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8. 도주 =========================================================================
“나를 펠이라 불러라.”
그의 음성이 유리 위를 가로지르듯 매끄럽게 떨어졌다. 단조로운 투였다.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난 화들짝 몸을 떨며 마스터의 눈을 응시했다.
그가 음성을 발한 순간, 대기가 파동을 실어 날랐다. 실로 기이한 감각이었다. 운명의 실이 휘어 감는 양 연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락이 내게로 미쳐오는 듯했다.
불새 엘로힘이 암시했듯, 마스터는 이 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어떤 대단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내 얄팍한 마법적 지식에 따르면 이름은 곧 존재의 규명. 그래서 마스터는 누군가에게 이름조차 발설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곧 그의 정체와 직결되는 일이기에.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펠’이란 이름은 마스터와 무관하지 않았다. 막 지어낸 이름은 아니리라.
“…그게 마스터의 이름인가요?”
“그리 부르면 된다.”
마스터는 잘라 말했다. 물음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에게서 흔치 않은 말투라 난 눈을 미심쩍게 떴다.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그러나 캐묻는다고 대답할 자가 아니란 건 안다.
“펠.”
난 조심스럽게 혀를 굴려 그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마스터를 마스터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호칭해본 적이 없었기에, 퍽 낯설게 들렸다. 하지만 눈앞의 이 모습처럼 낯선 게 또 있으랴.
“성은 리로 하지요.”
성을 뭐로 할까요? 라고 묻는 대신 난 냉큼 정해버렸다. 내가 그의 소유라 하여, 성을 붙이는 걸 금지당했던 걸 뒤끝 있게 기억한 탓이었다. 이 정도는 내 맘대로 해도 되지 않겠어? 역시나 마스터는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타성적으로 마스터에게 슬슬 뭘 먹일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숲지기가 돌아왔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어쩐지 비릿한 냄새가 훅 풍겨와 난 얼굴을 찌푸렸다. 사냥을 해왔으니, 피비린내가 나는 건 자연스러운데 내겐 영 익숙지 않다. 안 먹어도 되니까 망정이지 방금 죽인 사냥감이라니…… 비위 상해서 어디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나.
숲지기가 내 표정을 보곤 뭐라 뭐라 투덜대었다. 기껏 사냥해왔더니 까탈을 떤다는 소리다. 차마 고기 손질을 돕겠단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아, 난 수고하셨다고 말한 뒤 모른 체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었다. 숲지기는 애초에 내게 기대 따위 하지 않았다는 듯 이것저것 도구를 챙겨나가더니 알아서 고기를 손질해서 꼬챙이에 꿰어왔다. 숙련된 솜씨다.
노릇노릇 고기 굽는 냄새가 풍기자 또다시 잠드는 듯했던 마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간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다. 그답지 않게 어쩐지 본능적인 느낌이라 난 피식 웃었다.
“어이, 꼬마야. 이제 몸은 좀 괜찮나?”
항상 찰랑찰랑하고 길게 내리뻗었던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흐트러져 있었다. 슬쩍 까치집이 인 머리로 오도카니 앉아있는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그 격한 기분은 나만 느낀 게 아닌지 숲지기가 귀여워 죽겠단 듯이 마스터를 응시했다. 조금 전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작고 사랑스러운 모습의 소년이 저를 죽이라고 말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하는 눈빛이었다.
기분이 좀 착잡해진다. 겉모습은 천사라지만, 마스터가 어떤 이인지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사람은 원래 외피에 속기 마련이니.
그런데 홀린 듯한 눈이며 이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짓이 심상치 않았다. 숲지기는 숫제 마스터의 머리라도 쓰다듬을 기세였다. 그랬다간 무슨 사태가 발생할지 예측하기 어려웠기에 난 급히 마스터를 감싸 안으며 둘러댔다.
“우리 펠이 낯가림이 좀 심해서요.”
“펠? 고 녀석 곱상하게도 생겼소. 나이 먹으면 여러 여자 울리겠구만.”
이미 저를 울리긴 했지요. 몹시 정확도 높은 추측에 숲에서 오래 살면 통찰력이라도 생기는 건지 의심이 든다. 숲지기는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겠는 듯 마스터를 힐끔거렸다. 의도치 않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왠지 모를 마성의 귀여움을 발산하는 이 작은 소년에게 숲지기는 친절한 웃음을 띠며 꼬치를 내밀었다.
“자 이거 먹어라.”
그리곤 대꾸 한마디 없이 받아서 오물오물 씹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나라였으면 버르장머리 없다고 한 소리 들었을 법하다. 난 비뚤어지려는 마음을 고치려고 노력해봤지만, 어쩐지 기분이 상했다.
여자에다가 솔직히, 외모에선 빠지지 않는 날 보고도 그리 감흥이 없는 눈치였는데. 아니, 내겐 형식적인 친절 외엔 보인 적이 없는 그 무덤덤한 사내가 이렇듯 호감을 드러내고 있다니. 나는 지금 이 모습의 마스터에게도 지고 있는 건가. 이 자괴감이란. 심지어 나도 입인데, 숲지기는 내게 꼬치 한 번 권하지 않고 있었다!
“먹고 슬슬 마을로 출발했으면 하는데, 안내해 주실 수 있으세요?”
난 짐짓 쌀쌀맞은 투로 물었다. 숲지기의 태도를 보자니 어쩌면 내가 여기서 내다 버리더라도 마스터는 잘 먹고 잘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뭐, 애가 잘 먹는 걸 보니 괜찮아 보이긴 하다만 뭘 그리 서두르시오. 아직 좀 쉬다 가는 게 나을 텐데.”
빨리 우리가 가길 바라는 거 아니었어? 아쉬움이 느껴지는 게 기가 막힌다.
“계속 폐를 끼치는 것도 그렇고, 저희가 일정이 촉박해서요.”
추적자가 언제 숲에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마냥 이대로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되기도 했다.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마스터가 어려진 모습을 그들도 보았으니, 현재의 우리는 붉은 로브의 여자 마법사와 아이라는 특징으로 한정 지어진다. 어서 모습을 바꾸고 세상 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마력이 뒤틀리긴 했지만, 그들은 시온이며 내가 상대할 수 없는 마법사다. 회복이 끝나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마스터를 제거하기 위해 우리를 쫓으리라.
“거참 알겠소.”
아쉬운 듯이 보이긴 했지만, 더 갑론을박할 것 없이 숲지기는 마을로 가는 데 순순히 동의했다.
몇 시간 후, 마스터와 나는 그간 사냥이나 채집을 통해 얻은 부산물을 팔 셈인 듯 커다란 짐을 싸서 짊어진 사내의 뒤를 따라 마을로 출발했다. 물론 마스터는 처음부터 내 등에 업힌 채였다.
숲지기의 걸음은 빨랐지만, 따라가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좀 느긋하다 싶게 걷는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업고도 곧잘 그를 따라가자 사내는 혀를 내둘렀다.
“거 아가씨가 힘도 좋네 그려. 이대로면 반나절이면 도착하겠소.”
아마 여유를 두고 하루 거리라고 말한 듯싶다. 마스터를 업고 다닌다고 해도, 체력적인 손실은 크지 않았지만, 여전히 말이 된 기분이 가시지 않아 난 꼭 마차나 다른 이동수단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건 기분의 문제다.
“다 왔소.”
나무가 드문드문해졌다뿐이지 여전히 숲이 이어지고 있어, 가시거리에 마을이라곤 보이지 않는데, 어느 순간 숲지기가 그리 말하자 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곧 부산한 인기척이 피부에 와 닿듯 느껴지기 시작했기에 납득할 수 있었다.
통나무로 된 문 주위로 나무로 된 담벼락이 이어지고 자연스레 자라난 나무 덩굴이며 거기서 뻗어난 잎사귀들이 숲의 일부인 양 마을을 감싸 안고 있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산적들이 산다는 산채와 비슷한 모양새가 아닌가 한다. 과연 나무 위에 올라서서 암만 살핀다 한들 찾아내지 못한 게 이해가 간다. 위장하듯 온통 나무 담벼락에 둘러싸인 한가운데 자리한 마을이라, 눈에 띄지 않을 만도 하다 싶었다.
혹시 숨어 사는 이들의 마을인가 싶었지만, 암구호따윈 필요하지 않은 듯 숲지기가 턱턱 두드리자마자 문이 열렸다. 경비를 서는 것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마을 청년이 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켄트, 당신이군요! 이런, 이쪽은……. 또 숲에 불시착한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까? 문제로군요.”
경계라기보단 호기심 섞인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게, 별달리 위협을 받지 않고 살아온 듯싶었다. 그러니까 아주 평범하고, 평화로운 산골 마을의 청년이다.
난 어쩐지 마스터를 힐끔거리게 되었다. 단언컨대 이토록 위협적인 인물을 맞이하게 된 건 이 마을이 생성된 이래로 처음이리라. 비록 당사자들이 전혀, 눈치채고 있지 못하다 할지라도. 무사히, 아무 일 없이 누구도 해치지 않고 이 마을을 떠나야겠단 의무감이 치밀었다.
“그래, 이번엔 다행히 무사한 손님들이지. 부상자도 없고 말이야.”
청년이 싹싹하게 말을 받았다.
“욕보셨습니다. 저 숲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지, 간혹 이동마법을 펼치던 마법사들이 빨려들곤 하거든요.”
“그 괴물이 가끔 별식을 맛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가 싶거든.”
“어떤 놈일지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긴 한데, 여기까지 안 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촌장님이 찾으시던데, 한 번 들리셔야겠습니다.”
숲지기는 혀를 차며 청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꽤 친근한 사이인 것처럼 보였는데, 그 와중에도 청년은 붉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내 얼굴이 궁금한 듯 이쪽을 자꾸 힐끔거렸다. 난 말 한마디 없이 무례하다시피 침묵을 고수했다. 마을 사람들과 가까이해서 이로울 건 없다. 물론, 내 쪽이 그들에게 해가 될 테지.
“물건을 구해서 떠나겠다고 하지 않았소? 여기 여관이 있으니 거기서 며칠 머무르면서 채비를 하는 게 좋겠소. 이리로 쭉 따라가면 될 거요. 나도 이따가 들릴 참이니 그때 봅시다.”
숲지기는 좀 더 대화를 이어갈 참인지 손을 내저으며 우리를 먼저 보냈다. 난 그때까지 줄곧 등에 업고 있었던 잠들었는지 의심이 되는 마스터를 내려놓을까 잠시 갈등했지만, 내 등에 푹 묻고 있던 얼굴이 드러나면 분명히 귀여운 아이라고 접근하는 이들이 있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 사람들에게 마스터가 아이다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리라곤 기대하기 어려우니까.
자폐증, 그래 그걸로 하자. 난 마스터에게 아이 흉내를 내게 하느니 그냥 그를 입 다물게 하는 게 현명하단 걸 알고 있었다. 아이답게 앙증맞은 말투로 말하거나 애교떠는 모습, 상상도 안 되고 소름이 다 돋는다. 난 굳게 결심한 채 길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비록 쫓기는 중이지만, 마탑에 들어선 이래로 임무가 아닌 다른 이유로 마을을 방문한 건 처음 있는 일이라 감회가 새롭다. 골목에서 고개를 빼고 이쪽을 관찰하는 아이들과 창문 밖으로 내다보는 호기심 어린 그 시선들. 아이를 등에 업은 붉은 로브의 마법사라니 얼마나 눈에 띌까. 다행히 이방인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거리를 두고 접근하지는 않았기에, 성가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여관에 다다를 무렵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보통의 차원이동자라면 이런 곳에 홀로 떨어져서, 아무것도 모른 체 잡일을 하면서 이 세계에 막막한 채로 하루하루 적응해나가지 않았을까. 그보다 운이 나빠서 그때 만난 괴물한테 꿀꺽 삼켜지는 걸로 명을 다했을 수도 있겠지. 그에 비하자면 난 처음부터 언어를 습득하고 고상하게도 마법을 배우면서, 6개월 동안 아무런 부족함 없이 지내었다.
그건 분명히 은혜라고 할 만한 게 아닐까. 그 때문에 몸이 괴롭지는 않았을지언정 평생 겪을 혼란을 다 겪고, 가슴이 찢기는 심란한 시간을 보냈을지라도. 어쨌든 마스터는 내 목숨을 구해주었고, ……확실히 책임져주었다. 그는 내 주인으로서 내 인생을 소유한 자로서 의무 그 이상을 다 한 것이다.
마스터에게 평생 종속당할 거란 생각에, 그의 부도덕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거부감에 줄곧 밀어내느라 애썼지만, 실상 난 어미 새가 먹여주는 먹이를 삼키는 양 늘 받기만 했다. 내가 원한 게 아니어도, 받았다는 그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마스터를 돕는 건…….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이리라. 더 고민할 것 없다. 그래, 어떤 결과를 낳더라도-
난 그래야 했다.
어느덧 명쾌하도록 정리가 되었다.
============================ 작품 후기 ============================
우왕! 100회를 연재했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그리고 이 소설 당초 150편선에서 완결짓기로 했었지만 150편은 개뿔 180편안에 완결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네, 그러합니다. 장편병은 불치병이라고 합니다. 후...
모쪼록 함께해주시기를....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