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8. 도주 =========================================================================
“하등한 생물이라 알아볼 수 있을까 했건만 본능은 살아있구나.”
고요한 음성이었다. 공기를 미끄러져 내리는 소리에 왠지 등골이 오싹하다. 그는 그저 왕처럼 서 있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양 무표정한 낯. 그 희고 고운 얼굴에서 심연의 눈동자만이 생생히 호흡을 내쉬었다.
생명력이라기보단 존재감이었다. 산악처럼 위압스럽고 사신처럼 목줄을 죄는 죽음의 느낌. 이런 숲 속에 홀로 던져진 채, 내 반절밖에 되지 않는 아이의 몸을 하고 있더라도-
마스터는 마스터였다.
그가 어떤 불길하고 끔찍한 정체를 숨기고 있을지, 나로서는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괴물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다니. 삽시간에 회의와 불안감이 몰아쳤다. 내가 그를 돕는 게, 과연 잘한 짓일까.
“괘, 괜찮으세요?”
못내 다가가 그에게 다가가 섰다. 내미는 손길이 내가 보기에도 확연히 느릿했다. 희미한 달빛을 머금은 그의 눈 속에서 난 가까스로 질겁한 티를 내지 않는, 무척이나 어색한 얼굴이었다.
“아… 저,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결과로만 보자면, 괴물이 약자 쪽인 것 같았지만 난 우선 그의 옷차림을 고쳐주며 자리에 앉힌 후 말을 건넸다.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으니 다칠 리가 만무한데, 그를 섬뜩하게 여기면서도 걱정하는 건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한 가지였다.
“잠깐 갔다 온 새에 저런 게 다 출몰하고, 빨리 이 숲을 벗어나야지 안 되겠어요.”
긴장감을 벗어내려 조잘거리던 난 불현듯 말을 멈추었다. 지극히 가까이에서, 날 응시하는 마스터의 눈빛이 신경을 얽어매었다. 기이한 것을 보듯, 이채를 띤 시선. 이해하지 못할, 혹은 영문 모를 무언가를 관찰하는 양 나를 담고 있었다. 어째서? 그가 어떤 기색을 띤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건 극히 드문 일이라, 일순 넋을 빼앗겼다.
“앞으로 더한 괴물이 나올 수도 있겠지.”
그가 눈을 맞춘 채 여상하게 대꾸했을 때야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홀린 듯한 기분이다. 이건 자길 두고 혼자 돌아다니지 말란 소리일까?
“어쩔 수 없었잖아요. 계속 굶으실 순 없는 거니까… 아 맞다, 식량!”
화들짝 놀라서 아까 열매를 쏟아놓은 자리로 달려갔다. 수풀 위에 떨어뜨려서인지 다행히 한 자리에 잘들 모여 있었다. 표면이 단단하다 보니 먹는 데 지장은 없겠는데 구해온 물을 다 쏟아버려서… 과즙으로 해갈이 될지 모르겠다. 난 주워든 열매를 잘 갈무리해서 품에 안은 다음 마스터에게 가져갔다.
“나무 열매를 좀 따왔는데 먹어도 될지 모르겠어요. 한 번 보시겠어요? 부족하면 더 구해올게요.”
마스터의 손이 열매 하나를 짚었다. 찬찬히, 주의 깊게 살핀 뒤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마 반으로 가르려고 했던 모양인데… 열 살배기의 손힘으로 그게 될 리가 있나. 난 그의 손아귀에서 열매를 빼앗아 들고 친절하게 반으로 갈라서 쥐여주었다.
쩍 소리를 내며 두 쪽 난 열매를 가늠하듯 살피던 마스터가 이윽고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너무도 서툴고 어색하게, 과육을 베어 물고 씹었다. 마치, 처음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처럼.
난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를 먹는 모습이 이토록 이상하게 느껴질 까닭은 무에 있을까. 곰곰이 짚어보던 난 이윽고 마스터가 뭘 먹는 걸 본 적이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처음이었다. 마스터가 내 앞에서 음식을 섭취하는 건.
그건 회색 등가죽을 가지고 웅크리고 있어 천생 바위인 줄 알았던 생물이 아침볕에 몸을 뒤트는 듯했다.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걸 목도한 피그말리온이 실로 이러한 심정이었을까. 오물거리며 내가 구해온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기적처럼 낯설었다. 서서히 가슴에 뿌듯함이 들어찬다.
“입맛에 맞으세요?”
조금쯤 기대에 부풀어 묻자, 마스터가 가만히 고개를 까닥였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열매 하나가 금세 그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난 재빠르게 하나를 더 쪼개어 주었다. 세 개째를 먹고 나자 배가 찼는지 더 먹겠느냐는 물음에 마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한꺼번에 많이 먹는 건 좋지 않다.”
평생 거의, 혹은 전혀 사용해본 적 없는 위장일 터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열매를 잘 모아서 옆쪽에다가 두었다. 내일 아침에 먹으면 되겠지, 뭐.
“목마르거나 배가 고프면 말씀해 주세요.”
난 충실한 시녀처럼 물을 쏟아버린 걸 염두에 두고 속삭였다. 마스터는 날 잠시 들여다보더니 그루터기에 더욱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제 배도 부르고 몸은 피곤하니 쉬어야겠단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만. 이대로 잔다는 말이야? 그러기엔 내가 너무 추운데. 로브는 하나였고, 마스터가 덮고 있었다. 그야 따뜻하겠지만, 숲을 휘젓고 다닌 데다가 괴물을 목격한 탓에 잔뜩 달아올랐던 열이 식어버린 난 으슬으슬 추워진 터였다.
그가 준 거긴 하지만, 내 로브잖아? 그가 덮게끔 양보하고 있자니 정말로 시녀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랬다. 그렇다고 빼앗기엔, 어린아이를 추위에 덜덜 떨면서 자게 내버려두고 난 등 따신 채 잠드는 그런 악덕 계모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지.
“마스터, 잠깐만요.”
난 로브를 들춰내고 그루터기 우묵한 부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마스터를 옆으로 살살 밀었다. 눈을 뜨고 쳐다보는 동작이 얘가 왜 이러나 의문을 품은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마스터는 내가 미는 손길대로 순순히 옆으로 밀려났다.
난 곧바로 마스터 곁에 주저앉아 등을 뒤로 바짝 붙이고 로브를 덮었다. 등 닿는 감촉이 딱딱하긴 하되 옷자락이 덮이자 몸에 온기가 돌았다. 확연히 따뜻하고 안온하다. 이편이 바로 곁에 꼭 붙어있으니까 더 안전하기도 하고.
마스터가 원래의 모습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알게 뭐야. 지금은 그냥 어린애인걸. 그리고 춥다. 마스터 역시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듯했다. 둘이 좁은 그루터기 아래에 꼭 붙어있자니 오히려 더 따뜻하고 좋았다.
새삼 내가 편의적인 인간이라는 걸 실감하며 난 눈을 내리감았다. 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가 이리 꼭 붙어서 자려니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아니어서, 빨리 잠들어버리자 싶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몹시도 피곤했던 탓인지, 깜빡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의식이 끊겼다. 아득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암전…….
***
찰나같이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서늘한 바람과 맑은 새소리가 정신을 일깨운다. 어둠은 씻은 듯이 가신 숲의 아침은 유리종 소리가 울려 퍼질 듯 청명하다. 짙은 녹빛이 깔린 숲엔 새벽의 푸릇함이 아직 남아 휘돌고 있었다. 그 녹청의 평온한 숨결을 난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 심신이 정화되는 상쾌함이 온몸을 찌르르 울린다.
“…….”
하품이 얕은 신음과 함께 거의 소리 없이 입에서 떨쳐 흘렀다. 휘늘어진 몸에 힘이 들어가며 훅 숨을 불어넣듯 감각이 살아난다. 이 고요한 야생 속에서 홀로 온혈이 도는 생물인 양 이질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쩐지 어깨가 묵직한걸. 슥 옆을 돌아보니, 내 어깨에 기대고 있는 작고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마스터? 그 미세한 동작에 오르골의 태엽을 돌린 양 마스터가 부스스 머리를 들며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가 섬세한 눈꺼풀 틈새로 또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딱 눈을 비비면 어울릴 듯이, 피로를 떨치지 못해 졸린 기색이다.
“더 주무시겠어요?”
…솔직히 숨 막히게 귀여웠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졸음이 싹 달아날 지경이다. 슬며시 묻자 마스터는 부정하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부산하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가라앉는다. 곧고 선명한 직모에 올이 가늘지 않아 엉킬 염려는 없어 보였다.
그가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문득 의심이 찾아들었다. 물어보기 민망하지만, 그래도 이건 알아야겠는데.
“마스터 혹시 볼일도 보셔야…”
하나요? 반쯤은 설마 하는 불안감에 차올라 던진 질문이었다. 소변을 본 적도 없을 듯한 마스터인데 내가 그 방법을 알려줘야 하는 건……. 맙소사 다.
“아니, 섭식은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서일 뿐.”
내 심중을 간파했는지 단칼에 잘라 말한 마스터는 확고하게 덧붙였다.
“인간의 모습을 입고 있다 하여 내가 실제로 인간이 되는 건 아니니.”
날카로운 전류가 일순 나를 관통하는 듯했다.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의 입으로 이렇듯 확실해지니 그저 말문이 막힌다.
……짐작하고, 아니 거의 확신하고 있었는데도, 직접 듣는 게 이리 충격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인정머리 없고 잔혹한 마법사인 걸 알면서도 좋아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상대를 좋아하는 건, 무어라 설명할 길 없이 막막한 일이다. 내가 좋아한다고 믿는 게, 그 감정의 향방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지 그조차도 모를,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는 느낌. 내가 아주 멀리, 잘못된 길로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만 들뿐.
“그럼 마스터는 뭔데요.”
쫓기듯이 조급하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인간이 아니면 무엇인데요?”
이미 볼 장 다 보았다. 그러나 기분만은 그러지 못했다. 귀신이나 악마라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느냐마는, 난 섬뜩하게 마스터를 견주어 보았다. 소스라치게 만들, 무언가가 그에게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알 필요 없다.”
“저는 알고 싶어요.”
나는 음절 하나하나 힘주어 발언했다.
“저한테 숨기실 필요 없잖아요? 저는 이제 마스터와 한 배를 탔고, 같이 쫓기는 처지죠.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저도 마스터에 대해서 알 건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토록 집요하게 캐물어 본 적이 없는 듯싶다. 어느 정도 모르는 체하며 거리를 두려는 심정이 이전까지 내게 적잖이 자리했던 탓이다. 더 많은 비밀을 알게 되면,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할 늪을 대하듯.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었지.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는 지금 내겐 알고 싶은, 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당신을 돕길 원한다면, 내게 진실을 말해달라고 추궁하고 어르고 싶은 충동도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럴 수 없게 하는 건- 내가 하나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스터는 본인이 위기에 처했든 어쨌든, 내게 결코 굽히지 않을 자였다. 내가 그에게 결별을 고하면, 그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것 같았다.
떠나보낼 것이다. 혹은 붙잡을 것이다. 실은 확신할 수 없는 반반의 확률일지언정 난 그걸 시험할 수 없었다. 그를 버릴 수 없는 건 애초부터 나였기에.
침묵 속에서 날 응시하던 마스터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내가 무엇이든 네 앞에 있는 것이 바로 나다.”
“뜬구름 잡는 소리 마시고, 도대체 왜 숨기시는데요?”
뻔한 답에 열이 솟구쳐 답답하다는 듯이 윽박지르자 마스터의 입이 굳게 닫혔다. 결국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머리를 쥐어박아서라도 입을 열고 싶은데, 난 애써 충동을 내리누르며 이갈림 섞어 중얼거렸다.
“그놈의 신비주의.”
그래, 난 몹시 삐쳤다. 그래서 마스터가 두리번거리며 찾던 게 어제 먹다 남은 거라는 걸 눈치채고도 팔짱을 끼며 모른 척했다. 물론 모른 척한 게 무색하도록 마스터는 안테나를 세운 양 빨리도 열매를 찾아냈지만 말이다. 돌 위에 놓고 열매를 쪼개어 먹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다람쥐가 은신처에 숨겨둔 도토리를 찾아내서 갉아먹는 양 귀여웠기에 또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맙소사, 정말 난 구제불능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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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