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8. 도주 =========================================================================
미온을 품은 그 작은 손이 날 가로막고 있는 걸 보자니 이상하게 안타까웠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안쓰러움뿐.
“그렇다고 이대로 두다가 상처가 덧나면…….”
“현재 내 몸은 평범한 인간 아이의 것과 같다. 이 정도 상처가 덧날 성싶은가.”
그야 아이는 원래 상처가 금방 낫긴 하지. 제게 일어난 일임에도 남의 일을 말하는 듯이 또박또박 이르는 게 그야말로 마스터답다. 그래서 조금 서운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된 이상 내게 조금 의존해도 좋을 텐데, 고독스러울 만치 꼿꼿하고 오롯이 혼자다. 나길 홀로 태어난 양 그토록 냉정하고 이성적이다. 그 독존적인 이질성에 매혹된 나지만, 그 때문에 꼭 밀어내는 듯하여, 마음이 괜스레 아팠다.
“뭐라도 처치를 해야겠어요.”
그대로 다시 신발을 신기면 아플 테니까. 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솜털이 숭숭 난 넓적한 이파리를 가진 나무를 발견했다. 벌레가 좀먹지 않은 푸릇한 잎사귀가 혹시 독을 품었을까 싶어 손끝으로 쓸어본 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곧장 뜯어냈다. 그리고 마스터의 자그마한 발을 들어 세심하게 감쌌다.
“아프거나 이상이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 괜히 골칫거리 늘리지 말고.”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해버린 뒤 마지막으로 다시 신발을 신기고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열 살 정도의 남자아이라 인형이라고 하기엔 크지만, 내가 악력이 강해져서 그런지 쑥 딸려오는 몸에서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길고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물결처럼 허공에서 굽이쳤다. 가까이서 보건대 소녀처럼 곱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다. 새까맣고 선명한 눈으로 빤히 나를 들여다볼 때면 귀엽기도 하지만, 좀 더 깊숙이 그 눈빛이 담고 있는 자욱한 어둠을 읽어내자 그러한 마음도 가셨다. 이 어둑한 숲 속에서 그와 함께하는 건 어쩐지 저주 인형과 맞대면하고 있는 느낌이다.
난 으스스해지는 기분을 추스르며 애써 등을 돌렸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그 자리에 앉으며 마스터를 향해 뒤로 팔을 벌렸다.
“자.”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을 게 뻔했다. 난 쑥스러운 기분을 억누르며 쏘아내듯 말했다.
“업히시라고요. 이대로는 못 걸을 거 아니에요.”
그제야 그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자그마한 손이 내 어깨 위에 올라오더니 이내 꼬물거리며 느릿하게 목을 끌어안았다. 그 사소한 움직임에서 묻어난 사랑스러움이 일순 명치를 찔러든다. 저항할 수 없는 기습이었다.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속에서 훅 열기가 올라오며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맙소사, 나 왜…….
정말 이상한 취향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등허리에 실리는 무게를 느끼며 입술을 질끈 깨문 난 몸을 일으켰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혹여 심장 소리가 새어나갈까 마스터를 받친 손에 힘을 주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내게서 전해질지 모르는 진동이 험한 길을 걷고 있는 탓으로 여겨지길 기도하면서.
그 와중에 잠깐 서운했던 마음은 어느새 스르르 풀려 있었다.
***
“많이 왔으니 오늘은 이만 쉬어가지요.”
보름달이 휘영청 하늘을 밝혀올 무렵, 완전히 이슥한 밤이 되어서야 난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리 튼튼한 몸이라지만 열 살 아이를 업고 계속 걷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슬슬 어깨가 뻐근해져 오는 듯싶었다.
업힌 채 그대로 잠들어버린 건 아닌가 싶었는데, 마스터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내 등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순순히 몸을 내맡기고 있던 건 아닌듯하다. 그건 날 믿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몸에 밴 경계심 탓일까.
……비관적인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믿음이란 자라나는 것. 그에게 여태껏 믿음을 줄 만한 행동은 하지 못한 건 나였다. 항상 도망칠 궁리를 하거나 맞섰을 뿐. 그러니 그가 전적으로 내게 의존하지 않는 건 현명한 일이다.
“피곤하시진 않으세요?”
마침 몸을 기댈만한 적당한 나무둥치가 보였다. 마스터를 내려놓은 난 그가 편하게 앉게끔 자세를 고쳐주었다. 하고 나서 놀랄 만치 자연스러운 접촉이었다. 아무래도 이전보다 좀 만만한 모습이다 보니 나도 거리낌을 좀 벗어버린 것 같다.
“몸이 무겁군.”
이윽고 떨어진 대답에 난 흠칫거렸다. 그저 질문에 솔직히 답한 것이겠지만, 내겐 꼭 약한 소리를 털어놓은 것처럼 들렸다. 약점 따윈 없는 듯한 그가 아니던가. 난 그의 앞에 마주 앉아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아보았다. 맥박을 잰다거나 하는 재주가 없더라도 만져만 보아도 이상을 알 수 있게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추웠나요?”
그러고 보면 한밤중의 숲 속이다. 나야 체온이 보존되는 로브를 입고 있어서 느끼지 못했지만, 아까보다 기온이 많이 내려간 것 같다. 쉬는 건 쉬는 건데 텐트는커녕 담요도 없는데 맨몸으로 야영해야 하는 판국이다. 난 잠시 고심했다.
“모닥불을 피우는 것도 안 되겠죠?”
요는 마력이 사용되면 대기에 파장이 발생하니 마탑에서 추적이 들어올 수 있다는 건데, 자연적인 불은 괜찮지 않겠어? 작게 피운다면 숲이 워낙 무성해서 빛이 멀리까지 번져갈 것 같진 않다. 부싯돌이나 성냥은 없지만, 나무와 나무를 마구 비비면 불을 피울 수 있단 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넌지시 묻자 마스터가 입만을 달싹여 물음을 냈다.
“산불이라도 나면 어쩔 참이냐.”
……그건 또 그러네. 난 불을 피워본 적이 없기에 모닥불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여긴 나무도 많고 불이 크게 번져서 우리를 덮치기라도 하면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불편함이라니. 일단 모닥불은 접어두는 걸로 하자.
그렇다고 추운데 그를 그냥 내버려두기도 영 뭐해서, 난 다시금 물었다.
“마스터는 인간도 아닌데 감기에 걸리고 그러시나요?”
“말했지 않아. 난 현재 평범한 인간 아이라고.”
은근슬쩍 당신 인간이 아니지 않으냐는 전제를 담긴 했는데, 모호한 답변이었다. 타락한 천사나 마왕 같은 신적인 존재가 아닐까, 그의 정체를 나름 유추해보긴 했는데 도무지 답은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현재는 인간이나 다름없고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말이겠지.
“그럼 목마르고 배도 고프시겠네요.”
정답이었다는 듯이 마스터는 내게 말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나야 굳이 먹을 필요 없다지만 꼬르륵 소리만 안 났다뿐이지, 마스터의 낯빛이 무척 기운 없고 퀭해 보였다. 이대론 안 되겠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벗어들었다.
“일단 이거 덮고 계세요. 뭐 먹을 거라도 없나 주변을 둘러보고 올게요.”
빨간색이니 멀리서도 눈에 띌 터였다. 로브를 벗으니 바로 한기가 흘러들어 으슬으슬 몸이 추웠다. 원체 건강한 몸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움직여서 열을 내면 될 터이다. 여태 짐승이라곤 눈에 띄지 않았으니 별로 위험할 것 같진 않지만 마스터를 홀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되도록 자리를 오래 비우지 말아야 했다.
그로부터 약 10여 분에 걸쳐서 숲을 휘젓고 다닌 난 주변에서 자그마한 시내와 잘 익은 둥글고 단단한 껍질의 열매를 찾아냈다.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물을 떠 갈 그릇도 없어서 어쩌나 싶었으니까.
사과만 한 크기의, 코코넛을 연상케 하는 단단한 나무 열매. 침엽수림엔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지만, 쪼개어보니 안쪽에 하얀 과육이 있었는데 우유처럼 농도 짙은 단맛이 났다. 딱 먹기 좋게 익은 듯싶다. 다만 나야 아무래도 독성에도 면역이 된 것 같아서 이상이 없더라도 마스터가 먹어도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뭐, 일단 가져가 보면 마스터가 알아서 판단하겠지. 배가 고프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지는 않을 분이니.
난 단단한 열매에 삼 분의 일쯤 되는 부분을 쪼개놓고 순전히 손가락 힘으로 안을 파낸 뒤 물을 담았다. 맛이 꽤 좋았기에 긁어낸 과육은 모조리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열매를 들 수 있을 만큼 따낸 뒤 품속에 끌어안고 다시 걸음을 놀렸다.
주변을 탐색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는데 문득 돌아본 숲은 스산하도록 어두컴컴했다. 달빛에 젖어든 풍경도 괴이하기만 해서, 본연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만다.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숲이다. 그리 오래 싸돌아다닌 것도 아닌데 초조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로브를 입혀두었고 거기에 검도 있다지만, 마스터가 위험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빨리 가야겠는데.”
말이 떨어지자마자 서두르기로 맘먹고 쫓기는 것처럼 뛰었다. 그러나 마스터를 남겨둔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난 기껏 구해온 것들을 바닥에 내팽개쳐야 했다. 저게 뭐야!
-크르르르릉.
샛노란 안광을 빛내며 돌아보는 놈은 성체가 된 곰 세 마리를 합쳐놓은 양 컸다. 덩치도 위협적이거니와 번뜩이는 하얀 이빨이 코끼리의 상아처럼 거대하게 삐죽하여 시각적인 공포를 유발하기에 족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난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냥 저건 짐승도 뭣도 아닌 괴물이다. 놈의 앞발은 나무둥치를 짚고 있었고 그 바로 앞에 마스터가 앉아있었다. 놈이 발을 내딛으면 단숨에 뭉개질 듯이 작고 연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멀쩡해 보인다.
색이 선명한 붉은 로브 속에 묻혀 앉은 마스터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하다. 그는 단 한 번도 짐승에게 목숨을 위협당해본 적 없기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할지도 몰랐다.
어떡하지? 일단 주의를 끌어서 마스터에게서 저걸 떼어놓아야 하는데. 섣불리 자극했다가 마스터를 공격하기라도 하면. 내가 도착하기 전엔 그저 탐색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놈의 기세는 확연히 날카롭게 변화한 상태였다.
한기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위기상황에 머리에 열이 올랐다. 저 몸집도 그렇거니와 두꺼운 털가죽을 보건대 아무리 내가 신체능력이 발달했다고 한들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마법을…… 써야 하나?
놈은 짧게 시선을 주었을 뿐 나보다 그의 발 앞에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야들야들한 어린 생명체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곧바로 놈의 고개가 앞으로 돌아갔다. 난 생각한 겨를도 없이 떨어뜨린 나무 열매를 주워들어 놈을 향해 내던졌다. 퍽!
-크아아아아앙!
놈이 바로 펄쩍 뛰며 내게로 입을 벌려 길게 위협음을 내지르자 난 새파랗게 굳었다. 입 안쪽에 촘촘하게 난 날카로운 이가 유독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나 정도는 단숨에 씹어서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릴 법하다.
진짜 무섭다. 한밤중에 이딴 괴물을 마주하고 있자니, 심장이 다 벌렁거린다. 그래도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으니 이젠…!
그때였다.
-부스럭.
작은 소리와 함께 마스터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로브가 사락거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흉흉한 기세를 띤 괴물의 고개가 다시금 앞으로 돌아갔다. 아까보다 짙어진 눈빛은 명백히 야성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신 제정신이야! 거의 소리를 지를 뻔 한 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스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세뇌라도 당했는지, 마법은 뇌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놈과 마스터의 눈이 마주쳤다. 심연 속에 흉포함이 넘실거리는 안광이 고스란히 담겼다. 서로에 대한 짧은 직시였다.
그 찰나에- 사납게 숨을 들썩이던 괴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당장에라도 눈앞의 어린 몸을 물어뜯을 듯하던 기세가 순식간에 죽어들고 놈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주……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것을 이제야 발견한 듯한 기색으로. 기이한 광경에 난 발을 멈추었다.
-크르르.
갑자기 한달음에 옆으로 물러난 괴물은, 콰삭하고 바닥을 짓밟으며 자리를 박찼다. 그리고 질겁한 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꼬리에 불을 붙인 듯 도망치기 시작했다. 땅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놈의 모습이 숲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아연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고만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실은 남주를 어부바 하는 여주를 한번 써보고 싶었어요 그래씀니다...
남자만 여자를 어부바해야한단 법 있나요!
담편은 아마 쥬말에...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