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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04화 (104/155)

00104  8. 도주  =========================================================================

아, 아니 이게 뭔 일이야. 도리질 쳐봤지만 헛것을 들은 것 같지 않다. 환청을 듣기엔 내 정신 상태가 지나치게 멀쩡했다. 물론 나는 놈에게 이지가 있다고 추측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엘로힘처럼 겉모습이 그럴듯해서 마법생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이 녀석은 그냥 괴물 같았는걸.

하긴 겉모습이 짐승 같다고 해서 지성이 존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마법어를 전할 줄 안다는 건 단순한 육체적인 위력을 갖춘 것뿐만이 아니라 고등의 힘인 마력을 다룰 수 있다는 소리니, 인간과 비등하거나 그보다 우월한 지성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인간 중에서도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숲 속에 서식하는 오래 묵은 영물이기라도 한가. 덩치가 크긴 해. 미심쩍은 시선을 주는데 괴물이 눈을 끔뻑이며 또다시 물었다.

[당신이 왜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거죠? 깜짝 놀랐다고요.]

불손하게 따져 묻는 투는 꾸밈이 없고 격식을 차리지 않아, 퍽 순수하게 들렸다. 그건 엘로힘도 그랬었다. 하지만 놈에게선 경외하는 양 저변에 깔린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자기보다 위에 있는 이를 슬며시 올려다보는 듯이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네가 알 바 아니다.”

칼날같이 끊어낸 마스터의 음성에선 차가운 바람이 뚝뚝 묻어났다. 딱히 하대를 한다기보단, 마스터는 누구에게나 그랬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를 따라 이곳에 온 건 내게 도전하려는 바인가.”

그 검은 시선에서 섬뜩함을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닌 듯 괴물은 확연히 위축된 기색이었다.

[……저는 감히 당신께 도전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당신이 그런 모습을 취한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문득 괴물의 눈길에 내게로 돌려졌다. 샛노란 동공이 나를 핥듯이 샅샅이 관찰한다. 그 시선이 불쾌하고, 거북했다. 산만한 괴물의 시선을 받고 있는 데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도 있거니와 괴물은 마치 내가 마스터의 곁을 지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그 이유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깨달았다. 이 괴물은 엘로힘과 마찬가지로, 마스터의 진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내가 모르는, 짐작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어떤 것을.

신중히 날 관찰하듯 괴물은 이내 굉장히 생각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고,

[왜 이 인간 앞에서 말하는 데 금제가 걸려있는 건지-]

그 순간, 마스터의 기세가 변화했다. 암흑이 표백되는 듯한 돌변이었다. 그때까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잔잔하게 흐르는 안개 같았다면, 그것이 돌연 내리누르는 듯한 압박감으로 몸을 짓눌렀다. 두려울 만치 짙고 검어진,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눈.

텅 비어버린 것처럼 여전히 그에게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굴복하라고 본능에 명령하는 듯한, 그 아득한 절대감에 중력이 쏟아지는 양 숨이 막혔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놈은 금제라 말했다. 그 금제는 분명히, 내게 말하면 안 될 사실을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금제이리라. 왜 그렇게까지 내게 감추느냐고, 소리쳐 따지려던 말이 목구멍으로 먹혀들어갔다. 지금 마스터에겐 난 안중에도 없었다.

마스터는 놈에게 고요히 눈길을 찔러 넣고 있었다. 명백히 침묵을 종용하는 시선이었다. 지독한 공포를 맛본 듯 노란색 동공이 좌우로 흔들렸다. 놈은 얼어 있다가 겁먹은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쩔쩔매며 마법어로 변명을 쏟아내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입이 쌌습니다. 이젠 말 안 할게요. 제가 아직 어려서 금제를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말해서 안 되는 건지 잘 몰랐어요! 독립한지 30년밖에 안 됐거든요.]

잠깐, 30년밖에? 그럼 지금은 도대체 몇 살인 거야? 물론 놈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라도 마법사는 오래 사니까 기대수명이 다르긴 하다만. 이쪽 세계는 너무도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 많아서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어쩐지 괴리감이 느껴진다.

[자의로 그러고 계신 줄, 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왜 굳이 그러시는지 저는 잘……. 물론 높으신 뜻이 있겠죠. 제가 감히 참견할 일도 아니고…….]

내가 행여나 싶어 쫑긋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던 놈은, 마스터가 얼어붙은 눈빛으로 한발 다가서자 그 자리에서 물러나며 펄쩍 뛰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위협하는 양 거친 울음이 입에서 새어나와 대기가 떨릴 지경이다. 그 우렁찬 소리에 여관 안쪽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아 참, 안에 사람들이 있었지. 난 혀를 찼다. 뭉뚱그려 말하긴 했으나 놈은 꽤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고 있었고 이대로 놈이 떠들어대는 말을 들으며 마스터에 대해 뭔가 가닥을 잡아보고 싶었지만, 마냥 한담을 나누고 있을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그리고 마스터의 위압감에 질린 놈은 떠들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 거대한 몸뚱이를 하고서 눈을 굴리는 모양새가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마스터는 놈을 향해 차게 물었다.

“내게 용무가 무엇이냐.”

[그게 뭐, 그냥……. 잘못 본 건 아닌가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랬죠.]

우물쭈물하면서 말하는 내용이 기가 찼다. 결국 호기심을 해소하려고 따라왔단 말이지? 그리고 마을에 침범해서 갖은 민폐를 다 끼치고 있다. 다들 이 녀석 때문에 수명이 줄 만큼 줄었을 것이다. 난 꼬인 심정을 드러내며 질타했다.

[마을에는 왜 들어온 거야? 우리가 나타날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리면 되었잖아.]

[아니, 인간의 마을에 들어선 게 이상하잖아. 그렇다면 내가 착각했다는 거니까……. 여기 냄새가 낯설어서 흥분하기도 했고.]

[인간의 마을에 들어설 수도 있지. 그게 뭐가 어때서.]

[그게 뭐가 어떠냐니, 이상하단 말이야!]

끼어든 내 질문에 놀라우리만치 술술 대꾸하던 놈은 울컥해서 내뱉더니 곧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애초에 왕께서 인간들하고 엮일 이유가 뭐람?]

그 순간, 마스터의 눈동자가 일순 새카맣게 물들었다. 원래도 검었지만, 지옥의 심연이 피어오르듯 검게 번뜩이는 광경은 등골이 오싹했다. 난 마스터가 드물게도, 분노와 유사한 강도로 경고를 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경고이자 살의에 가까웠다. 마스터에게 힘이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의지를 기꺼이 실행에 옮겼으리라.

이와 유사한 모습, 본 적이 있었다. 마탑에 온 첫날 블레셋이 마스터에게 대들었을 때-

그때 마스터가 딱 그러했다. 다만 블레셋에게 강경하게 굴었던 이유가 하극상 때문이었다면, 지금의 건 밝히지 않길 원한 것을 제멋대로 밝혔기 때문이다. 난 그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도는 다르나 마스터가 원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단 건 꼭 같다. 기세의 변화만으로도 마스터 주변 기온이 극점에 이를 만치 떨어져서, 몸이 시려올 지경이었다. 나는 놈이 발설해버린 말을 곱씹었다.

그 단어, 왕.

물론 마스터는 마탑의 주인이며 군주였다. 그러나 저 괴물과 마탑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 같진 않다. 탑주로서의 마스터를 말함이 아니었다. 엘로힘이 알고 있듯 놈도 마스터의 본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스터가…….

[왕이라니?]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의혹에 휩싸인 채로 내가 마스터와 놈을 번갈아 보자 놈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몰랐어? 어, 서, 설마 이거도 말해선 안 되는 거였나요…….]

그 반응에, 갑자기 난 화가 치밀었다. 오늘 처음 본 저 괴물 놈도 아는데 반년도 넘게 동거한 나는 모르다니. 물론 놈은 본능에 새겨진 대로 아는 거고, 나는 놈처럼 마법생물이 아니니 모르는 거지만.

어쨌거나 확실한 건 마스터는, 내가 그의 정체를 알게되는 걸 결코 바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놈이 눈치 없이 떠들어대서 내게 단서를 던져주니까 저렇게 정색하며 경고하는 거고.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기에 그리 꼭꼭 숨겨둬? 배알이 뒤틀렸다.

그런데, 가만. 나는 불현듯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왜 마스터는 내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드는 걸까.

사실 내가 아닌 마탑의 다른 이들- 시온, 이를테면 오랜 세월 마스터와 함께해온 엘리야조차도 마스터에 대해서 아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야는 함께해온 수백 년이란 까마득한 세월이 무색하게끔, 마스터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씁쓸하지만 그 당연한 듯한 무지가, 그들 간의 거리를 의미하기에 엘리야는 그간 쌓여왔을 감정적인 결속을 배제하고 마스터를 배신할 수 있었으리라.

마탑의 주인이 마스터란 사실은 명백하지만 마스터가 땅에서 솟았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그 출신에 대해서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마탑의 기록에도 마스터가 어떤 존재인지는 적혀있지 않았고 말이다.

나는 마스터가 왜 정체를 숨기고, 마법생물들과 유사한 제 본질을 따르지 않고 마탑을 세워 지배자 행세를 했는지는 모른다. 단체를 형성해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떨치는 건 차라리 인간다운 일이었다.

물론 그런 일을 한 이유가 있겠지. 인세의 허명을 좇는다거나 지배욕이 투철하여 수고를 감수할 만한 이가 아니니까. 그런데 그게 어떤 이유건 모든 것을 잃은 현재, 마스터가 내게 말해주지 않을 이유도 딱히 없잖은가. 더 잃을 것도 없는데.

난 새삼 마스터의 목적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그토록 건조하고, 메마르고, 사람 같지 않게 감정이 결여된 듯한 그이지만, 마스터는 어떤 면에서는 무섭도록 확고했다. 흔들리지 않는 심지를 가진 이가,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일까. 어떤 일면에서는 유리조각처럼 첨예한 그 무언가- 이성일 수도, 감정일 수도, 신념일 수도 있는 그것이, 그를 움직이는 건 아닐까.

이 모든 의혹을 접어두고서라도, 마스터가 내게 정체를 감추려는 건 내가 인간이라서도, 그에게 종속된 존재라서도 아니다. 나는 그게 일전에 엘로힘이 암시한 이야기와 관련되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내가 유성이라고, 그래서 바꿔놓을 수 있다고. 그런데 뭘?

혹시 내가……. 당신을 흔들 수 있는 걸까? 어쩌면, 대단히 치명적으로. 그래서 나를 죽이지도 못하고, 내게 정체를 밝힐 수도 없고, 그저 시험관 안의 미생물을 바라보듯 지켜보기만 하는 걸까. 어떤 식으로든 움직여,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길 다만 기다리면서.

내가 이 모든 가정을 추리하여 연결 짓고 뇌리에 펼쳐내기까지는, 별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상 초 단위의 짧은 침묵이었다. 마스터는 죽음을 선고하듯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흘려냈다.

“가라.”

[…네? 저어-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네가 더 이상 나에 대해 떠들지 않는다면.”

마스터는 싸늘하게 놈을 내쳤다. 그가 흔히 보이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단 기색이었다. 혹시 뜻밖에 순순히 나오는 괴물에게 마을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할까 봐 긴장했건만 그럴 생각까진 없는 모양이다. 내가 그런 짓은 꿈도 꾸지 말라고 질색을 하며 강조한 걸 조금이나마 귀담아들었거나.

마스터가 내보인 단절에 놈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왕을 뵈었는데……. 제가 실수한 걸 보, 보상할 수는.]

“나는 네게 바라는 것이 없다.”

마스터의 음성이 그리 크지 않고, 마법어로 의사를 전달하다 보니 주변은 꽤 조용했다. 그 때문에 여관 문 안쪽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하는 듯싶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수백 미터쯤 떨어진 저편에서 이쪽을 향해 서둘러 뛰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가쁜 숨소리. 숲지기였다. 그에게도 추궁할 것이 있었지. 나보다 훨씬 느릴 게 분명한 그이지만, 전력으로 뛰었다면 도착할 만한 시각이다.

숲지기가 어떤 뜻을 품고 있건, 난 그에게 눈앞의 괴물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했단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건 무척이나 수상해 보이는 일이니까. 결론적으로 난 숲지기가 시야에 들어올 무렵 어정쩡하게 쥐고 있던 검을 괴물 쪽으로 힘껏 휘둘렀다.

============================ 작품 후기 ============================

일단 난처하면 칼부터 휘두르는 공격성!

서로를 독촉하며 글쓰자고 성실연재모임도 결성했으니 아마 다음편도 조만간 올라오지 않을까요?

마음만은 일일연재..... 일일연재하면 석달이면 완결인데! 하다가도 일일연재를 해야 석달 완결이구나 하는 생각에 까마득하기도 하군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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