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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07화 (107/155)

00107  8. 도주  =========================================================================

“어디로 가야 할 것 같으냐.”

난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나는 확실히 도로 문답을 던지는 쪽보다 바로 간결하게 답이 나오는, 생각할 필요 없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동안 생각 안 해 보셨어요? 저한테 그런 걸 결정하게 할 만큼 제 판단을 믿으시진 않을 테고.”

“네 판단대로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럼 왜 물어보는 거야?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난 부글거리는 심정을 미소로 감추면서 논리를 펴냈다.

“마스터는 유귄과는 합류해선 안 된다고 하셨지요. 어쨌든 당장은요. 그를 제외하면 마스터 선에서의 조력자는 없다고도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세계에서 온 제가 달리 갈 만한 곳을 알 리 없잖아요? 제가 가본 곳은 얼마 안 되고, 꼭 거기 가야 할 이유도 없죠.”

난 말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가진 돈은 넉넉하다. 추적당하기 어려운 특징 없는 재물이다. 마스터와 동행하려면 마법을 쓸 만큼, 혹은 눈에 띌 만한 어떤 일이 있을 만큼 위험한 곳이 아니어야겠지. 확실히 소란을 떤 지금 이 마을에선 더 이상 머물 수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안전이 아니다. 안전을 확보하는 건 중요하지만, 그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해선 곤란하다. 마스터가 일정 수준 힘을 회복해야 내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있는 거고, 나 역시도 돌아갈 만한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져온 검. 마스터가 따로 숨겨둔 힘이 그 하나뿐이진 않을 거 같은데.

“가선 안 되는 곳은 말할 수 있어요. 샤자한이요. 저는 그곳의 왕과 친……하진 않지만 친분이 있어요. 필요하면 저를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고요. 그리고 그 사실을 란델이,”

란델. 그 이름을 발음하는 건 놀랍도록 껄끄러운 일이었다. 나는 다른 시온 중 누구보다도 그와 가까웠다. 란델에게는 내가 가장 가깝지 않은 시온이었을 테지만, 내게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와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폐부 깊숙이 휘돌았다. 난 찬 내를 삼키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샤자한은 안돼요. 거기 굳이 갈 이유도 없잖아요.”

“네 말대로, 샤자한은 아니다. 그러나 샤자한과 인접한 바란에 가야 할 필요가 있다.”

“바란이요?”

곰곰이 떠올려 보았지만, 내가 마스터에게서 받은 기초 지식에 포함되지 않는 나라였다. 이름은 알되, 어떤 나라인지는 모른다.

“샤자한과 가까우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거긴 왜 가셔야하 는데요.”

“네가 가진 검처럼, 내가 따로 심어둔 힘이 그곳에 있다. 필경 도움이 될 터.”

차분한 답변이었다. 난 겹겹이 어둠이 쌓인 마스터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어둠만큼이나 정체 모를 수수께끼가 짐승처럼 날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의문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과정을 건너뛰고 사고가 치달았다. 난 물어야만 했다.

“배신당할 걸 아셨나요?”

그는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왜 멀쩡한 마력을 따로 감춰두어야 한 건지. 그럴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제야 뭐든 말해주려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내가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 바 있으니, 그를 지켰다면 모르고 있겠지.”

떠보는 듯한 말에 난 불퉁하게 대꾸했다.

“네, 몰라요. 뭔데요?”

“너는 마탑의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 너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그건 왜죠?”

“마탑의 주인이 나이기 때문이다.”

마탑의 주인이 하필 그이기 때문인지 그가 주인이라는 자체가 문제인 건지, 중의적인 말이었다.

“봉인의 목적을 내가 무어라 말했더냐.”

무거운 진실이 덮쳐온 듯, 잠시 얼어붙었던 난 얼마 전 그가 불친절하게 언급한 바를 더듬어 보았다.

“마탑과 마스터의 단절이라고 말했죠. 마탑의 마력 자체가 마스터의 봉인과 맞부딪혀 반발한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봉인은 불완전하게나마 이루어졌다. 효력이 영원하진 못하나, 지금 이 순간은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지.”

난 일순 마스터의 상태를 살피었다. 앳된 음성도, 마력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어린 몸도 확실히 그가 약화되었단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의 상태는 탈출 직후와 거의 차이 나지 않았다.

“시온들의 목적은 마탑의 마력을 내게서 강탈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 힘을 가지고 싶어 했지. 마탑의 마법사가 타 마법사들보다 월등히 강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마력이 탑에서 비롯하기 때문이었으니. 그게 깨어지면, 마탑의 지배력도 무너진다.”

마탑의 독특한 마력원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었기에 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분이 퍽 복잡해진 터였다. 마스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길 원했으면서, 그 힘만은 탐한다니……. 물론 필요한 일이었을 테지만,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마력은 애초에 나 이외의 누구도 직접 사용할 수 없다. 그런 힘이다.”

“어째서요?”

“탑의 마력은 애초에 내게서 유래한 것이니.”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스터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털어놓고 있었지만, 그가 애초에 이를 입담은 것부터가 이 사실이 중요하다는 걸 방증했다.

난 엘로힘을 부화시켰던 그 순간, 내가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태양인가, 폭풍인가, 우주인가. 그 아득하니 심원하고, 또한 제어할 수 없이 광포하며 찬란한 힘. 뱃속이 떨리게 만들었던 그 아찔한 광경. 그때의 감각이 내 몸에 낱낱이 남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흡사 이적을 본 듯하여- 난 눈을 지그시 눌러 감았다 떴다.

헌데 그 근원이 마스터라고? 그건 어떤 한 존재가 소유하기엔 너무도 강력한 힘이었다. 한 세상을 송두리째 휩쓸고도 남을 힘이었다. 멸망도 파괴도, 그 무엇도 가능하게 할 마력. 그런 힘을 가진 자가 일찍이 세상에 있었다면, 필경…… 신이라 불리지 않았을까?

마스터는 뭐죠? 난 충동적으로 그렇게 물을 뻔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마스터는 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난 다른 질문을 꺼내었다.

“그건…… 이상한데요. 마스터에게서 비롯한 마력인데, 어떻게 마스터와의 연결을 끊어놓을 수 있죠? 그게 가능한 건가요?”

“내게서 비롯되었으나 분리하여 따로 보존해온 힘이니 단절하는 것도 가능할밖에. 그러나 다루는 건, 나만이 가능하다.”

분리하여 따로 보존해왔다, 라. 나는 그의 말을 곰곰이 되짚었다. 마스터의 정체를 캘만한 단서를 찾으려는 의도도 있었고, 내 마법적인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기에 이해하기 위해선 바삐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난 정리하듯 머릿속에 꼬인 지식을 말로 풀어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마스터가 매개였기에, 마스터가 부재한 지금 마탑의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단 거군요.”

그 이야기는 곧,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전과 같지 않다, 그런 의미겠군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시온은 제 몸에 쌓인 마력만으로도 여전히 강력한 마법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룻, 아모스는 그렇지 않지.”

그리고 시온은 마스터를 봉인하던 도중, 내 개입으로 부상을 당했다. 탑의 마력을 빌리지 않고, 체내의 마력으로 회복하는 건 더딜 수밖에 없는 과정이리라. 그렇다면 우린 이제껏 예상했던 위험보다 더 낮은 수준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거 진작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미리 말해주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더 방심해버렸을지도……. 그래서 마스터도 말하는 걸 미루었던 게 아닐까. 불만스럽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 난 일단 남은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마스터를 통해서만 마력을 쓸 수 있다면, 마력석은 무슨 용도인 건가요?”

마력의 전이를 위해 마력석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 마스터와 역할이 겹치지 않나?

“설명하기 모호하나 내 존재는 일종은 ‘허용’이다. 허용된 마력을 그대로 쓰는 것은 불가하다. 마력석을 통해서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탑의 마력은 제어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전에 말했을 텐데.”

어투가 조금 달라졌다. 두 번 말하는 걸 몹시도 비효율적으로 여기는 듯이, 냉담한 질타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가 한 말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있겠어? 난 내심 투덜대면서도 마스터의 말을 듣고, 불현듯 한 조각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탑의 심층부, 그곳에 무한한 힘을 지닌 마력의 원천이 존재한다. 그를 바탕으로 마탑이 세워졌지.’

마탑의 심층부에 존재하는 마력의 원천……. 마스터는 마탑을 세우기 위해, 제 힘을 분리해내었다. 왜?

그러나 지금 그 ‘왜’는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난 회상을 이어갔다.

‘거기에서 파생된 마력은 강력하고 파괴적이라 통제하기 어렵다. 그를 마법사가 운용하려면 필히 마력석을 통해 여과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여과 과정을 거치기 이전, 마스터의 존재가 마탑의 마력을 끌어다 쓸 수 있게 한다. 즉, ‘허용’.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머릿속에서 논리가 맞춰져 간다. 아주 선명하게 그려지는 상은 아니나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난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을 꺼내야만 했다.

“마스터의 ‘봉인’은 어떻게 하면 부술 수 있나요?”

난 해답을 구하듯 마스터를 똑바로 응시했다. 완전한 봉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마스터는 이전, 몽환의 미로에서 내가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와는 달리 어디로 가야 할지 향방을 제시했다. 바란으로 가야 한다고. 그렇다는 건, 봉인을 깨는 방법에 대해서 그간 짐작한 바 있다는 뜻이었다. 최소한 뭘 해야 할지는 안다는 뜻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확실한 방법은 시간이다. 그러나 내 힘이 복구되는 시간이, 그들이 날 찾아내는 시간보다 적게 걸릴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

“인위로 봉인을 깰, 부자연스럽지만 유효한 방법은요?”

“이 방법이 유효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론일 뿐이라도, 가능성은 있다.”

마스터는 찬찬히 설명을 펴냈다.

“현재의 나는 영에 새겨진 봉인으로 인해, 탑의 마력을 거부하는 상태다. 탑의 마력이 흘러들면, 봉인이 내 그릇을 압박하여 부술 것이다. 허나 봉인은 정교하나 완성되지 않았다. 거기엔 미세한 균열이 있다. 그러므로 방법은 간단하다.”

“…….”

“본질적으로 같은 근원을 둔 마력을 일정 수준 이상 일거에 쏟아부음과 동시에 영을 개방하여, 탑의 마력을 끌어들인다. 탑의 마력은 서로를 부르는 속성을 띠고 있으니. 그러나 출처가 다른 두 마력의 흐름은 균형이 맞춰져야 한다. 형(形)이 부서지기 전, 상통에 성공하면 그 중심에서 봉인은 깨어진다.”

마스터는 현재 당장에라도 깨어질 수 있는 달걀과 같다. 외부의 압력이 가해지면 껍질은 부서지기 마련. 그러나 내부의 압력과 외부의 압력이 동시에 가해져서 중간에서 균형이 이루어진다면, 금속으로 코팅하듯 단단한 껍질을 되찾게 된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척 듣기에도 아슬아슬한 이론이었다. 본디 제 마력이라지만, 마력 한 점 없는 몸으로 그 정도의 힘을 다루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마스터를 얕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게 아무리 마스터라도 쉬운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위험한 일 아닌가요? 실패하면요.”

“나는 죽음에 가까운 상태가 된다.”

“……일전에 허깨비 같은 존재가 된다고 하셨던, 그 상태 말인가요.”

“그건 그나마 이지를 유지한다는 전제를 가졌다. 실패한다면, 반동이 클 테니 그보다 더한 상태가 될 테지. 유령도 아닌,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저 존재할 뿐인 채로 잠들 것이다.”

가슴이 서늘해진 난, 생각도 하지 않고 불쑥 내뱉었다.

“그 방법, 제가 반대한다면요?”

“대안이 있느냐.”

말문이 막혀 난 입술을 깨물었다. 마스터의 지식은 나보다 폭이 넓었고, 그가 찾아내지 못한 다른 방법이 내게 있을 리 없다. 그의 말은 지극히 합리적인 분석을 따랐다. 그럼에도 난 순순히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다.

“마스터는 두렵지…… 않으신가요?”

난 두려운데. 내게 일어나는 일이 아닐지라도, 이리도 두려운데. 말만 죽음에 가까운 상태이지, 그렇게 되면 마스터는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된다. 어쩌면 영영. 회복에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려서, 내 삶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의 삶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겠지. 그게 죽음과 얼마나 다를까?

홀로 남는다거나, 시온들과 홀로 대적해야 할 상황, 그 무엇도 그보다 두려운 게 없었다. 차마 시선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짓씹는 내게 마스터는 다만 단정하듯 말했다.

“이 상황을 타파할 만한 다른 길이 없다면, 다소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은 신년에 올리겠네요

태양을 삼킨 꽃 종이책이 알라딘, 뿔미디어 홈페이지에서 예약판매중입니다.

1월 8일 출간예정이에요~ 표지 예쁘게 나왔으니 한번 보고 가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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