없게끔 결론짓는다. 그의 결정은 단호하고 흔들림 없다. 입 밖에 나온 순간 모든 가능성을 거쳐 최고의 답안을 끌어낸 것처럼. 또한 자신의 죽음을 논하면서도 해야 할 일이라며 망설임이 없다.

그렇기에 당신은 다르다. 세상 누구와도 다르다.

그래서, 그러지 않아야 할 온갖 이유를 들먹이면서도 당신에게 끌리는 나를 납득할 수밖에 없다. 그 초연함은 내가 이제껏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것이므로.

하얗게 빛나는 빙하를 보듯, 완벽하게 제련된 다이아몬드를 보듯 그는 그대로 불가사의할 만치 완전하다. 실상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그가 내비치는 일면에 빨려드는 듯한 매혹을 느꼈다.

아니, 기실 초연하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그저 지독히도 무심하여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한단 것에 더 가까우리라. 서늘한 속삭임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과연 그는 무언가를 원해서 움직여 본 일이 있을까? 그런 갈망이 그에게 존재할까? 당연히 부정의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은 그 질문에, 놀랍게도 긍정의 답이 떨어진다.

그래, 그랬지.

마스터는 그 무언가 때문에, 이 마탑을 세웠다.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나,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침묵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절대적으로 그를 움직일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할지, 존재하지 않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적어도 탑을 세운 건 당위가 아닌, 그 무엇 때문에 그 스스로 움직인 일이리라. 그가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기에 성과를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의 동기가 궁금했다. 마스터가 마탑을 세운 건 단순한 권력욕이나, 야망 때문은 아닐 터였다. 그건 너무도 인간적이니.

얼음이 불로 탈바꿈하듯 때로 그가 드러내는 얼굴. 거기에 묻어난 감정. 그때의 그는 인형이다가 비로소 삶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럴 때의 상황을 따져보면, 어쨌든 내 존재가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마탑을 세운 목적과 날 하나의 선으로 잇기엔…….

무리수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너무 멀리 간 거겠지.

…확실히 그는 피그말리온의 조각이나 피노키오는 아니다. 다시 말해, 마스터가 비록 무생물과 흡사하게 보일지라도 정말 무생물인 건 아니었다. 그도 나름의 생각이 있고 목표가 있고 그에 따라 살아간다.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또 다르게 그는 열망에 가까운 목적의식을 품고 있다.

치밀하든 그렇지 않든, 그는 아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속내를 드러낼 줄 모른다는 말에 가깝다. 그게 유리하기도 하거니와, 아예 타인과 제 내면을 공유한다는 생각을 한 적 없이 살아온 듯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표정을 지어본 적이 없는 양 무표정에 익숙하며, 침묵에도 그렇다.

그냥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이다. 마스터에게 있어서 자신 이외의 존재는 사람이 아닌 짐승일 뿐이고. 질리도록 독하고, 잔인한 일면은 있지만 그건 그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인종이기 때문이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게 반사회적 성격의 특징이라던데, 솔직히 마스터와 뭐가 다를까 싶다.

그건 스스로를 갈무리한다거나, 제어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원래 그런 것이다. 그게 마스터의 성격이다. 그 점에 질리고 지쳤지만, 그래도……. 알 것 같았다. 물론 이 앎이 내 반감을 모두 해소해주는 건 아니라서, 난 앞으로도 그의 성격과 싸워야 할 테지만. 알았으니까 이제, 내가 그를 어떤 식으로 바꿔야 할지를 모색해볼 때였다.

그 이전에, 일단 이 마을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난 마스터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잠자리에 들었다. 숲지기의 사정을 보고해야 할까 했지만, 어차피 마스터에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리라. 숲지기와 그 녀석이 우정을 쌓았든, 둘이 친분이 있든 마스터가 무슨 상관이겠어?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땐, 어느덧 아침이었다. 떠날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강박감에 피로가 쌓여있었음에도 때맞춰 눈떠진 듯싶었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졌고, 출발만 하면 된다. 다만 그 이전에 물건을 좀 사두고 준비를 해야지.

난 잠들어있는 마스터 쪽을 흘낏 본 뒤 돈주머니를 챙겨서 밖을 나섰다. 내려가는 김에 여관 주인에게, 위에 식사를 올려보내라고 일러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고단한 여행길이 시작될 테니 마스터에게 든든하게 뭘 좀 먹여둬야 했다.

아주 이른 아침은 아니라 상점도 이곳저곳 문을 열었다. 내 마법 로브에는 꽤 이거저거 들어가는 듯하니 되는대로 물건을 사갈 생각이었다. 어젯밤 숲지기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괴물이 또 마을에 쳐들어올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랬다면 떠나기가 애매했을 테지.

난 우리가 떠나더라도, 괴물이 마을을 침범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설명하기 뭐한 사연이라 마을 사람들을 확실히 안심시켜주기는 무리겠지만, 숲지기에게 침묵하는 대가로 알아서 수습시킬 예정이다. 그 아저씨도 그 정도는 해야지.

그보다 어디보 자. 뭘 사야 하지? 난 귀 따가울 만치 호들갑스레 맞아주는 옷가게 주인을 앞두고 고민에 잠겼다. 가지고 있는 게 금화나 보석밖에 없었으므로 비용을 어떻게 치를까 생각했는데, 괴물을 퇴치해주었으니 물건값을 받지 않겠다고 가게주인이 먼저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이런 작은 마을에선 옷 같은 거 다 만들어 입으니까 재고가 쌓여서 그런 것 같긴 한데……. 나야 좋았다.

우선 마스터에게 맞을 만한 치수의 아이 옷을 성의 없이 몇 벌을 골라낸 난, 여기 여자들이 흔히 입는 편안한 옷 몇 벌을 좀 심혈을 기울여서 골랐다. 거기서 거기긴 한데 색이나 재질이나 약간 차이가……. 여고생에겐 디자인도 중요하단 말이지.

여행복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굳이 고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나 여행하고 있소, 라며 티 내면서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등산갈 때 등산복을 챙겨입듯 여행 간다고 해서 대놓고 복장을 갖추지 않는다. 어디 험난한 곳으로 여행갈 것도 아닌데, 모험가들이나 입는 여행복으로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

다음 순서는 생필품이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론 마을에 꼭 필요한 경우를 제하곤 거의 들리지 못할 것이니 기본적인 것들은 마련해 놔야 했다. 야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난 챙길 만한 물건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도와 담요, 침낭, 부싯돌, 기름, 조리 도구, 그리고 갖가지 식재료들……. 로브에 보존기능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썩지 않을 만한 음식을 골라야만 했다. 지도 같은 건 꽤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기에, 공짜로 받는 건 무리였다. 이번 가게 주인은 나이 지긋한 중년 사내였는데, 그는 미안한 얼굴로 값을 깎아주겠다고만 말했다. 사실, 돈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이 마을은 워낙 외진 데 있어서, 다른 마을로 갈 때마다 흔히들 야영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난 전적으로 가게주인의 의견에 따라 담요 석 장과 밑이 깊은 냄비와 프라이팬, 국자, 자그마한 칼이며 기타 등등 필요할 만한 물건들을 구비할 수 있었다.

값은 금화로 치렀는데, 가게주인은 카운터를 통째로 뒤집어서 간신히 거스름돈을 맞춰 주었다. 그러고도 약간 모자랐는지, 이번에 산 것들을 여관까지 배달해주겠다고 했다. 부피가 꽤 있어서 어떻게 나를까 고민했으니 잘 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길 건너에 있는 빵집에서 노릇노릇한 빵을 사고-그 와중에 폭신폭신한 빵을 하나 해치우고-, 식료품상에서 치즈, 바짝 말린 육포며 조미료 같은 것들을 골라보던 난 막막함에 휩싸였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아차 싶었던 건, 내가 요리할 줄 모른단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난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주신 따뜻한 밥 먹고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니까. 라면 정도는 끓일 줄 안다. 더해서 학교 실습시간에 배워본 김치찌개 같은 건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선 이 식재료로 뭘 만들어야 할지. 어차피 내가 먹을 건 아닐 거라 실험정신을 보여도 될 거긴 한데, 그랬다간 마스터가 탈이라도 나면 곤란하다.

혹시 마스터…… 요리할 줄은 알까? 앞치마를 두르는 건 둘째 치고, 마스터가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을 만치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유능하디 유능한 마스터가 그토록 오래 살아왔으면서 요리를 할 줄 모른다는 건 문제가 있다. 암, 문제고 말고. 나도 어린 시절부터 ‘자기 밥 정도는 자기가 만들어 먹을 줄 알아야 한다.’라는 소릴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는데.

하지만 그런 걸 가지고 트집을 잡기엔, 너무도 대단한 분이라서. 평생 왕처럼 산 사람이니 나무라기 어렵다. 만약 그에게 섭식이 필요했다면, 밥도 남이 지어준 거 먹고살았을 텐데. 마스터를 몰락시킨 시온들도, 그가 세끼 밥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테지.

그런 이해를 떠나서 불만은 있었다. 솔직히 나도 귀하게 자란 자식인데, 짐말에 경호원도 모자라 이젠 요리사까지 하게 생겼다. 파천하는 왕을 수행하듯 온갖 치다꺼리는 다 해야 하는 신세다. 그러고 보면 마탑도 불공평한 신분제 사회였지.

“어휴, 내 팔자야.”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관을 나온 지 두어 시간쯤 지났나. 일단 살 건 대충 다 샀는데,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줄창 마스터를 업고 다니긴 싫으니, 말 한 마리와 뒤에 달고 다닐 수레를 살 생각이었다. 나야 걸어 다녀도 상관없으니 관리하기 힘들게 두 마리를 살 건 없고 마스터나 앉아서 가면 되니까.

빵집 주인에게 슬쩍 물어보니 여관 인근에 있는 공용 마구간에 가보면 팔려고 내놓은 말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맞았다. 아주 혈통 좋고 튼튼한 군마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으나 그래도 괜찮은 말 몇 마리가 투레질하는 게 눈에 띄었다. 물론 난 말을 볼 줄 모르지만,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살아서 그런지 말들은 꽤 건강해 보였다.

마구간 안에 있는 말 전부가 매물로 나온 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말을 모아놓고, 개중 판매의사를 밝힌 것만 마구간지기가 대리로 판매하는 식이었다. 내가 살만한 말 중 주인이 팔겠다고 한 건 두 마리였는데, 한 마리는 백마였고, 한 마리는 평범한 밤색 털의 말이었다.

난 잠깐 고민했다. 온통 검음을 상징하는 듯한 마스터와 백마는 대조가 되어 퍽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백마란 어떤 의미에선 로망이지. 말이라면 역시 백마랄까. 따라서 쓸데없는 이유로 나 역시 백마에 더 혹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고른 건 밤색 말이었다. 백마는 성질이 더럽다지? 물어보니 역시나 둘 중 밤색 말이 더 성격이 온순하다고 해서 골랐다. 말을 다룰 줄도 모르는데 성질 사나운 말이 수레에다가 뒷발길질이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수레는, 마침 내가 산 말이 촌장의 말이었기에 거래를 위해 만난 그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안 쓰는 수레라고는 하는데 먼지가 끼어있다곤 하나 기름 먹인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몸체가 튼튼해 보였고, 지붕도 얹혀 있었으며, 크기도 적당해서 딱 내가 찾던 그것이었다. 몇 년 동안 사용한 적 없는 수레이기에 청소와 정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촌장은 점심때까지 말에 매달아서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도망간 괴물이 다시 올까 봐 우리를 잡으면 어쩌나 우려했는데, 숲지기가 괴물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고 잘 둘러댄 모양이었다. 괴물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숲으로 돌아갔고, 마을엔 결계를 쳐놨다고 하던가.

촌장은 아쉬워하면서도 일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내 말에 굳이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괴물을 잡아달라고 하면 지불이 불가능한 액수의 돈을 요구할 셈이었던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다만 그는 마지막으로 식사를 같이하자고 말을 남겼다.

그렇게 난 오전 중에 마을을 떠날 채비를 모두 마쳤다. 금화만 썼는데도 넉넉하다 못해 잔돈이 많이 남았다. 보석은 쓸 일이 전혀 없어서, 당분간 돈으로 바꿀 걱정은 안 해도 될 성싶었다. 여행사정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넉넉할 것이다.

물론, 이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여행하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그 전에 결론이 난다면 후련하겠지만, 그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마스터가 힘을 되찾는 것이었기에 섣불리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별로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신경 써서 물건을 고르며 쇼핑을 했더니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빼놓은 건 없는지 머릿속으로 점검해본 난 양손에 짐을 바리바리 들고 걸음을 재촉해 여관으로 돌아갔다. 충실한 비서가 따로 없다.

============================ 작품 후기 ============================

요즘은 동물을 분양한다고 많이들 말하죠. 사고판다고 말하는 건 꺼리는 추세라서. 근데 소설에서 분양한다고 쓰긴 좀, 뭐랄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라...

1월 9일날 출간예정인 태양을 삼킨 꽃 현재 인터파크, 알라딘, yes24, 지마켓, 뿔미디어, 로망띠끄 등등에서 예약판매중입니다. 예약판매 이벤트도 해서 던킨 상품권을 준다고 해요. 조만간 태양을 삼킨 꽃 if외전도 프리미엄란에 올릴 것 같아요. 아직 안썼지만 쓸 예정임. if외전이니까 본편과 상관 없는, 그냥 에피소드 외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굳이 안보셔도 무방함. 내용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렌카이저 이야기.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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