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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94화 (94/155)

00094  7. 배반  =========================================================================

속이 상하다 못해 저렸다. 이딴 소리를 지껄여 버리다니 최악이다. 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군.”

마스터는 놀랍도록 쉽게 긍정해버리곤 침묵을 지켰다. 내가 그리 말한 이상 진의를 파헤칠 이유도 없다는 듯한 태도라, 하고 싶은 양 맘껏 내뱉어놓고도 속이 시원해지기는커녕 울화만 치밀었다. 제자들에게 배신당해버린 처지인 그였으니 심하다 할 것이나, 솔직히 그래도 싸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렇게 정떨어지게 구는데 누군들 배기겠어?

거기까지 떠오르자, 억누르고 있었던 감정들이 틈을 비집고 솟아났다. 그래, 나야말로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한 인간의 전형인 거지. 그리고 현재의 마스터는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애다. 그런 계산속 덕분에 어떤 소리든 함부로 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참을 수 없이 배알이 꼬였다.

난 찾아들었던 자괴감 따윈 금세 잊고 마스터를 향해 한껏 비꼬았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이것도 한 번 물어보죠.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셨나요? 마스터는 탑의 주인이시잖아요. 어떻게 모를 수 있죠?”

마스터는 새카만 동공으로 날 응시했다. 그리고 떨어진 말.

“나는 엘리야를 믿었다.”

그 단언에, 턱하고 말문이 막혔다. 믿는다니, 마스터가? 애초에 그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나. 그의 첫 제자인 엘리야만이 예외인 걸까.

그의 입으로 누군가를 믿는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가슴 안쪽이 까끌까끌하게 쓰렸다. 동시에 반발심이 솟구쳤다. 그 순간 날 파헤치고 지나간 건, 왜 나는 아니면서, 엘리야는……. 그런 속삭임이었으리라. 하지만 마스터가 생각하는 믿음은 내가 아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를 잘 안다. 엘리야는 시온의 목숨을 담보로 일을 벌이지 않을 자다. 그러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얼마나 오래 준비했든, 그에게 성공하리란 확신은 없었을 터이니.”

“…….”

잠시 그 ‘어떤 일’이 내가 엘로힘을 부화시키는데 마력을 끌어다 쓴 것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나 하나가 일을 쳤다고 마스터에게 중대한 영향이 간 게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래도……. 그게 어쩌면 마스터가 나를 해하지 못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간과했던 건 내가 그간 그에게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는 거였다. 엘리야는 이번을 필경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거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 초조감과 다른 시온의 바람이 한데 모여 뿌리 깊은 신중함을 깨고 그를 움직였다. 나 역시 방비를 했지만 늦었다. 너무 늦지는 않았던 건지도 모르지.”

마스터는 그리 말하며 내 속내를 읽어내듯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검을 담았다. 짐작대로 그 검이 마스터의 힘을 보충할 한 수였다. 그러나 내가 검을 가지고 돌아오기 전에 이미 일은 시작되었다. 내가 부재한 걸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엘리야보다는 마스터 쪽에 가깝다고, 그리 여겨지는 쪽이었으니까.

…물론 저 먹통 같은 마스터는 홀로 그걸 모르고 있지만. 뒤틀린 속내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므로 난 선뜻 일침을 가했다.

“맨날 다 아는 척 뭐든 할 수 있는 척하더니 한심하시네요.”

말하고 나서 짐짓 눈치를 봤지만, 어쨌든 기분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속내를 읽어내기는 어려운 일이나 대신 마스터는 차분하기 짝이 없는 투로 반박했다.

“엘리야는 룻을 관할하는 동시에 다른 시온들의 구심점이며 동시에 제어장치였다. 그는 그 역할에서 이제껏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왜 그가 그렇게 했는지 이유가 궁금하진 않으시고요?”

화가 나는 건 둘째 치고 나야말로 실로 궁금하긴 하다. 왜 자신이 배신당했는지, 무엇이 엘리야가 행동하도록 만들었는지. 왜 그의 제자인 시온이 줄줄이 엘리야를 따랐는지, 그 ‘기회’란 걸 떠나서 좀 인간적으로 유추할 수는 없는 거야? 이김에 그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나 좀 알자.

그리고 인간적인 정서가 결여되어있다고 단연코 확신할 수 있는 마스터의 대답은, 답답하긴하되 예측한 그대로의 것이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삶은 소원의 대가로 내게 귀속되었고, 그건 그들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였다.”

“말 나온 김에 그거 좀 부당하지 않아요? 무슨 소원을 이루어줬다고 사람을 평생 부려 먹어요! 그거 제 세계에서는 인권침해라고요. 법적 효력 같은 거 없어요.”

물론 고깃배로 끌고 가서 감시하고 착취하는 그런 불법적인 건 있다. 마스터도 인세의 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치외법권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누군가의 생을 저당 잡는 게 옳은 건 아니다. 그건 누가 행하든 옳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마스터의 말은 평온하기 그지없게 이어졌다.

“나는 누구도 이루어줄 수 없는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건 누군가에게는 영혼을 팔아도 좋을 만큼 원해도 주어지지 않는 기회였다. 그 기회를 잡고 대가를 치르기로 결정한 건 그들이다. 너 역시 다르지 않을 텐데.”

어쨌든 마스터도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포착하긴 한 모양이다. 즉, 내가 강제로 그의 제자가 된 것에 심히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거.

“무슨 그런 소리를. 죽을지 살지를 결정하라고 물으면 당연히 누구나, 삶을 택하죠!”

“그 선택은 네가 한 게 아닌가.”

“협박에 의한 선택은 실상 실효성이 없는…….”

“그를 어긴다면 대가를 치르게 될 터인데, 어찌 실효가 없다 할 수 있나.”

그야 그렇긴 하지……. 마스터에겐 개개의 선택을 준수하라고 강제할 힘이 있고, 때로 힘은 법보다 더 강한 지배력을 떨치며 그 자체로 실효를 가진다. 하지만 사람을 두들겨 팰 힘이 있다고 해서 그러는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듯, 이 또한 같다.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당신이 그럴 수 있단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건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다. 그러고 보니 그와 이렇게 일일이 속내를 터놓고 언쟁하는 건 처음이다. 아니, 처음이 아닌가? 내가 그를 일방적으로 탓한 적은 있었지……. 기드온의 일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목이 메었다.

지금도 잊은 건 아니다. 그게 그리 쉽게 잊힐 만한 것이던가. 앙금처럼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뜨겁고 진득하게 내 안에 맺혀 있었고……. 어쩌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잔악한 이라 비난하고 내던져버리고 싶은 마음도 종종 불붙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구치고, 그 위를 덮는 건 그럼에도 마스터를 저버릴 수 없는 마음.

그러니까 당신이 이해했으면 좋겠다. 아니, 이해하지는 못해도 변했으면 좋겠다. 그냥 날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내 말을 귀담아듣고.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구한 걸 후회하지 않게-

난 가라앉은 음성을 내었다.

“……누구에게나 불가피한 상황이란 게 있어요. 마스터는 그걸 이용하신 거고요. 요구하시는 대가가 너무 과하세요. 빚은 갚을 수라도 있지만, 마스터는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어요. 선택의 대가로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선택지를 빼앗는 거잖아요. 그게 죽는 거보단 낫더라도, 삶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

“사람의 인생은 어떤 명분으로도 구속해서는 안 돼요. 그건 옳지 않아요.”

결국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당연한 듯한 정의론일밖에. 물론 마스터가 납득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마스터는 내가 옳다고 말한 걸 옳지 않다고 반박하는 번거로운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나직이 물었다.

“내게 종속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 왜 날 구했지. 내가 봉인되면 너는 자유를 찾을 텐데.”

그걸 노리지 않았느냐는 듯한 뉘앙스였다. 엘리야도 란델도 알고 있었듯 역시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내가 별로 속내를 숨길 줄도 모르고 뻔한 인간이긴 하지. 근데 그 뻔한 인간이 당신이 구한 이유는 왜 짐작조차 못하는 거야? 조금만 눈치가 있어도…….

“그건 답할 수 없어요. 왜일지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난 냉큼 칼같이 잘라버렸다. 그걸 내 입으로 말하란 말이야? 애초에 고백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이성이 더 강했다. 어쨌든 날 당연한 것처럼 부려 먹을 사람에게 약점을 잡히는 건 결코 내게 유리하지 않은 일이다.

“그보다 다른 이야기를 하죠. 이제 어디로 가야 해요? 여기 나가면 갈 데는 있고요?”

이미 일어난 일의 이유를 찾는 것보다 시급한 건 이 문제였다. 몽환의 미로 안에 계속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마스터는 모호하게 뇌까렸다.

“글쎄.”

“도와줄 사람은요?”

“없다.”

“그 있잖아요. 유귄이라고. 그는 마스터의 계약자잖아요?”

“그에게 맡긴 중요한 임무가 있다. 아직 수행하지 못했을 터, 당장 합류해도 의미가 없다. 엘리야도 그의 종적을 예의주시할 것이니 당분간 접촉을 피해야 한다.”

“유귄 말고는 없어요? 룻이나 아모스 중 엘리야를 따르지 않을 만한 사람…….”

마스터는 침묵을 지켰고, 나는 그게 너무 수가 많아 추려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도울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 걸 눈치챘다. 어차피 그런 면에서 기대할 건 없는 사람이다.

“마스터도 참…… 인망이 없군요. 갈 데도 없고 이제는 어쩐답니까?”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마스터가 나를 힐끗 보았다. 진실로 그와 함께할 마음이 있는 건지 확인하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둔중한 소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기이이잉!

난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동시에 발밑이 지직거리며 흔들렸다. 지진이라기보단 전파가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금빛이 혼란하게 흩어진다. 모래로 만든 세상이 부서져 내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 이게 뭔?”

“공간이 무너지고 있다. 예상보다 빠르군.”

공포에 가까운 당황에 휩싸인 나와는 달리 마스터의 음성은 느긋하기 짝이 없게 들렸다. 사실 쫓기고 있다고 한다면 내가 아니라 그의 안전이 더 위험할 텐데, 마력을 잃었다고 한들 그 무기질적인 냉정은 여전하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이기에 가지는 성격이 아니라 그게 그의 본질인 양.

“그, 그러고 있지 말고 대책을 좀 세워 봐요!”

혹시나 떨어질세라 화급히 달라붙어 어깨를 쥐며 외치자 마스터는 고심할 것도 없다는 듯이 명쾌히 답했다.

“이대로 내게 붙어 있거라. 이동을 목적으로 형성된 곳이니, 공간이 깨어지면 어딘가로 튕겨 나갈 것이다. 그때 네가 나를 보호해야 한다.”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 어쩐지 낯뜨겁고, 어색했다. 내가 마스터를 보호해야 한다니……. 그리고 그걸 당연한 듯이 요구하는 마스터라니. 경비원이라기보단 왕에게 수호를 명받은 여기사가 된 느낌이다. 이상하게 간질거려와 난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어딘가라면…….”

“도착지는 예측할 수 없다. 추적이 용이치 않을 테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방비하라. 곧 깨어질 것이다.”

뭘 방비해야 하냐고 물을 것도 없이, 유리에 금이 가는 듯한 소음이 차츰 좁은 간격으로 울려 퍼지며 주변의 마력이 날카로운 손톱처럼 피부를 긁었다. 나는 빠르게 마스터의 앞에 마주 서며, 결계를 단단히 둘러쳤다.

그 잠깐 사이에 긁혔는지 문득 내려다본 마스터 뺨에서 혈흔을 발견했다. 얇게 패인 실금을 따라 핏줄기가 비치고 있었다. 아주 자잘한 상처에 불과했지만, 그가 다친 걸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어쩐지 가슴이 섬뜩해졌다.

상처가 낫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은, 그가 마법사 특유의 회복력도 잃어버릴 만큼 쇠잔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눈 속에서 난 몹시도 불안한 표정으로 비쳤다.

세상이 부서져 내리는 와중에도 마스터는 나와 눈을 맞춘 채 고요히 뇌까렸다.

“도착하게 되면…….”

그러나 그가 말을 맺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력의 폭풍이 사위를 후려쳤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결계 안에서 긴장감이 치민 나는 마스터를 와락 끌어안았다. 동시에 돌풍이 결계채로 우리를 날려버리며, 세상이 하얗게 번져갔다.

============================ 작품 후기 ============================

와락 끌어안았다니까 좀 로맨틱하지 않나요? 어쨌든 포옹이자나요....

다음 편은 다음 챕터의 시작입니다 네. 주말에 올라올 듯여 아마도.

빨리 떡밥을 회수해야 하는데....

카페가서 글쓰려고 노트북을 샀어요 요새는 노트북도 참 가볍고 좋네요 lg 그램 하앜...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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