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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98화 (98/155)

00098  8. 도주  =========================================================================

“업히세요.”

마스터는 순순히 내 등위에 몸을 올렸다. 하룻밤 새 다친 발이 나을 리 없으니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편이 이동하는데 빠르기도 빨랐으니까. 물론, 필요성을 떠나서 기분이 영 그러긴 하다.

먹을 것도 구해오지, 업어 나르지. 이쯤 되면 시녀도 아니고 밭 갈고 달구지 끄는 소가 된 것 같다.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나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한테 목숨을 내맡겨야 한다니.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걸 알면서도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은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도리어……. 모든 걸 한시름 뒤로 내려놓은 듯한 이 고요스러운 평온이 이제까지의 혼란과 충격을 잊게 했다.

아니, 진실로 잊은 것은 아닐 터이다. 허나 지금은……. 어제 나타난 괴물이 환상이었다는 듯 한가로운 숲길을 미온의 체열을 느끼며 지나고 있자니 모든 게 끝난 것만 같다. 언제고 터질지 모르는 지뢰를 안고 가는 이 시간이 유보일지라도 추적자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아직 다음 장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차피 위협이 될 만한 추적자라면 시온이나 아모스 중 몇 명. 그러나 시온은 지금 누구도 온전한 상태가 아닐 것이다. 내가 봉인과정 중에 끼어들었으니, 그 여파로 마력이 뒤틀렸으리라. 회복하려는 덴 시간이 걸릴 테고 그때까지 마스터를 어떻게 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가 힘을 회복하고… 적어도 스스로 안위를 지키도록. 하지만 마스터가 힘을 되찾는다면 그땐.

난 입술을 깨물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아득한 불길함. 먹구름이 밀려오는 양 눈앞이 짙어진다. 예지하듯 미래의 풍경을 떠올렸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좋은 결과를 초래하리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았다.

난 내딛는 발로 애꿎은 수풀을 세게 짓눌렀다.

…어쩌면 이대로 마스터를 어린아이 상태로 내버려두는 게 최선일 수 있겠지. 그가 힘을 찾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모두를 위해서.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그를 떠날 수 없잖아. 평생 마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이대로 도망치면서 살 수는 없는데, 그를 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전자가 필요라면 후자는 불가피함이다. 그리고 난 항상 불가피한 쪽을 택해왔다. 왜냐하면 그게 진정코 내가 원하는 일이라고 믿었으므로, 그리하여 몸이 복종하듯 거기에 따랐으니까. 그리고 그건 실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등에 실린 여린 육신의 존재를 생생히 실감했다. 내 목을 빙 둘러 감은 팔은 가냘팠고, 손끝에선 악력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힘없이 거의 숨소리도 내지 않으며, 마스터는 내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채 몹시 지친 그는 지금 드높은 탑처럼 고고하게 내려다보던 절대자가 아니라 약자에 다름 아니었다.

냉정해져야 한다고 수없이 되뇔망정 난 모질게 그를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의 나약함에 이토록 가슴이 조여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마스터는 정말로 교활하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해서, 이런 상태가 아니었다고 해서…… 나는 그를 버릴 수 있었을까? 단 한 번도 제대로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면서.

거기에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난, 그릇된 비난을 고이 접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세 번의 밤이 더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숲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처음에는 미열이라 눈치채지 못했다. 아프다고 엉엉 울어서 제가 아프단 걸 알리는 진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 알고 있었는데. 어쨌든 마스터가 감기에 걸린다거나 하는 건, 내게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숲이 듬성듬성해질 때쯤, 업고 있는 몸이 확연히 뜨거워지고, 잔기침 소리가 그에게서 새어나왔을 때, 난 마스터를 내려놓고 얼른 이마를 짚어보았다.

“마스터, 열이 있는데요.”

“육신이 쇠약해진 터, 이상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마스터는 의사라도 된 양 평온하게 제 상태를 설명했다. 쌀쌀한 숲을 내내 이동하며 야영하고, 먹은 거라곤 개울물과 나무 열매밖에 없으니 병이 날만도 하다. 하지만 안쓰러움은 둘째 치고 이해가 가지 않는 점도 있었다.

“…내버려두면 죽을 수도 있나요? 마스터는 사람도 아니라면서요.”

“인간의 몸으로 구현되었으니, 가능하다. 죽음을 맞이하면 형을 잃는다.”

그건 어쨌든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화장실은 안 가도 되면서, 발은 부르트고 열도 나다니 무슨 몸이 이래.

“제대로 쉴 곳을 한 번 찾아보죠.”

한숨과 함께 내뱉은 난 다시 그를 들쳐업고 걸음을 서두르기로 했다. 형을 잃는다면 전에 본 그 괴상한 검은 덩어리로 변하게 되는 걸까. 의사소통도 불가능한 그런 걸 마스터 취급하는 건 몹시도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마스터가 사람이 아니란 걸 이 이상 실감하게 되기는 싫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쉴 곳을 찾는 건, 생각보다 요원했다. 숲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가장자리로 빠져나온다고 해서 갑자기 나무가 사라지고 평원이 펼쳐지는 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나무 위로 기어올라 살펴봤지만, 인가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인근에는 마을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숲 바깥쪽엔 거목이 별로 없어서 높이 상 먼 시야까지 잡히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열이 오른 마스터가 한기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자야한단 것도 문제였거니와, 음식도 문제였다. 나야 그렇다 치고 마스터를 더 과일로 연명하게 할 수는 없으니, 사냥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난 곧 생각을 바꾸었다. 사냥이라니. 대개의 여고생에게 그러하듯 나 역시도 징그러운 건 질색이다. 그러니까 짐승을 잡아서 야만인처럼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굽는다던가 하는 행위는, 단 한 번 해본 적도 떠올려본 적도 없는 종류였다. 도시에서 자라나 정육점에 고이 손질된 고기만 먹어온 내게 살아있는 동물을 잡아 굽는 건 몸서리가 쳐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이러쿵저러쿵 속으로 불만 가져도 마스터를 위해 사냥할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는 걸 보니 내 애정도 실은 얄팍했던 걸까. 하지만 나는 마스터에 한해서 동정심을 품는다거나 보살핀다는 것에 무척이나 익숙지 않았고, 안쓰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무슨 일이든 감수해야 할 것처럼 아주 크게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사냥에 대한 자연스러운 거리낌을 쳐낼 만한 동기가 빈약했다.

마스터는 내게 초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그 이미지가 현재 상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쉽사리 벗겨지지는 않는 것이다.

정 아니면, 잠깐 마법을 쓰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고민 속에서 무작정 숲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던 그 날 저녁, 난 드디어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옆으로 퍼진 나무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나무라고 할 만한 모양새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게 되었다. 지붕에 무성한 나뭇잎이 덮여 있고, 통나무가 쌓인 벽면에 담쟁이덩굴이 기어 올라가 운치있다기보단 지저분한 인상을 주었지만, 어쨌든 그건 오두막이었다. 이런 외딴 장소에- 오두막이라니?

거기에 사람이 있든 없든, 발견한 것만으로 다행이기에 난 재빨리 다가붙어 문을 두드렸다. 손힘을 조절하지 못해 거의 쾅쾅 소리가 나며 문이 뒤흔들렸다.

“저- 계세요!”

빈집인 거 같으면 그냥 들어갈 기세로 목청껏 묻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누구쇼?”

곧이어 문이 조금 열리고, 수염 숭숭 난 한 사내가 빼꼼히 머리를 뺐다.

“이런 숲 속에 웬 젊은 처자가 다. 아이까지 데리고? 어디서 온 거지.”

경계심 어린 눈이 천천히 나와 등에 업힌 마스터를 아래위로 훑었다. 내 마법 로브는 숲을 헤맸다고 보기엔 때 묻지 않아 좀 흐트러져 있을망정 매무새가 깔끔했고, 어쨌거나 사람이 아닌-옷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를-마스터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난 얕보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즉, 위협적인 존재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를 달고 있다. 눈에 힘을 뺀 사내가 한층 더 낮게 깐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서 왔냐고.”

무어라 답해야 할지… 어린아이와 숲 속에 뚝 떨어질 만한 사유를 고민해보던 난 마땅치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마을로 가야 하고, 그러려면 이자에게 마을로 가는 길을 물어야 한다. 그래서 난,

“말씀드리기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대충 뭉뚱그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런 내 말을 알아서 해석해 주었다.

“마법사 신가 본데, 장거리 이동 마법에 실수한 건 아니고? 뭐, 가끔 일어나는 일이지.”

난 하하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그가 열어주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그래도 청소가 되어있는지 외관과는 다르게 바닥이 깔끔했고, 귀퉁이에 마련된 벽난로에선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이에게 열이 있다고 하자, 그가 혀를 차며 벽난로 앞에 담요를 깔아주었다.

마스터는 가늘게 눈을 뜬 채, 내 뜻대로 순순히 바닥에 드러누웠다. 등에 묻고 있어 가려졌던 이목구비가 드러나자, 사내가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마스터는 남다르게 예쁜 외형을 가지고 있었고, 창백하디 흰 피부는 햇빛을 한 번도 본적 없는 것 같아, 귀한 집 아이로 느껴질 법했다.

“혹시 먹을 건 없나요?”

“공짜로?”

난 급히 품을 뒤적였다. 만약을 대비해 챙겨 놓은 비상금-소량의 금화와 보석-을 꺼낼 요량으로. 무일푼이 아니라는 게 약간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지갑을 꺼내기도 전에 사내가 손사래를 쳤다.

“됐수, 농담한 거라오. 어차피 이런 곳에선 돈이 있어봐야 쓸데도 없어.”

그러더니 어디선가 빵과 잘 익은 감자를 꺼내왔다. 내가 조심스레 마실 건 없느냐고 묻자, ‘아주 부려 먹으려고 드는구먼’이라며 투덜대면서도 사내는 물을 따라서 내게 건네주었다. 물론 나는 별달리 음식물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 모든 건 마스터의 몫으로 돌아갔다.

일단 뭐라도 먹게 해야 했기에, 기력이 없는 듯한 마스터를 일으켜 세우는 내게 사내가 물어왔다.

“보아하니 귀한 집 자녀분 같은데, 마법사 아가씨와 저 아인 무슨 사이요?”

“…동생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편이, 앞으로도 함께하기 자연스럽겠지. 잔을 입에 대어주자 마스터는 꼴깍꼴깍 목구멍으로 물을 넘겼다. 난 거칠거칠한 빵을 잠깐 내려다보곤 물에 담가서 씹기 편하게 불린 다음 마스터에게 먹여주었다.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친동생도 돌본 적 없었건만, 며칠 사이 나도 보모 노릇에 꽤 익숙해졌다.

“여동생? 남동생?”

“남동생이오.”

“벙어리인가? 왜 이리 말이 없소.”

“원래 말이 별로 없는 아인데 지금 아파서 그래요.”

누군가가 마스터에게 말을 시켜 그 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말하는 걸 보게 하느니 차라리 자폐증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성싶다. 난 마스터에게 한 번쯤 이점에 대해서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이 머리색은 비슷한데 별로 닮지는 않았소만. 양친 중 한 분이 다른가?”

미심쩍은 눈으로 구태여 꼬집어 말하는 사내는, 내가 마스터와 남매라는 게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마스터와 여기까지 와서 비교를 당해야 한다니. 난 속으로 이를 으득 갈며, 산뜻하게 웃었다.

“사촌인데 함께 자랐어요.”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내가 민감한 탓이겠지? 질문을 피하기 위해선 질문을 던지는 게 정답이라, 난 방어적으로 물었다.

“혼자 사시나요? 뭐 하는 분이신데 이런 곳에 사세요?”

“난 숲지기인데, 뭐 따로 봉급 받은 건 없고 숲에서 숙식하는 걸 허가받는 정도랄까. 여기에도 영주는 있으니. 때로는 이렇게 숲에서 조난당한 사람을 도와주거나 마을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지.”

============================ 작품 후기 ============================

태삼꽃 외전 약 4페이지가 남았습니다 이걸 써야 책이 나오는데 안써져서 끙끙....

검달이 리디북스랑 네이버북스에도 들어갔는데 제가 원고 넘긴 출판사에서 유료연재로 넣는 거고 형식상 이북과 유사하지만 이북은 아닙니다 이북은 완결후 따로 나와요.

요새 날이 부쩍 추워졌는데 건강에 유의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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