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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93화 (93/155)

00093  7. 배반  =========================================================================

문턱을 넘어선 순간, 눈앞이 까매졌다. 동시에 발에 닿는 것 없이 무작정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암흑에 삼켜지며 그저 아래로 치닫는 추락감. 허공으로 내던져진 몸은 속절없이 중력에 따랐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모든 게 바뀌었다. 환한 금빛이 일순 암흑에 먹힌 시야를 가득 메운다. 안구를 쪼는 빛살에 눈이 시렸다. 어느덧 난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고, 그 변화가 너무도 갑작스러워 흡사 영화의 다음 컷으로 곧장 건너뛰어 버린 양 난 화들짝 놀랐다. 중간에 잠깐 의식을 잃었었는지도 모른다.

감각이 돌아오기 무섭게 등 뒤에서 보드랍고 푹신한 감촉이 와 닿았다. 융단이라기엔 바스락거리고 밀도가 낮다. 그리고 배 위에 얹어진 묵지근한 무게…….

“마스터?”

약간 숨이 막혀와 의심스럽게 묻자 어쩐지 내 위에 덩그러니 올라앉아 짓누르고 있던 마스터가 몸을 움직였다. 스르륵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서는 모습이, 정말로 마스터에게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라고 생각했지만…… 귀엽다. 어떻게 제 몸에 맞는 로브를 입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여전히 작은 아이의 모습이다.

그런데 떨어지는 순간 날 쿠션으로 쓴 거야? 심히 의심이 간다. 물론 마스터는 그러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긴 하지. 아니, 사람이긴 한가.

난 마스터가 잠시 괴이한 형태로 변모해 있던 기억을 떠올려냈다. 꾸물거리는 덩어리,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마법이 걸려있었다고 한들, 사람이 어떻게 그리 변할 수 있지? 기체도 고체도 아닌, 시커멓게 물든 원혼의 안개 같은 모습을 상기하니 등골이 오싹하다.

그러나 마스터는 여기 내 눈앞에 있었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난 두리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추적자가 언제 따를지 모르는데,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여기는……. 난 불현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휘황한 금빛. 부서질 듯한 빛을 휘어 감고 몸을 내뻗고 있는 가지들. 촘촘하고 보드라운 잔디밭. 온통 잔잔한 빛무리로 가득한 숲이었다. 나는 이 장소를 알았다. 알기에 익숙한 감마저 있어 바로 깨닫지 못했다.

꿈에서 마스터를 만난 그 장소, 여기의 정경은 꼭 그곳을 따다온 듯했다.

그러나 나는 마스터와 함께 있었고 이건 꿈이 아닐진대 어째서? 난 물었다.

“여긴 어째서 같죠?”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만한 것이기에, 마스터는 구태여 되묻지 않았다.

“나와 함께 들어섰기에 이리 구현된 것이다.”

나는 그 전제를 곱씹어보았다. 그와 함께이기에. 그렇다면 이곳이 마스터와 관련이 있는, 어떤 장소라도 된다는 걸까. 세상에 자연으로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풍경인데……. 거기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려는 찰나, 퍼뜩 이곳에 들어서기까지 우리를 뒤쫓는 이들이 있었단 게 떠올랐다.

“왜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죠?”

“있더라도, 몽환의 미로 안은 사람마다 제 각기 다른 세계지. 누군가를 찾아내는 건 불가하다.”

앳된 목소리로 마스터가 읊었다. 그 무채색의 감정을 담지 않은 투는 여전하다. 너무 여전해서 현재 모습과 잘 매치가 되지 않아 어색할 지경이다.

“그럼 이 안에서 계속 있으면요?”

어디로 도망갈 구석은 있나? 마탑 바깥의 세상에 대해 떠올려보았지만, 나는 애초에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 기껏해야 샤자한이나 기드온이 떠올릴 수 있는 전부다. 마스터에게 은신처가 따로 있다면 모를까.

“탑의 마력이 내 지배에서 벗어났으니, 머지않아 이곳도.”

“이곳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가능한 한 빨리 향방을 정해야 한다.”

마스터가 그토록 불분명하게 말한 적은 또 처음이라, 난 잠시 귀를 의심했다. 하긴 그가 힘을 잃었음은, 지금 이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작고 유약한 어린아이. 마스터에게선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그 미약한 마력은 마스터가 인간다운 형태를 유지하게끔 하는 데 모조리 사용되고 있었다. 한 방울씩 솟는 샘물이 곧바로 갈취당해 채우듯 아슬아슬한 균형감. 그리하여 나는 그가 인간이 아님을 알았다. 이전부터 짐작하던 것이 확실해졌다는 게 맞다.

인간이라면…… 마력을 잃었다고 해서 육신의 형태가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그 사실이 유난히 충격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다. 이미 조금 전에 있던 일이 한차례 머리를 후려친 탓에, 난 마비되어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내가 좋아한다고,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했던 이가 이제는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럼에도 그 마음이 꺼지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고 또. 마스터가 내 앞에 이렇게 있다는 거에 안도하는 내가 있으니까.

뭐가 어떻게 되던, 막막한 가운데서도 그 하나가 위안이 되었다. 마스터와 내가 함께란 거. 비록 다분히 고난이 예상되는 운명공동체더라도, 혼자가 아니고 그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엘리야는 내게 그대로 떠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며 기회를 주었지만…… 그걸 뿌리친 데 후회하는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서 홀로 떠났다면, 나는 그 순간을 죽도록 후회했으리라.

뭐, 어차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겠지. 나는 마스터를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내버려두고 도망치는 게 고려될 리조차 없다. 그게 가능할 만치 차가운 심장을 가졌다면, 애초에 누군가를 애타게 좋아할 수도 없을 거다.

하지만 곧 의혹이 찾아들었다. 여전히 내가 마스터를 신뢰하지 못하는 건 자명하므로……. 그의 저 모습은 어쩌면 나를 이용하기 위함은 아닐까. 내 동정심이라도 자극해서, 그를 저어버릴 수 없게. 여자는 아이에게 약하다는 속설도 있잖아? 이제껏 그에게서 교활한 면모는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위기상황이니까. 마스터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내 도움이 필요하다.

난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지키는 마스터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근데 마스터는 왜 그런 모습이 되신 거죠?”

새카만 동공이 나를 향한다. 특유의 비현실적인 스산함은 여전히 그에게 배어있어, 그 심연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피부에 소름이 올랐다. 마스터는 찬찬히 답을 내어놓았다.

“내게 있어서 마력은 육신을 구성한다. 봉인이 내 마력을 흩어놓고 마탑과의 연결을 끊었으니 영靈에 남은 극소한 마력으로는 육체를 다 구성할 수 없었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긴 한가요?”

“영에는 마력에 대한 구속력이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회복되기 마련. 그러나 아주 천천히 진행될 터이니, 봉인을 깰 방도를 찾아야 한다.”

“마법을 쓸 수 없다고 하셨죠?”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리하면 육신을 유지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죽는 건가요?”

두려웠지만, 알아야 했다. 그래야 내가 만반의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마스터는 나를 잠자코 응시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가정해본 적이 없는 듯한 눈빛이었다. 실제로 그게 마스터의 강함이었다.

“…육신의 부재가 반드시 죽음을 말하는 건 아니다. 허깨비 같은 존재가 되겠지. 현실에 구현될 기반조차 없으니, 회복도 정지하다시피 더디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가 내뱉는 음절 한 마디마다 내게로 무겁게 얹히는 듯했다. 마스터의 말대로라면 정말로, 나 혼자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한단 거 같은데. 아까의 상황에선 그나마 검의 조력이 있었다지만-

“잠깐, 제 검이 어디로 갔죠?”

화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린 난 누운 자리 옆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는 검을 얼른 집어 들었다. 이동할 때 잠깐 놓친 모양인데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다. 곧바로 검을 로브 안쪽으로 찔러 넣으려던 난 잠시 머뭇거렸다.

“이 검은…….”

봉인을 깬 영향인지 이전보다 담고 있는 마력이 약해진 바 있지만, 마탑의 힘을 간직한 검이다. 마스터가 가지고 오라 명했으니, 당연히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힘을 잃은 마스터가 마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짐짓 검 손잡이를 가까이 내밀자, 마스터가 말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쓸 수 없는 물건이다.”

“네? 그럼 왜 회수하라고…….”

“봉인의 목적은 마탑과 나와의 단절. 마력의 흐름으로서도 동일하다. 검의 힘을 거두려고 한다면 반발을 초래해, 그릇이 훼손당할 터.”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의 그에게는 이 검의 힘이 해가 된다는 거지? 정말 시온들이…….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긴 했나보다. 마스터의 힘을 앗고 완전히 봉인하기 위해서.

마스터는 순순히 당해줄 만큼, 혹은 전혀 경계하지 않을 만큼 녹록한 이가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당했을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으나, 그건 분명히 정교하게 짜인 그물이 단숨에 죄여 드는 양 대비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나 역시도, 전혀 조짐을 느끼지 못했으니.

‘통수라는 건 이런 식으로 치는 거다!’라는 느낌이었지. 그렇다고 비난만 하기엔, 그들이 왜 그랬는지는 너무도 이해가 되어……. 가책 때문에 가슴이 따끔따끔하다. 후회는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랬다. 그러나 돌이킬 수도, 돌이킬 마음도 없으니 그저 나아갈밖에.

“이제는 어디로 가죠?”

미약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마스터지만, 적어도 나침반 역할을 하는 건 그의 몫일 테니까. 그와는 이제 정말로 운명공동체가 된 느낌이다. 내가 제안을 뿌리치고 마스터를 구해서 달아났으니, 엘리야는 이제 날 적으로 판단했겠지. 그뿐만 아니라 다른 시온들도. 그러니 이제 마스터에게 내 운명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름 무거운 결심으로 마음을 다지고 있던 내게, 마스터는 물어왔다.

“나와 함께 할 건가.”

잠시 그의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껏 구해놓고 내가 그를 나 몰라라 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마법도 쓸 수 없으면서.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달리 갈 데도 없고. 어차피 제가 필요하시잖아요.”

마스터와 함께하는 쪽이 고난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혼자인 마스터는 금세 붙잡힐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다면 다음 표적은 내가 될 테니까. 애초에 그들의 추적이 두려웠다면 마스터를 구했을 리 없잖아.

그러나 마스터가 무미건조한 투로, 평온하게 그의 의혹을 끄집어냈을 때-

“너는 왜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지.”

……뭐라고?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확히는, 눈앞이 하얘질 만치 격렬하게 치미는 분에 말하는 법조차 잊었다. 소리를 버럭 내지르지 않았던 건 오로지 내가 이성의 한 가닥이나마 부여잡고 있었던 덕이다.

나한테 지금, 왜 자기를 배신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거야? 화끈 열이 올라 뺨이 뜨겁고, 목구멍이 당겼다. 나는 화가 나다 못해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지독한 말이었다. 마스터는 항상 그래 왔으므로 기대따윈 품은 적도 없지만, 그와 별개로 진심이 한순간에 진흙 발로 짓밟히는 데 내성이 있을 리 없다.

마스터와 내가 쌓아왔던, 혹은 교류했던 그 시간을 그토록 쉽게도, 하찮은 양 치부하며 깔아뭉갤 수 있다니. 그에게는 내가 고작,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존재로밖에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다른 시온들과 함께하지 않은 게 의아한 거고. 내가 그를 구한 이유조차도, 의심하고 있겠지. 정말로 남처럼 칼같이 재단해버리는 거에 그 상대가 나라는 거에, 치가 떨린다.

감사 인사까지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째서 날 구했냐.’고 말할 필요는 없잖아. 마스터가 한 말은 그와 다르지 않다. 정말로,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걸까.

마스터의 흑돌처럼 반질거리는 눈에 비친 난 화가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숨길 수가 없다. 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모르세요? 전 탑에서 왕따거든요. 저만 까맣게 모른 걸 보니 아무도 절 취급 안 해주나 보네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마스터한테 붙어야지!”

============================ 작품 후기 ============================

눈수술은 잘 되었어요. 양눈 1.5의 시력을 획득했습니다!

아침에 눈뜰 때 세상이 환해요 짱좋음 *-_-*

담쥬부터 yes24에도 여기 진행속도에 맞게 연재가 되어서 월요일날까진 담편이 올라올 거 같아요.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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