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7. 배반 =========================================================================
가느다란 미소가 맺힌 얼굴이 섬뜩하다. 살의가 맺힌 그 두 눈. 나는 그런 눈을 블레셋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갈무리 되지 못한 분노의 생살이 드러난 그때와는 다른, 싸늘하고 저미는 듯한 눈빛. 실로 죽음의 천사 같은 모습.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를 기회를 보아 제거하는, 그런 흔쾌한 실행은 그에게 별것 아닌 일이리라. 그러나 어째서 그를 따르지 않은 게 이 하극상의 기회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려고 시도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싸워야 한다.
그 말이 뇌리를 스친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피부에 찬바람이 스치듯 소름이 일며 심장이 저렸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팽팽히 근육을 조이는 긴장감. 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그 긴장은 곧 기묘한 전율로 치환된다. 웅크리고 있던 요엘에 대한 적의와 경각심이 살의를 앞두고 대응하듯 날을 세웠다. 흡사 불길이 훅 번져오듯 뚜렷한 감각.
그건 전의戰意라 이름하는 것이었다.
시야가 좁혀드는 양 저절로 감각이 집중된다. 요엘의 몸으로부터 발산되는 마력의 흐름이 느릿하게 느껴졌다. 단 하나의 움직임만 놓쳐도,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난 눈이 빠지도록 요엘의 움직임을 읽어냈다. 짧은 영창이 끝나고 이내 손날을 따라 희게 맺힌 마력이 초승달처럼 횡으로 공간을 베어낸다.
―기이이익!
소름 끼치는 굉음과 함께 대기가 일순 절단된 듯했다. 상반신을 날려버릴 참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난 이미 간발의 차로 그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왜 이러는…!”
마구잡이로 뱉어낸 항의가 다다르기도 전에, 묵중한 힘이 날 후려쳤다. 피해낼 걸 예측한 듯 움직인 자리로 날아든 두 번째 공격이었다.
“컥!”
결계를 한 점으로 뚫고 복부를 강타하는 충격에 고통을 느끼기 이전에 숨이 막혔다. 쇠망치를 내려친 것 같다. 눈앞이 일순 하얗게 명멸한다. 고장 난 전등처럼 깜빡인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난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팠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릴 만큼.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와중에도 난 바로 정신을 추슬렀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지 못함은 죽음을 의미하기에.
그러나 약간 늦었다. 바닥에 쓰러진 상대를 향해 열화의 마법이 곧장 쇄도해온다. 지글지글한 열기가 훅 끼쳐오자 난 벌떡 일어서 결계를 급히 강화했다. 계산이 아닌 본능으로.
용암의 한 덩이를 뿌려낸 듯이 치지직거리는 끔찍한 소음이 결계를 뒤덮었다. 연속으로 쏟아내선지 뒤이은 마법은 다행히 강도가 약했다. 애초에 그와 난 단순한 마력보유량 측면에서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실전경험을 쌓은 데다가 나와 비등한 마력량을 지닌 상대라면. …결과가 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이를 악물었다.
누군가를 공격할 용도로 마법을 사용하는 데는 익숙지 않다. 하지만 방어만 해서는 이 상황을 타파할 도리가 없다. 지금 이대로는 안 돼. 위기감에 공세로 전환하기로 마음먹기 무섭게 요엘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갔지? 당황해 하는 찰나 슥, 한 치 앞에서 그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난 손을 쳐들었다. 코앞에서 행사된 마법의 파장이 근거리에서 수류탄이 터진 양 덮쳐온다. 콰지직! 실체 없는 결계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콰득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잘게 갉아 먹는다. 난 회피 거리를 벌기 위해 뛰다시피 뒷걸음질 쳤다.
한 달음 멀어지기 무섭게 쉴 새 없이 공격이 쏟아진다. 간간이 기회를 노려보았으나 반격을 허용할 만큼 만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무참히 두들겨 맞으며 너덜너덜해지는 결계를 수복하고 수복하고……. 온몸의 마력이 쉴 새 없이 빨려 나가 혈액이 말라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집중되는 공격을 무작정 막고만 있는 건 곧 부서질 듯한 방패를 두고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북을 치듯 전달되는 파동에 피부가 얼얼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때 마침, 쏟아지는 마법이 아주 잠깐 멎었기에 난 곧장 짧은 이동마법을 펼쳤다. 그러나 예상한 듯이 이동한 자리에서 발목을 노리고 날아온 마력구를 맞은 난 균형을 잃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가 이래! 예지력이라도 있나? 책상물림만 했을 법한 인상과는 다르게 얼마나 전투경험이 많은 자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넘어진 즉시 몸을 일으키는 날 보며 요엘이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고작 이런 게 시온이라니.”
“…….”
그 말에 울컥하면서도 반론할 수 없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난 내가 원해서 시온이 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도 물론 내가 원하지 않는 바다.
“순순히 따라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제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비뚜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멀찍이서 서서히 걸음을 내딛는 그를 향해 난 화급히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타임!”
나도 모르게 영어단어를 내뱉자 알아듣긴 했는지 요엘이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유언이라면 들어드리지요.”
여유를 부리는 곱상한 낯짝에 시퍼런 멍을 새겨 주고 싶었다. 난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물었다.
“저기, 지금부터라도 순순히 따라가면 안 될까?”
싸움의 일방적인 구도에 피워올린 전의는 말끔히 상실한 채였다. 난 현실적이었고, 현실적으로 볼 때 내가 요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요엘은 해사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그리고 빙긋이 웃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거든요.”
요엘이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손을 들어올린다. 곧은 직선처럼 차분하고, 그만치나 망설임 없는 동작. 그의 손 주위로 가공할 흐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적나라하게 모이기 시작한 마력을 목도하자 가슴이 뻐근할 만치 심장이 뛴다. 쿵쿵 거리며 고막을 울린다. 철도에 묶여 저 멀리서 질주해오는 기차를 바라보듯 짓눌리는 것 같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예감.
사지가 결박된 양 꼼짝도 하기 어려웠다. 극도로 마력을 소진한 끝에 지쳐버린 몸은 흡사 무형의 힘이 잡아두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깨달았다. 진이 빠지도록 두들겨대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 그에게 있어선 설계한 그대로의 전투다.
난 그 손끝을 주시했다. 이동마법을 쓰면 찰나라도 결계가 취약해진다. 거기에 요엘이 마법을 박아 넣는다면, 나로서는 그걸 막아낼 방도가 없다. 기가 막힐 정도로 그의 마법은 적중률이 높았다.
그러니 내게 기회가 있다면, 단 한 번.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요엘이 마법을 행사하는 그 순간, 비껴내고 전력을 다해서 공격한다. 유일한 승리공식을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하는 찰나, 요엘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
“이게 또 무슨 일이지?”
거대한 손톱이 긁고 지나간 듯 움푹 패다 못해 갈라진 바닥을 내려다보며 난 망연히 중얼거렸다. 고막을 뒤흔들던 굉음 탓에 귀가 아직도 멍멍하다. 돌연 밤이 떨어져 내린 양 시야를 집어삼키는 암흑이 사라진 뒤 눈앞에 펼쳐진 건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남자, 요엘. 흔적도 남지 않은 채 사라졌다. 몇 분 간 긴장한 채 몸을 굳히고 있었는데,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죽었을까? 그러면 내가 죽인 건가.
선득한 감각이 뱃속으로 퍼져나간다.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부인하고 싶어서도 맞지만, 막연히 요엘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실제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적어도 그 순간 내가 의도하거나 예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검을 꺼내 들었을 뿐이다. 지금 내 손에 들린 채 무생물인 양 숨죽이고 있는 이 검. 내 로브 자락 속에 묻어두었던 검의 존재를 떠올린 건, 이지를 가진 양 놈이 스스로를 알렸기 때문이다. 옷자락 안쪽에서 향을 풍기듯 은근히 풍겨 나오는 마력의 체취. 자신을 꺼내라고 속삭이듯이, 그렇게 검이 나를 불렀다.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고 있긴 했지만, 그간의 공방으로 내 상태가 썩 좋지 못한 터였다. 결계를 유지하느라 마력이 상당히 고갈되어 어떻게든 채워낼 것이 필요했다. 거기에 검이 제 존재를 내게 알린 순간, 나는 이 검이 내게 필요한 마력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요엘은 이 검의 존재를 모를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검을 뽑아, 요엘이 마법을 완성한 순간 앞에 세웠다. 급히 꺼내는 와중에 휘둘러지긴 했지만 그건 사소한 움직임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소함이 이런 효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검에서 번져 나온 불길한 어둠이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커멓게 드리우고 나자 난 한순간 장님이 되었고 검은 그 초 단위의 시간 동안 휘둘러진 그대로 요란하게 흔적을 남겼다. 한 사람을 집어삼킨 이 강대한 마력. 범상치 않았다.
일전에 이와 같은……. 물론 이보다 깔끔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진 일이나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였지? 난 기시감 속에서 떠올렸다.
-마스터가 첫날 그 사내를 죽였을 때.
이 검은, 마스터와 닮았다. 이것도 내가 모르는 마스터의 비밀과 연관이 있는 거겠지. 난 검이 남긴 흔적을 주시하며 사람을 죽인 데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려고 애썼다. 복잡한 기분이긴 했으나 생각보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직접 그를 칼로 찌른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난 문득 내가 이곳에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아니 전투를 벌이는 내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마스터나 탑에 남아있을 시온이며 아까 본 룻 중 아무도. 그 공백이 섬뜩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모스의 관할 하에 있는 것이 룻. 물론 룻은 내게 대적할 만한 자들이 되지 못하지만, 요엘의 손을 거들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엘이 동료를 부르지 않음은 홀로 나를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혹은 나를 죽이는 일에 증인을 남겨서는 안 되던가. 둘 다 일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그는 나를 죽이는데 엘리야가 동의하지 않은 것처럼 말했으니.
그런데 애초에 왜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던 걸까. 왜 그래야만 했지?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마탑의 입구는 왜 닫혀 있었던 거지. 마력으로 작동하는 것이니 고장 날 리가 없는데…….
“닫아 놓은 건가.”
난 불현듯 중얼거렸다. 룻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던 것도 이상하거니와 나를 막아서는 요엘의 태도. 그 이상한, 이해 가지 않는 현상들이 하나의 예감으로 점차 현실화되고 있었다. 아모스가 시온에게 벌이는 하극상이 용납될 리 없다. 시온이나 마스터 중 누구라도 이 전투를 알았다면 요엘은 나를 죽이는 데 성공했더라도 목숨을 보장받지 못했으리라. 그는 마탑의 마법사답게 냉정하며 이성적인 성격이었고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죽이려 할 만한 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 요엘은 후한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시온이나 마스터 중 누구도 이 일에 신경 쓰지 않거나, 신경 쓸 만한 상황이 못 되기에. 지금도 이런 소란스러운 마법전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여기 오지 않고 있잖아?
“……아닐 거야. 아니겠지.”
빠르게 읊조리듯 부인하는 내게 부메랑처럼 그 말이 돌아와 꽂혔다.
…그런데 만약, 맞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난 이미 달리고 있었다. 손에 쥔 검을 품에 집어넣을 새도 없이 그저 달렸다. 심장이 사슬로 옭맨 양 죄여 드는 이 불길함, 이 초조함. 급박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나는 무얼 빌어야 할지 모르면서도, 빌고 있었다. 바닥을 날듯이 박차며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어갔다. 난 오직 한 명의 존재를 떠올리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마스터, 설마.
============================ 작품 후기 ============================
전투씬을 쓰느라 머리를 짜내야 했던. 으으으으으 늦어서 죄송합니다.
실은 이 소설 3인칭으로 썼으면 좋았을 걸 생각하고 있어요. 3인칭이 1인칭보다 쓰기 쉽기도 하고... 소설 내용이 3인칭이 더 풀어나가기 좋은 흐름이라...
알려드릴 건
검은 달무리, 금빛 숲 연재처를 확대할 예정이에요.
연재에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주 2회연재(월수라든가 하는 식으로)고정인 곳으로....
아마 유료연재 되는 덴 거진 다 들어갈듯해요. 그래도 당분간 조아라에서의 연재가 가장 빠르긴 할듯. 성녀님은 어찌할지 고민입니다. 이거도 뭔가에 묶여야 쓸거 같은데.... 열세 살 챕터까지는 일단 연재할 예정이에요. 이건 잘 써지는데 검달이 안써지다보니 후순위라 손을 잘 못대겠네요.
그리고 이 소설 종이책 출간에 관해서는, 출판사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손쉽게 구매하실 수 있도록 교보문고 개인출판시스템pod을 이용할 거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나온다고 장담할 수 있겠네요.
좋은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