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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99화 (99/155)

00099  8. 도주  =========================================================================

“이 근처에 마을이 있나요? 이 근처엔 인적이라곤 통 보이질 않아서, 사실 이 오두막도 어떻게 발견했는지 모르겠어요. 다행이었죠.”

귀가 쫑긋해져서 조잘거리자 사내가 말을 받았다.

“큰 마을은 아닌데 하루 거리 정도에 마을 하나가 있긴 하지. 어차피 나도 들릴 일이 있으니, 아이가 낫는 대로 안내해주겠소.”

“고마워요.”

얼른 이 요구 많은 불청객을 집에서 치워버리고 싶어하는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난 그저 생긋 웃었다.

“그나저나 저 안쪽으로 들어가면, 놈의 서식지인데 용케 걸리지 않고 나오셨수?”

“놈이라고요?”

“이쪽 숲에는 이렇다 할 위험이 없긴 한데 그게 다 무시무시한 괴물 한 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탓이오. 제 서식처 관리 하나는 철저히 해서 다른 놈들이 발붙일 거리가 없지. 그놈만 피해 가면 위협이 될 만한 게 없어서 안전한 편이지만, 워낙 감이 좋은 녀석이라 누가 침범한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

난 얼마 전, 마스터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허둥지둥 도망갔던 괴물 한 마리를 떠올렸다. 놈의 거대한 덩치와 하얗게 번뜩이던 이빨도. 다리가 떨릴 만치 위협적인 모습이었으니, 필경 그 녀석을 말함이라.

“뭐, 오래 헤맨 거 같진 않으니 당시에 놈이 배가 불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진 않나요?”

“이 숲 바깥쪽엔 놈이 진저리치는 향내의 수목이 심어져 있으니 올 일 없을 거요. 나 이전에도 할아범 한 명이 이곳에 살고 있었지만,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소.”

“다행한 일이로군요.”

사내는 부랑자 같은 첫인상에 비해 사람 좋은 이였고, 그간 말을 나눌 사람이 없어 적적했는지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어쨌든 그는 내가 미숙한 마법사라 마법에 실패해서 이 숲에 떨어졌다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숲이 있는 곳에는 마력이 모여들기 마련인데, 특히 이곳은 생명력이 왕성한 탓에 대기가 혼란해져 간혹 있는 경우라 한다.

목적지에 대해서 비밀이라고 대충 얼버무린 난 그에게서 지도를 받아 이곳이 대강 어디쯤인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운이 좋은 건지 이런 숲 속에 변변한 지도가 있단 것도 놀라울 판인데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샤자한. 그 이름을 발견한 난 눈을 가늘게 떴다. 동명 이국은 아니겠지? 이리도 가까운 곳에……. 한 나라 건너지만, 중간에 낀 나라가 워낙 소국이라 지도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난 샤자한의 왕 아카일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렸다.

‘그대가 날 구했단 건 잊지 않고 있어.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는 그런 뜻이었으리라. 예의상으로 한 말이라기엔, 내가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염치가 있다면 모른 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고 느꼈으니까.

하지만 샤자한으로 가는 건 좀 더 생각해봐야 했다. 절로 눈길이 벽난로 앞에 누워있는 마스터에게로 향했다. 문제는 아이의 모습을 한 채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저분이었다. 평판이 좋을 리 없고, 세상에 아군보다 적군이 훨씬 많을 우리 마스터.

…당연한 거겠지만, 과거에 엮인 일도 있거니와 내키지 않은 계약을 이어가고 있기에 샤자한의 왕은 마탑을, 마탑의 수장인 그를 싫어한다. 어쩌면 증오할지도 모르고. 정체를 알게 된다면 도움을 주긴커녕 마탑으로 넘기려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저 작은 소년이 마스터라는 걸 사쟈한의 왕이 알 도리는 없다.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난 문득 그를 떠올렸다. 란델. 첫 임무를 맡아 샤자한을 방문했을 때 나와 동반한 건 그였다. 그라면 내가 샤자한의 왕과 나누었던 대화를 들었을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샤자한의 왕과 내가 친분이 있음은 기억할 것이다. 만약 이 근처로 우리가 이동해왔단 걸 알아채었다면 그가 샤자한을 떠올리지 못할 리 만무하다. 같은 논리로 유귄과도 합류할 수 없다고 하지 않은가.

여하간 행로를 결정해야 하는 건 마스터일 테니, 지금 내가 앞서서 수를 따져보는 건 의미 없다. 난 잠자코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나 의견을 묻기엔 마스터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금은 쉬게 놔두자.

그날 난 종일 마스터를 보살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었을 땐, 마스터의 곁에 누워있었으니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다. 친절을 베푼 이일망정, 샤자한에서도 사람 좋은 아주머니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숲지기 앞에서 긴장을 놓지도 어려웠거니와 마스터의 상태가 몹시도 걱정이 되었다.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그가 인간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굶고 피로해서 그런 것이라 먹고 쉬면 금방 나아질 줄 알았건만, 마스터의 열은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삔 다리가 순식간에 낫지 않듯 단시간에 낫기 어려운 피로가 열로 화한 듯싶었다. 평생 제 발로 걸어본 적 없는 사람이 갑자기 마라톤 행군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경우니.

잠으로 회복을 도모하듯 마스터는 한시도 눈을 뜨지 않고 곤히 누워있었다. 그 평생 열이 올라 괴로워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싶었으니, 색다른 고통이긴 할 것이다. 그러나 발에서 피가 나도록 일언반구도 없었던 마스터이니 이번에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그저 견뎌내고 있는 것이리라. 난 마스터의 이마에 배어난 땀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강인하다 못해, 얼음 절벽 같은 마스터의 이미지는 어느덧 스러지고, 이곳에는 내가 돌봐주어야 할 이만이 있었다. 내가 좋아한 건 분명히 강하고 냉정한 그일진대, 조금도 실망하거나 마음이 식지 않은 건 기묘한 일이었다. 성가시게 느껴지긴커녕 오히려 애틋하고 가슴이 아팠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필경 뜨겁지만, 새빨갛게 달궈지더라도 금세 식어버릴 쇠붙이 같은 것일 거라 생각했다. 물을 끼얹으면 그대로 열을 잃을,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델 듯이 뜨거운.

하지만 그렇지 않았나. 오랜 시간 곁에서 서서히 자라났던 마음이라 뿌리가 깊었던 걸까. 모양을 매만질 수도, 가늠할 수도 없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확신해선 안 되는 일임을, 아프게도 깨닫는다.

당신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좋아하고 있어. 난 누워있는 마스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입 모양만으로 되뇌었다. 숨결처럼 열기를 띤 속삭임이 내 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거머쥘 수 없기에, 끄집어낼 수조차 없이, 그렇게-

그래서 저항할 수 없는 것이리라.

***

마스터가 아픈 탓에, 마을로 떠나는 일정은 미뤄졌다. 숲지기는 혼자만 있던 집에 우리가 있는 걸 어색하게, 혹은 거북하게 느끼는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우릴 내쫓을 만큼 모진 사람은 못되었다. 그는 나름대로 먹을 것도 꼬박꼬박 챙겨주고, 잠자리도 돌봐주었으며 해열에 좋다는 약초를 구해왔다. 난 그가 받지 않더라도 보석을 놓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며칠 돌본 끝에 드디어 마스터의 열이 내렸다. 열이 내려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한시름 놓은 채 지켜보고 있었던 차였다.

부러 잠을 청했던 양 굳게 감겨 있었던 검은 눈이 대기에 드러난 순간, 난 목이 메었다. 심연이 고인 그 눈빛은 잔잔하고, 늪처럼 깊었다. 그러나 공허하리만치 감정이 결여되어있던 그 검은 눈이, 이전과 같지 않다고 느꼈다면 그건 내 심정변화 때문일까.

여전히 읽을 수 없는 눈이었으되, 무언가 달랐다. 난 그 다름을 꿰뚫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통찰하기도 전에, 헤아릴 수 없는 암흑이 껍질처럼 덮였다. 마스터는 밤이 내려앉은 눈으로 속삭였다.

“이제 출발해야겠다.”

적막한 음성이었다. 새벽빛이 깃들어 남색으로 푸르러진 공기 속에서, 그 음성이 미온을 담아 호흡으로 내게 스미는 듯했다. 그와 내 시선이 수평선처럼 이어졌다. 난 옆으로 누운 채 속삭였다.

“…아직 시간이 일러요.”

땅거미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들썩였다. 마스터는 조금 고개를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관찰하는 듯 사방을 찬찬히 훑었다.

“그자는.”

“숲지기요? 잠깐 나갔나 봐요. 식사 거리가 떨어져서 사냥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잠들어 있다가도 간간이 입안으로 흘려 넣어주는 고깃국물을 받아 마신 터였다. 어차피 고맙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그가 먹은 것이 숲지기의 식량을 축내었던 거라고 알려 주는 게 도리상 맞다 싶었다. 그러나 내가 더 입을 열기도 전에 마스터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자를 죽여야 한다.”

“그럴 순 없어요!”

너무 놀라, 난 자리를 박차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혹여 추적자들이 이 숲에서 흔적을 발견한다면, 그자에게 우리에 관하여 물을 것이다. 죽이는 편이 안전하다.”

“기억을 지우면 되잖아요.”

“마법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마법을 써선 안 되면 그 숲지기는 어떻게 죽이려고요? 설마 저한테 칼로 찌르거나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죠?”

비슷한 발상을 했는지 잠시 침묵이 깔린다. 왜 그래선 안 되느냐고 묻는 듯하다. 그 담담함, 소름 끼칠 만큼 차분한 낯에 기가 질린다. 깨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자길 돌봐줬던 사람을 살인멸구하라는 거라니, 참 지독하기도 하지. 내가 이 사람의 뭘 걱정했던 걸까.

어차피 마스터에 대한 내 기대치는 바닥이라서 새삼 떨어질 정도 없다. 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숲지기를 제거했다고 치고, 어차피 곧 마을로 갈 건데, 마주치게 될 마을 사람들은 어찌하고요? 그 사람들도 다 죽여요? 마법 없이 그건 불가능하다고요.”

참, 나도 사람 죽인다는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 섬뜩한 건 있었다. 마스터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런 건 아니다. 가능하긴 하지. 마법을 배제하고도 내 신체적 능력은 웬만한 전사를 상회하는 수준이니까.

“어째서 마을로 가야 하지.”

“마스터, 마을로 가지 않으면 어디서 식량을 구하고 어디서 잠을 자요. 야영할 만한 장비도 없는 데다가 전 사냥도 못 하고 나무 열매나 따오는 수밖에 없는데, 그런 생활은 현재로선 마스터가 견디질 못해요. 그래서 병이 나신 거잖아요. 일단 마을에 가긴 가야 해요. 계속 걸어 다니실 순 없으니 마차라도 구해야 하고.”

“이동은 이제까지처럼 하는 걸로 족하다.”

내내 내게 업혀 다니겠단 소리야? 당연한 듯이 내 고생을 전제로 하는 말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아니, 그건 뭐 그렇다 쳐.

“담요나 침낭이나, 요리할 만한 냄비, 식량 이런 것들을 구해와야죠. 어차피 마을에는 가야 해요. 이 로브 차림으로 계속 돌아다닐 순 없으니, 옷도 구해야겠고.”

이런 화려한 붉은 로브를 입고 나돌아다니면, 금방 소문이 나겠지? 어서 날 잡아가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스터는 납득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난 내친김에 한 번 언질 하기로 했던 문제를 끄집어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스터와 제 관계를 새로 정립해야겠어요. 제가 숲지기한텐 마스터와 제가 남매 사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마스터가 제 동생인 거죠.”

별달리 불만은 없는 듯 변화 없는 표정이다. 난 조금 긴장한 채로 말했다.

“그게 설명하기 편하니까, 앞으로도 쭉 그렇게 말하고 다니려고요. 남매 사이니까 사람들 앞에선 마스터에게 말을 놓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계속 마스터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호칭을 정해주셨으면 하는데.”

“…….”

“제가 부를 이름…을 말씀해달라는 뜻이에요.”

침이 꿀꺽 넘어갔다. 왜 이리 가슴이 떨리는 걸까. 물어보면 안 될 걸 물어본 것도 아닌데. 아니, 애초에 이름도 말해주지 않는 건 너무하잖아. 내 생을 저당 잡았으면서 정작 제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마스터라고 부르라니.

실은 궁금했다. 그간 차마 묻지 못했을 뿐, 그의 정체를 알고 싶은 만큼이나 이름만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은 항상 가득했다. 몹시도 숨을 죽이며 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마스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작품 후기 ============================

절단신공을 연마중입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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