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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92화 (92/155)

00092  7. 배반  =========================================================================

내 발끝은 마스터의 방으로 향하지 않았다. 룻이 바글거리는 그 입구를 헤치고 지나가려면 필히 전투를 감수해야겠지. 그들이 모두 한통속인 한에야. 그러나 굳이 거기로 가야 할 이유가 없다. 요엘이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마스터는 그 방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난 선명히 느끼고 있었다. 피부 위를 스치는 유리 칼날처럼 예리하게, 오롯이 한데 모이는 정신.

검이 내 의지에 반응하듯 스멀스멀 검은 기운을 피워내며 길을 가리킨다. 엘리야의 나비가 꿈결인 양 나를 이끌었던 것처럼 이것은 인도다.

흡사 주인의 위기를 예감하듯이-

서늘한 감각이 날 아래로 끌어내리는 듯하다. 카페인을 들이부은 양 또렷해지는 뇌리, 불안하게 뛰는 가슴.

그리고 직감은 이내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내리꽂혔다.

어둠에 찬 평면을 가로지르는 직곡선의 희미한 빛이 안구를 쪼는 듯한 석면이었다. 암흑을 본뜬 양 새카만 벽으로 온통 둘러싸인 기이한 방. 마스터가 그를 거역한 내게 처결을 결정했던, 내가 형벌의 방으로 끌려가기 이전에 사위에 시온을 거느린 채 날 내려다보았던 바로 그 장소.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다. 사형이 언도되는 순간을 목격한 양 호흡이 멎었다.

재판정 같은 엄숙함이 감돌았던 그 자리에서 참람한 사태가 펼쳐지고 있었다. 죽음의 사도인 양 제각각 머리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채 서 있는 네 명의 시온. 제각기에서 뻗어나온 강력한 마력이 포학한 짐승의 숨통을 틀어막듯 지독스러울 만치 한곳을 죄어든다.

그 안에 꿈틀거리며 번져 나오는 쇠진한 어둠. 사람이라고 하기에 어려운 잔약한 형체만이 흰빛 도는 결계 틈바구니로 어른거린다.

“마스터.”

소스라치듯 부르며 난 알았다. 그리하여 검을 든 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단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는, 목도하리라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배반의 현장. 은빛 날붙이가 번뜩이듯 오싹하다. 구름처럼 밀려온 소름이 온몸을 점령해서 그저,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한단 생각조차 망각해버린 채 난 망연히 그들을 응시했다.

네 명의 시온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쏟아졌다. 한시도 냉정함을 잃지 않던 그들이었으되, 이 순간만큼은 자로 재단한 양 반듯한 고유의 태도를 지키진 못했다. 차갑되 이유 모를 열망에 사로잡힌 눈빛들. 온통 마력을 쏟아 붓고 있어서 딴 데 신경 쓸 여력은 그리 없는 기색이었으나 그 당연한 듯한 차분함이 처절하게 가슴에 사무쳤다.

엘리야, 란델, 에스겔, 블레셋……. 난 짧은 새에 그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 밀랍 같은 얼굴들, 나를 보면서도 곤혹을 품지 않았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양. 개중 가장 여유 있어 보이는, 아니 실지로 몸에 배인 듯한 여유를 이제껏 단 한 번도 잃지 않은 엘리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엘이 너를 맞지 않았더냐.”

선득할 만치 미려한 미소였다. 처음 보는 금빛 로브에 둘러싸인 그는 어둠을 꿰뚫듯 빛살을 이고 반짝여 흡사 후광을 두른 성자 같았다. 그러나 그 성결함으로 자이낸 듯한 외형을 하고도 그는, 이 반역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것이 겉돌에 불꽃이 일듯, 나를 건드렸다.

“그랬죠, 제가 그를 죽였어요.”

까끌까끌한 입으로 난 단호히 내뱉었다. 축 처진 검이 슬쩍 공중을 향해 치들린다. 엘리야는 누구나가 그를 숭배하게끔 만드는 자애로운 눈길로 나를 향해 말했다.

“안타깝구나.”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죠? 뭐 때문에!”

우습게도, 내 몫이 아닌 배신감이 치달아 오른다. 목구멍이 얼얼하니 아리다. 정작 마스터는 그들에게 한 톨의 배신감도 느끼지 못할 것임에도.

“나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바라는 걸 항상 들어주고 싶어 한단다.”

뜬금없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찬찬히 나를 타일렀다.

“나는 항상 여기에 있었지. 이 마탑에.”

“…….”

“그렇기에 그 강렬한 소망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단다. 모두가 마음 속 깊이, 자유를 갈망했으니까. 그들은 한편으로 내가 그걸 이루어주기를 바랐지.”

“자유…….”

난 한숨처럼 되뇌었다. 그 짤막한 말이 날카롭게 나를 찔렀다. 나와 무관한 단어가 아니었기에.

“내겐 많은 준비가 필요했단다. 결코 실패하지 않게끔, 누구도 상하지 않게끔. 그리하여 오늘이 오기까지-”

느긋이 말하면서 헤아리듯 눈꺼풀을 눌러낸 엘리야는 돌연 빙긋 웃었다.

“무수한 세월을 기다렸지.”

난 이를 악물었다. 그가 이해되면서도, 배덕감을 이기지 못해 다만 내뱉었다.

“꼭 이런 방식이었나 했나요? 마스터는!”

“죽진 않을 거다. 그를 죽일 방법을 찾지 못했거든. 이건 그저 봉인이란다. 그가 누구도 해치거나 지배하지 못하게 만드는, 무력하게 만들 뿐인 봉인.”

산뜻한 미소와는 달리 엘리야의 손에서 뻗어 나오는 마력은 한층 기세를 더한다. 몸부림치듯 꿈틀거리던 어둠은 점차 움직임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봉인이 강고해지며 그나마 저항할 힘도 잃어가는 듯했다.

이대로……. 마스터를.

내 동요를 알아채었는지, 홀릴듯이 아름다운 눈빛으로 엘리야가 나를 마주 보았다. 일신의 힘을 봉인에 기울이고 있으면서도 현혹의 마력이 내게 향취를 훅 끼쳤다. 콧속으로 스미어 정신을 사로잡는 듯이.

“누구도 다치지 않아.”

달콤한 음성으로 설득이 이어졌다.

“너는 이대로 등을 돌려 나가기만 하면 된단다. 아직은 돌이킬 수 있어.”

“…….”

“아무도 너를 쫓지 않을 거란다. 너는 이제 네가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지. 누구에게도 구속당하지 않고.”

유려한 미성이 귀 언저리를 감돌며 솔깃하게 나를 갉아먹는다. 이건 몹시도 마음을 잡아끄는-

그는 확신하듯 물었다.

“너도 자유를 원하지 않았니.”

“그랬죠.”

나는 냉큼 화답했다. 허나 명료해진 정신이 바뜩 날을 세운다. 그래, 그의 매혹적인 설득, 논리,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성. 그가 내게 준 호의. 그 모든 것에 조금도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이성으로 재단할 여지 없이,

안 된다.

나는 마스터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다. 여기서 아무것도 못 본 척 등 돌릴 수가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채 태어난 것처럼. 그게 너무도 자명하여, 그 마음에 무엇도 견주어볼 수 없다. 감정과 이성이 합치된 양 깨끗이 망설임이 사라졌다.

“누구보다도 간절히.”

서슬에 찬 목소리로 읊어낸 난 즉시 검을 쳐들었다. 그리고 이내 벼락같이 봉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둠이 벼려낸 검날은 단번에 네 시온의 결계를 꿰뚫었다. 그러나 봉인을 파훼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혈관으로 퍼져나가 수은처럼 아주 느릿하게 전신을 잠식하는 종류였던 것 같다. 봉인을 향해 쏟아지던 마력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떠돌았다.

결계가 박살 나는 그 순간 네 시온이 쓰러지며 엘리야의 입가에 선혈이 비쳤다. 고통으로 찡그려진 눈매를 보며 찰나같이 죄책감이 가슴을 스쳤다.

……좋은 사람이었다. 내게 정말로 잘해주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난 그리 뇌까리며 구물거리는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기에 작고 가벼운 무언가가 걸리는 동시에, 움켜쥐고 그 자리를 박찼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도망쳐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내가 이제 다른 시온들의 적이 되었단 것도.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휘젓듯이 달렸다. 도주로가 바삐 뇌리를 스쳤다. 마력 준동이 느껴졌을 터,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챌 만하다. 엘리야는 정신이 붙어있었으니 곧 나를 쫓으라 지시를 내리겠지.

아모스 정도는 상대할 만하지만 모두가 원했다고 했으니……. 룻이 요엘만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들 모두를 대적할 자신은 없는데 정문을 통과하긴 무리겠고.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난 쉴 새 없이 생각하며 달렸다. 한 손엔 검이 한 손엔 어중간한 무게의 그것을 쥔 채……. 가만?

“마스터?”

어둠인가. 어둠이라면 손에 잡힐 리 없다. 이게 과연 마스터일까? 이 생명 같지도 않은 기괴한 것이……. 난 발걸음을 멈추며 의혹을 품었다. 응답하듯 새카만 덩어리 같은 것이 손가락에 걸린 채 꿈틀대었다. 그리고 이내 길게 늘어졌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좌로 우로 부피를 부풀린다 싶더니 차츰 사람의 모습을 갖춰갔다. 난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기에 서 있는 건 열 살 남짓한 자그마한 소년이었다. 그야말로 마스터를 쏙 빼닮은. 검은 로브며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 그와 대조되는 푸르스름하니 흰 피부에서 요요한 빛이 흘렀다. 흡사 마스터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하다.

“마스터……. 맞으세요?”

갑자기 벌어진 기상천외한 현상에 내가 얼빠진 채로 묻자 소년의 고요한 눈이 나를 향했다. 거기에 드러난 감정의 공백. 물살 일지 않는 호수와 같은 눈빛. 그 지독한 무심함을 엿본 난 확신했다. 이건 마스터다. 앳된 목소리가 마스터와 똑같은 투로 울려 퍼진다.

“룻과 아모스 모두가 엘리야를 따른다. 곧 추격자가 올 것이니 시간이 없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죠?”

지시받는 게 익숙한 그대로 난 조급히 물었다. 긴장감이 목덜미를 쭈뼛 곤두서게 한다.

“몽환의 미로로.”

들어본 적 있는, 명칭이었다. 불현듯 란델이 내게 그곳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단 게 기억이 났다.

‘그 안은 온갖 환상으로 들어차 있어서 거울의 방처럼 혼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눈길을 빼앗는 유혹이 그득하지. 그 강력한 마법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꿰뚫어보고, 그에 휘둘리지 않고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마법사는 마탑에서도 흔치 않아. ……그 안은 바깥과 별개의 세계이며 실체를 가진 환상이니, ……오로지 강력한 마법사만이 자신을 잃지 않고 그곳을 지날 수 있지.’

부드럽게 충고하는 음성이 떠오른 순간, 문득 목이 메었다. 이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직감한 탓이리라. 내 감정과 무관하게 어려진 마스터는 턱짓으로 곧바로 지시했다.

“이리로 쭉 가서, 문을 열어야 한다.”

냉정한 음성이 날 일깨운다. 어떤 혼란함에 빠져있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여길 탈출하여 안전을 확보하는 것. 난 마음을 다잡았다. 방향을 가리키는 마스터를 따라 발을 내디디려는데 불현듯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음과 함께 땅을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흡사 천 자락이 마모되는 소리 같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지금의 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날 안고 달려라.”

그 침착한 명령이 조종하듯 나를 움직였다. 난 마스터를 옆구리에 끼다시피 훌쩍 들어 올린 채 즉시 날듯이 뛰었다.

내 움직임을 감지한 듯 뒤에서 쫓는 마력의 기척이 느껴진다. 한둘이 아니었다. 싸늘하디싸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뜨거운 적의는 아니되 서슴없이 나 하나쯤은 찢어발길 수 있는 칼날 같은 목적의식을 품은 채 불특정 다수의 마법사가 나를 쫓고 있었다. 등이 얼어붙는 듯하다.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명백히 구분하자면 마스터는 악에 가까웠고 반기를 들었음에도 그들은 적어도 명분을 들고 있었다. 자유를 추구하는 건 인간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이니. 그러면 나는 자연스레 악의 편이 된 걸까?

성검으로 마왕을 구출하는 용사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 난 상황을 잊고 피식 웃었다. 저 앞에 설핏 문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난 은은한 빛이 휘도는, 그 범상치 않은 문이 마스터가 말한, 그 몽환의 미로로 향하는 입구라는 걸 깨달았다.

뒤에서 쫓는 이들이 속력을 올렸다. 갖은 힘을 다 짜내는 양 빠르게 따라붙는다. 틀림없이 내가 저리로 들어서는 걸 막아설 요량이리라. 곧 내쏠듯이 응집하는 마력을 느끼며 난 빠르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 작품 후기 ============================

이 장면을 쓰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단거(...)

슬슬 본격적이네요.

이거쓰고 저는 눈수술을 하러갑니다. 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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