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5 8. 도주 =========================================================================
[무슨 짓이야!]
크아아아앙! 요란한 괴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그 기세에 질릴 만도 한데 이미 놈의 어눌한 말투를 들어서 그런지, 더 이상 놈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입 냄새가 훅 끼쳐오는 듯하여 난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벨 생각으로 휘두른 건 아니었기에, 검은 놈의 가죽을 스치지도 않았다. 놈은 펄쩍 뛰며 한 걸음 물러선 것만으로도 내 공격을 피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기습에 분개하면서도 반격을 가하진 않았다. 그건 다분히 마스터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 녀석, 제가 마을에 쳐들어와 놓곤 내가 검을 휘둘렀다고 지금 큰소리치는 거야? 그럴 입장이 아니잖아. 적반하장격인 부분을 세세히 꼬집으며 난 다시금 놈에게 검을 겨누었다.
[여기서 나와 싸울래? 아니면 마을 밖으로 꺼질래.]
[난 왕을 만나러 온 거야! 방해하지 마.]
[마스터는 널 만나길 원치 않으셔. 들었잖아? 네게 바라는 것이 없다고.]
[그, 그건…….]
살벌한 광채를 내던 놈의 눈빛이 금세 시무룩하니 죽어들었다. 숲지기가 접근한 탓에 마스터는 내가 이전에 한 말을 인지했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마력이 있어야 마법어도 쓸 수 있는 거니까 지금으로써는 직접 입을 열어 말하지 않는 한 의사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
난 마스터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놈을 똑바로 보며 훈계를 퍼부었다.
[여긴 인간의 마을이야. 너 같은 괴물이 멋대로 쳐들어올 곳이 못 된단 말이지. 네가 한 짓을 좀 봐. 경비병을 쓰러트리고 여관문도 부쉈잖아? 이렇게 소란을 떨어놓고 설마 환영받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나는 왕을 뵈어야만 했다고!]
[그래서 결국 뵈었잖아? 더는 여기서 난리법석 떨지 말고 사라져. 만약 네 왕에게 볼일이 있으면, 조용히 남들 모르게 오라고. 우리가 평생 이 마을에 있을 건 아니니까. 생각이란 게 있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어?]
숲지기가 부쩍 가까워졌기에 난 거의 랩을 하듯이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말을 마쳤다. 놈과 친근해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을 굳힌 채 난 이쪽으로 달려오는 숲지기 표정을 살폈다. 혹시 그가 괴물과 결탁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서. 그러나 눈을 부릅뜬 채 이쪽으로 달려오는 숲지기의 얼굴은 가식이라고 보기 어렵도록 다급한 기색이었다.
왜 그가 약초꾼을 빌미로 나를 꾀어냈는지 이유를 유추하기는 어렵지만, 몹시 나쁜 속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든 내게 위협이 될 일은 아니리라. 그건 이 녀석을 치워버리고 생각할 문제다. 난 또다시 괴물에게 검을 들이댔다.
[싫으면 그냥 싸우자고.]
이번에는 날 끝을 제대로 겨누었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놈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베어버릴 참이었다. 나와 싸우거나, 물러가거나 둘 중 하나를 반드시 택하게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별반 거리낌이 들지 않는 건, 내가 담대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별로 놈에게 동정심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가죽도 두껍고 몸도 거대한 게 겉보기로는 튼튼해 보여서 좀 피를 흘린다고 죽을 것 같진 않았다. 사실 그의 앞에 서 있는 내 쪽이 훨씬 더 연약해 보인다. 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마스터가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으니, 어떻게…….
효과적으로 놈을 상처 입혀 내빼게 할 방도를 고심하는 찰나, 괴물의 시선이 움직였다. 놈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인영을 빠르게 읽어 들였다. 인지와 동시에 지각이 이루어진 그 순간 난 놈의 노란색 동공이 활짝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놀랐을 때의 반응이다.
놈은 얕은 신음을 내며 발을 굴렀다. 가늘어진 눈매 틈 사이로 호박처럼 광채를 내는 샛노란 눈동자가 나를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입에서 튀어나온 건, 내가 기다리던 말이었다.
[좋아, 마을을 나설 때까지 기다리겠어. 이 무식한 여자야. 그럼 되겠지?]
그리고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휙 돌린 놈은, 그대로 땅을 박찼다. 약진이라도 일어난 양 둔중하게 땅이 흔들리고, 바람이 훅 불었다. 움직임 자체는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듯이 날렵했지만, 질량은 그대로라 여파가 파동처럼 번져나가는 듯했다.
놈은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훌쩍 뛰어 마을 밖으로 사라져갔다. 난 놈이 완전히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르게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지 호흡이 가빴다. 마스터는 귀찮게 하던 놈이 순순히 떠나간 것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여전히 고요한 신색이라 조금 전까지 괴물의 습격을 받은 아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별로 걱정은 안 되었지만, 마스터에게 다가선 난 걱정하는 척 다정스레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숲지기의 시선을 십분 고려한 탓이었다. 마스터를 상대로 누나 행세라니, 속이 오그라들 지경이다. 그냥 섬기는 도련님이라고 할 걸 그랬어.
괴물이 떠나간 시점에서 속도를 늦추었던 숲지기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내 앞에 다다랐다. 아무리 숲에서 생활하여 체력이 좋은 이라도 여기까지 이 시간에 도착하려면 전력질주를 해야만 했을 터였다. 그러나 숲지기가 보이는 다급함이, 그가 나를 유인해낸 것에 대해서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나는 그를 향해서 싸늘하게 내뱉었다.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 괴물과 아예 무관한 일 같지는 않다. 놈도 숲지기를 의식하는 눈치 아니었던가. 그가 나를 더 멀리 유인해냈다고 해도 마스터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일단 난 표면적으로 동생을 위험에 빠지게 할 뻔한 사내에게 응당 분노를 표해야만 했다.
숲지기가 침중한 얼굴로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그때 여관 옆집의 창문이 슬며시 열리고 한 소년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괴물은 도망간 거예요?”
“그래.”
팔짱을 낀 채 짤막하게 대답하자 소년의 낯이 환해졌다. 놀람과 경외가 섞인 눈빛이 부담스럽게 나를 찔렀다. 그는 날 우러러보는 듯한 표정으로 목청껏 소리쳤다.
“모두 나와 봐요! 마법사님이 괴물을 물리치셨어!”
그리고 주변은 곧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불안해하면서도 차마 내다보진 못하고 쫑긋거리며 귀를 기울였던 모양이다. 곧 여관이며 각 집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마법사님 정말 대단하셔!’, ‘그렇게 흉악한 괴물이라니! 정말 온몸이 다 떨렸다고!’ 따위의 말을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어대는 게 시끄럽긴 해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마을 사람들 간의 사이는 무척 좋아 보였다. 과하게 흥분한 감이 있었지만, 그간 이 마을이 별다른 위기를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있을 법한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숲에 괴물이 살고 있단 건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숲지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랬다.
들어가면 죽을지도 모르는 숲 속에 호기심을 해결하겠다고 구태여 찾아들어갈 이도 없었거니와 아무리 모험심 넘치는 아이들이라도 괴물을 보러 숲에 들어간다거나 하는 배짱 두둑한 짓을 벌이긴 어려웠으리라.
그들이 괴물의 존재를 확신한 건, 아주 가끔 나처럼 마법적인 이동 중 숲에 불시착한 사람들이 놈에게 된통 당해서 목숨만 가까스로 건진 채로 도망 나왔기 때문이었다. 불시착하고 숲을 헤매다가 죽은 이들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막상 괴물한테 잡혀 죽었다는 이들은 없는 걸 보니 그 녀석 생각보다 평화주의자일지도.
난 놈의 어눌한 말투와, 그 급격한 태세변환을 떠올리며 편견 어린 가정을 품었다. 놈은 그냥 인간들이 제 영역을 돌아다니는 게 거슬려서 죄 내쫓아 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자폐증 걸린 동생 배역을 맡은 마스터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게 불안한 듯이 내 손을 잡아왔다. 실상은 불편하다는 내색을 해서 빨리 이 소란의 중심지를 벗어나고 싶은 거겠지만, 그 작은 접촉에 내 심장 박동이 크게 치솟았다.
손이 떨리는 걸 눈치채지 않을까, 뺨이 확 달아오른다. 이대로 마스터에게서 ‘누나’소릴 듣는다면 심장이 폭발해버릴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게까진 않겠지……. 좀 아쉬운데.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 난 몹시 부끄러워졌다. 망할 대뇌망상이란! 아쉽다고 느껴버린 스스로를 속으로 손가락질하며 난 피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쉬고 싶다는 뜻이었다. 지나치게 튼튼한 몸은 피로를 느낄 줄 몰랐지만, 일단 소란을 피하기 위한 연기였다. 일단 이 자리를 파하고 숲지기와 대화를 나누어보는 게 좋으리라.
그리고 여관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온 마을 원로들이 내 의사를 빨리도 포착해낸 덕에, 곧 소강상태를 맞이할 수 있었다.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드십시오.”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기물이 파손된 여관주인이 열띤 눈길로 연신 음식과 음료수를 내다나르며 아주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난 얼떨떨함을 숨기며 미소를 고수했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것이니 기분이 가라앉을 만도 하건만,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는 괴물이 습격한 흔적을 잘 보존하여 마을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을 야욕에 불타고 있는 듯했다.
근데 이 여관 어차피 손님도 별로 안 오지 않나? 내 알 바 아니지만.
음식에 욕심이 별로 없는 마스터는 이전과 달라진 풍성한 식단에 별 감흥이 일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식사는 해야 했기에 옆에서 자리는 지키고 있었다. 나 역시도 마을 사람들의 성의를 거절하기도 뭐해서 일단 대접을 받고 있긴 했지만, 졸지에 마을을 구한 구세주가 되어버린 듯하여 기분이 묘했다.
괴물이 마스터를 노렸다는 데 가닥이 닿을 만도 한데 여기 사람들은 ‘괴물을 쫓아버렸다.’는 사실에만 시선을 빼앗긴 듯했다. 입을 모아 칭송하는 데 한 거 없는 나로서는 찔리고 낯간지러웠다.
순박하다고 해야 하나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이전에 마을을 방문한 마법사들이 하도 거만하게 굴었기에 자연스레 내가 상향 평가받는 거 같기도 하다.
들어보니, 마을 입구에 쓰러져 있던 경비병도 기절만 했을 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괴물이 생긴 것처럼 포악하진 않을 거라는 가설에 부합하는 소리였다. 사악한 괴물은 아니니, 굳이 벨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마을을 나서면서 녀석이 접근하면 이야기를 좀 나누어보는 게 좋겠다. 난 스테이크를 칼로 썰어내면서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했다.
마을 원로 중 한 명이 내게 넌지시 물었다.
“놈이 다시 오지는 않겠지요?”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어차피 목적은 우리였으니, 그럴 가능성은 낮다. 보아하니 마을을 습격할 마음이 있었으면 진작 그랬을 듯했다. 말하는 게 좀 능글거린다고 생각했던 한 원로가 큼큼 헛기침을 하면서 끼어들었다.
“이렇게 가녀리고 아름다운 분이, 그런 괴물하고 다 맞서 싸우시다니 정말 굉장한 일이로군요.”
낯 뜨거운 찬사에 목이 다 막혀서 난 콜록거리며 물을 들이켰다. 괜스레 마스터의 눈치가 보였다. 마탑에 속한 동안 외모에 관해선 거의 비교당하는 처지였기에 이런 칭찬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맞지 않은 옷을 걸친 듯 죄의식마저 느껴진다. 어느덧 자격지심이란 단어가 배어버린 처지에 대해 한탄하며 난 식사를 이어갔다.
괴물이 죽은 건 아니었으므로 취한 상태가 되면 곤란했기에 술자리가 펼쳐지진 않았다. 그냥 좀 거창한 식사였다. 나야 어차피 미성년자라서 술을 마셔본 적도 거의 없지만……
넓은 식탁 한쪽 자리에선 숲지기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와 이야기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조금 전 귀환한, 정확히는 마을 구석에서 튀어나온 약초꾼이 자신의 안전을 알린 터였다. 일을 좀 일찍 마치고 돌아와 창고 구석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곤 하는데, 아마 숲지기가 숨어 있으라고 시킨 걸로 추측이 되었다.
엉엉 우는 아내를 두고 곤란한 얼굴로 설명하는 약초꾼은 숲지기의 행동에 대해 듣고 의문에 휩싸인 눈치였다. 하지만 오랜 친구라는 말은 맞는 듯 그는 숲지기를 위해 침묵을 지켜주었다.
‘거봐, 아침까지 기다려보자고 했잖나!’ 라며 타박을 들었을지언정 숲지기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는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 신뢰가 두터운가 보다. 나 역시, 굳이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의심의 화살을 돌리진 않기로 했다. 사연이 있다고 여겼기에, 그의 해명을 들어볼 참이었다.
============================ 작품 후기 ============================
원고와 사투를 벌이는 연말.... 감기에 걸려서 앓고 있습니다(는 거의 다 나음)
날이 부쩍 추워졌으니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