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6 8. 도주 =========================================================================
숲지기와 따로 대화를 나눌만한 시간은 그로부터 상당히 후에야 찾아왔다. 느지막이 식사가 파하고, 마을의 영웅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쉬운 듯 의자에 착 달라붙은 엉덩이를 떼지 않으려고 하던 사람들을 내보낸 뒤, 난 별거 아닌 듯이 태연하게 숲지기를 불러냈다.
마스터도 먼저 방으로 올라가고 여관 주인도 휴식을 취하러 갔기에 텅 빈 식당에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여러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 나를 유인했는지, 설명해 주세요.”
칼같이 내쏘자 숲지기의 눈썹이 치들렸다. 화가 난다기보단,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일 수 있소, 그렇다고 말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니 듣기 이상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들어주길 바라오.”
당최 무슨 이야기길래 이렇게 묵직하게 서론을 깔고 시작한단 말인가. 여하간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 숲의 숲지기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오.”
그때의 숲지기는 젊었다-그 말을 하며 숲지기는 지금도 늙지는 않았다고 강조하듯 덧붙였다. 내 참,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아무튼 숲지기는 이전 숲지기에게서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고 한다. 괴물이 싫어하는 이튼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는 곳을 경계선으로 너머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영감은 숨이 넘어갈 때까지 당부에 당부를 남겼다. 그러나 원래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본 것 외에는 잘 믿지 못하고, 이 숲지기는 더더군다나 그랬다.
호기심도 있었다. 그렇게 흉악스러운 괴물이라니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보자, 뭐 그런 심리였다. 컴컴한 숲에서 홀로 살아가는 숲지기는 필연적으로 담대한 성격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탐사에 나섰다. 체취를 가릴 수 있게 몸에 풀을 잔뜩 문지르고 만약을 대비해 이튼나무 수액을 주머니에 따로 챙겨서 꼭꼭 밀봉했다. 괴물과 마주치면 뿌리고 도망가 버릴 셈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숲에 들어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괴물과 마주치게 되었다. 마침 숲을 헤매고 다니느라 지치고 허기가 진 터였다. 막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육포를 뜯고 있던 참에, 괴물이 숲지기 앞으로 기척도 없이 위쪽에서 떨어져 내렸다.
둔중한 소리가 울리고,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갑자기 등장한 괴물과 코앞에서 눈을 마주친 숲지기는 먹고 있던 육포를 떨어뜨렸다. ‘어, 으, 어.’ 이상한 괴성만이 간신히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야말로 기절할 만큼 놀랐던 것이다.
초승달처럼 날카롭고 흰 이가 눈앞에서 번뜩이는 걸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새하얘져 이튼나무 수액 같은 건 생각나지도 않았다. 놈이 공포에 질린 툭툭 앞발로 건드리자 저절로 몸이 옆으로 말렸다. 놈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맹수처럼 숲지기를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그 와중에 품에서 어린아이 주먹 만한 알사탕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즉각적으로 영양을 보충하기엔 설탕 덩어리만 한 게 없었기에 비상식량조로 가지고 다니는 거였다.
놈은 호기심이 동한 듯 눈을 빛내더니, 냉큼 사탕을 주워 먹었다. 그리고 짭짭 소리를 내어 맛을 음미했다. 사탕은 금세 놈의 입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나도 곧 저 사탕 같은 신세가 되겠구나 싶어 망연해하고 있는 숲지기에게, 괴물이 코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말이 들려왔다.
[이거 대체 뭐지? 엄청 달고 맛있는데, 인간의 음식인가? 또 없어?]
그때 숲지기는 너무도 놀라, 반쯤 정신을 잃었다. 괴물이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곳엔 샛노란 눈을 가진 어린 소년이 오도카니 앉아서 지루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다.
“겁쟁이.”
비웃듯이 말하는 입안으로 슬쩍 송곳니가 엿보였다. 상식을 넘어서 숲지기는 어렵지 않게 소년의 정체를 눈치챘다. 인간으로 둔갑한 괴물이었다. 옷차림도 마을 사람의 것처럼 그럴싸했다.
괴물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니 두려움이 감해져서 담대함이 살아났다. 이튼나무 수액의 존재를 상기한 숲지기는 놈에게 살살 말을 걸어보았다. 혹시 날뛰면 재빨리 수액을 끼얹고 달아날 셈으로. 그간 오랫동안 숲에서 홀로 살아와 외로웠던 탓인지 놈은 순순히 대화에 응했다.
그리고 숲지기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괴물은 생각보다 성격이 괜찮았다. 놈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여러 가지였다. 놈은 이제까지 인간을 한 번도 죽인 적 없다는 것, 사람들이 괴물을 보고 지레 벌벌 떨며 나자빠졌다는 것, 이튼나무 냄새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이 숲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부러 질색하는 척했다는 것, 영역만 침범하지 않으면 누구도 해할 생각이 없다는 것. 아, 그리고…… 알사탕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괴물은 숲지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과 대화한 사실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사탕을 가지고 올 거면 숲에 들어와도 된다고 말한 뒤 총총 사라져갔다. 그리고 무사히 오두막으로 돌아간 숲지기는 갈등에 빠졌다.
오늘은 괴물이 변덕을 부려서 그를 살려 보내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은? 다음에는 이번처럼 행운이 따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숲지기는 곧 깨달았다. 놈뿐만 아니라 자신도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단 것을. 그래서 결국 그 숲 속으로 다시 향하게 될 거란 것을.
며칠 후 숲지기는 이튼나무 수액 대신 사탕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들고 숲으로 들어갔고, 그렇게 괴물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우정이라고 표현할 만한지는 알 수 없으나 숲지기는 괴물과 제법 돈독한 사이를 유지했다. 괴물은 제 이름을 이라칼이라고 말했다. 이라칼은 고집이 있긴 했지만, 괴물치고는 성격이 순한 편이었다. 주기적으로 숲지기가 사탕이나 군것질거리를 가져다주자 이라칼은 보답으로 사냥감을 하나씩 내어다 주었다.
그렇게 교류한 지 몇 년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개중 하나는, 이동 마법에 오류가 생겨 숲에 떨어지는 인간들의 문제였다. 이라칼은 그걸 굉장히 귀찮게 여겼다.
[이봐 인간, 내 숲에 이물질들이 또 떨어졌다고. 적당히 밖으로 내몰 테니까 얼렁 주워가.]
이라칼이 그 인간들에 대해서 표하는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지성을 가진 다른 종족이 제 영역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 몹시 불쾌하게 여기는 터라, 이라칼은 발 빠르게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래서 숲지기는 나와 마스터가 그의 오두막을 방문했을 때, 무척 놀랐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는 침입자가 있으면 이라칼이 먼저 숲지기에게 알려주고 그들을 토끼몰이하듯 숲 밖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내가 유난히 강한 마법사라 혹시 이라칼이 죽거나 다친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와 함께 있었기에 자초지종이 궁금하면서도 숲지기는 이라칼과 접촉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우리를 마을로 인도해놓고 나중에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이라칼이 숲을 이탈해서 제 오두막까지 왔단 걸 알게 되자, 숲지기는 또 한 번 놀랐다.
이라칼은 이제껏 단 한 번도 그의 오두막을 찾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마을에서 이 기회에 괴물을 때려잡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슬슬 걱정이 되었다.
이라칼은 공격적인 성품이 아니었다. 그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들어야 했다. 싸움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중간에 낀다면 좀 더 원만하게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숲지기의 생각은 거기에 미쳤다. 일단 그가 보기엔 나 역시도 그리 날카로운 성격은 아닌 듯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놈과 접촉하여 대화할 만한 자리를 만드느냐였다. 숲지기가 오두막 쪽으로 향한 사이에 길이 엇갈려 이라칼이 마을에 들이닥치면 곤란했으므로, 따로 놈을 찾아 나서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놈이 마을에 쳐들어오기를 기다려 대화를 나누자고 할 수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놈을 두려워하고, 놈도 영역 밖에서는 잔뜩 곤두서있을 테니까.
그래서 숲지기는 일단 나를 끌고 나가서 이라칼을 불러내고자 계획을 짰다. 약초꾼 친구는 친분도 친분이거니와 그에게 목숨 빚을 진 게 있어서 창고 속에 숨어있으라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숲지기는 약초꾼의 안위를 몹시 걱정하는 척하면서 나를 불러내어 탐색에 나섰다.
마을 밖으로 나가서 내내 휘파람을 불어댄 이유는, 애초에 숲 속에 들어서면 항상 휘파람을 불었었기에 그걸 듣고 이라칼이 찾아와주길 바라서 그랬다고 한다.
거기까지 듣고 나자 나도 정리가 되었다. 숲지기는 괴물이 마스터에게 해를 끼칠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쁜 의도로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 딴에는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보려고 벌인 짓이다. 마을로 돌아오니 나와 이라칼이 서로 적대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여서, 말려보려는 찰나 이라칼이 도주했다며 숲지기는 말을 맺었다.
난 그의 말을 들으며 묘하게 찜찜함을 느꼈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대로 보인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 걸까,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걸까.
내가 그를 마을의 배신자 취급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모든 진실을 악의적으로 토설해내면 어찌하려고 이렇게 다 말해. 말하라고 한 주제에 잠시 불만스러운 기분이 되었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난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은 잘 알겠어요. 속인 건 기분 나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죠.”
“이라칼과는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요?”
이제 보니 그는 놈에게 꽤 정을 준 듯, 무척 염려하는 눈치였다. 내가 놈을 쫓아 보낸 것도 모자라 해치려고 들까 봐. 내가 놈에게 검을 휘두른 모습을 보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괴물주제에 참 인망도 두텁다. 놈은 숲지기가 저를 이렇게 생각해주는 거, 알긴 알까? 하긴 숲지기를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가긴 했었지……. 난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어요. 이라칼이라고 했던가. 녀석은 우리가 마을을 떠나면 그때 찾아오기로 했어요. 아 물론, 대화로 해결할 거예요. 싸우진 않을 거라고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라며 난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끝끝내 확인을 해야 성이 차겠는지 숲지기가 마을을 떠날 때 동반해도 되느냐고 묻길래 난 냉큼 좋을 대로 하라고 답해버렸다. 어차피 대화는 마법어로 나누니까, 그는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다.
“이만 가보세요. 저도 좀 쉬어야겠어요.”
결론이 났으니, 이제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다.
밤늦은 시각이었다. 온종일 괴물이 쳐들어온다 어쩐다 해서 골치를 썩이고,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놈이 나타났단 소식에 헐레벌떡 뛰어왔으니 강철 체력의 나라도 피곤하긴 했다. 육체적 피로라기보단 정신적인 피로다.
숲지기를 뒤로 하고 난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소곳이 침대에 드러누운 마스터를 목격한 순간, 왠지 모르게 속이 울컥거렸다. 물론 고생한 것도 나고, 마스터야 뭘 할 수도 없고, 졸릴 시간이니 자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왠지 나만 뭔가 다 치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랬다. 물론, 내가 그런 사소한 것에 기분이 틀어진 이유는 근본적으로 마스터가 내게 비밀을 꽁꽁 싸안고 조금도 내보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긴 하지.
그리고 난 마스터가 스스로 원치 않는 한 목을 조른다고 해도 말해주지 않을 위인이라는 것도 안다. 종종 정말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이 들긴 하지만……. 난 눈을 가늘게 뜨고 마스터를 노려보았다. 흘겨보는 게 아니라 노려보는 거다. 분노를 담아서.
내 눈빛이 하도 강렬했는지 곤히 잠든 줄로만 알았던 마스터가 스르르 눈을 떴다. 스위치가 켜지듯 눈꺼풀이 고요히 밀려 올라가며 검은 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기척을 느끼는 데는 귀신이 따로 없다.
더군다나 그 인형 같은 모습이 왠지 좀 무서웠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앞에 다가가 앉았다.
둘밖에 없긴 해도 사실 우리 일행의 리더는 마스터잖아? 괴물 문제는 그렇다 치고, 이건 확실히 해둬야지.
“우리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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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삼킨 꽃 표지가 나왔습니다 이제 뭔가 구체적이 된 느낌이군요. 1월중 출간 예정입니다.
(오늘 마감인데 짬을 내서 한편 올립니다. 출근 혹은 등교길에 보시라고...)
소설도 마감시간내로 보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마도....
마감을 끝내고 나면 하나의 소설을 완전히 끝마친 기분이 들거같네요 ^*^
말씀드리는 걸 잊었는데(제가 장편병 못지 않은 중증 건망증을 앓고 있어서.....)
쿠폰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