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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90화 (90/155)

00090  7. 배반  =========================================================================

아득하게 높은 탑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 잿빛 그림자에 무게라도 실린 양 숨이 막힌다. 하늘을 정복할 것처럼 위압적인 몸체를 무한히 내뻗고 있는 탑의 거체는 흡사 지옥의 성 같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리 느껴졌다. 어깨를 짓누르는 심정을 여실히 느끼며 난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성에 사는 공주라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이곳을 집처럼 여기면서도 집을 향하는 걸음이 편치 않은 건 묘한 기분이다. 주거지와 안식처의 차이일까. 힐끗 손에 들린 검을 들여다본 난 그걸 로브 안쪽 고리에 매달았다. 순전히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나도 최근에 안 사실인데, 내 로브에는 물건을 티 나지 않게 보관할 수 있는 마법이 걸려있었다. 그래서 안쪽에 물건을 달아도 외견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난 최대한 느릿하게 평원을 가로지르면서 마스터에게 할 말을 떠올려 보았다. 필경 어색할 분위기를 걱정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다. 어차피 마스터는 이전에 있었던 다툼 같은 걸 크게 생각지 않을 테니까. 다짜고짜 당신 정체는 뭐냐고 묻는 건 좀 아니겠지? 안 그래도 마스터를 향한 태도에 변화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삼가고 조심하고 경계하고, 그런 식으로 마스터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닫지 않았던가. 더는 충실한 척할 필요 없다. 난 내가 마스터의 신뢰를 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차라리 저번처럼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마스터는 어떤 면에서 대단히 수동적인 편이다. 그는 소리를 반사하는 벽면처럼 스스로 어떤 행동을 보인다기보단, 내가 그에게 감정을 발하면 그때야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찰나의 흔듦이 그나마 내게 단서를 던져주었다.

그러나 직설적이 된다는 건, 다시 말해 솔직해진다는 것. 정작 가장 내밀한 마음은 털어놓지 못할 거면서. 홧김에 내뱉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아직은 그럴 만치 이성을 잃지는 못했다. 당신이 끔찍하다고 떠들어댔던 발언조차도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넘나들고 있었으니.

그때의 그건 목 끝까지 차오른 진심. 끔찍하고 두려운 이를 좋아하고 있는 마음은 어떻게 되먹은 걸까. 내가 그에게 품은 감정은 확실히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난 걸음을 멈추었다. 정확히는, 본의 아니게 멈춰야만 했다. 그리고 멀뚱히 시선을 올려 꼼짝도 않는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이거 자동문 아니었어? 입구에 다다랐음에도 굳건히 닫힌 문은 열릴 기미를 비치지 않았다.

“고장 났나?”

중얼거리며 난 주먹을 세워 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군가 열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오 분쯤 기다렸음에도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자 난 미간을 구겼다. 마스터에게 좀 반항했다고 문도 내게 반항하는 건가? 슬며시 짜증이 치밀었다.

문을 두드리는 손길이 힘을 실었다. 쾅쾅거리는 소리를 내어도 손만 아플 지경, 여전히 반응은 없다. 시온이라도 나와 볼 성싶은데……. 단체로 임무를 받아 나갔나?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인지.

소리가 작았던 건지도 모른다. 소란을 떨면 누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문을 한 번 세게 걷어차 볼 심산으로 난 오른발을 뒤로 쭉 뺐다. 그리고 힘껏 발길질하려던 순간,

“으악!”

난 외마디 비명과 함께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발에 채기는 싫었던 모양인지 스르릉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내 발이 허공을 갈랐던 것이다.

뭐 때문에 이리 뜸을 들인 거야? 안 그래도 돌아오기 싫어 죽겠는데. 잔뜩 짜증이 난 채 지켜보는데 불현듯 누군가의 옷깃이 눈에 잡혔다. 회색. 시온은 아니다. 빠르게 포착해내는 와중에 회색 로브의 주인이 서서히 나를 향해 몇 걸음 다가오며 자연스레 정체를 알렸다.

“요엘? 당신이 왜.”

구김 한줄 없는 단정한 회색 로브를 입은 그는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것처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꼭 같은 모습이었다.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가 한기를 품고 나를 훑었다.

“문을 부수실까 염려가 되어 말입니다.”

“문이 열리지 않았어.”

“그랬겠지요.”

요엘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나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십시오.”

그러나 난 문 안쪽으로 들어섰을 뿐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아모스였고 나는 시온이었다. 신분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자니 배알이 뒤틀렸던 것이다. 감정이 있다면, 있어야 할 쪽은 내 쪽이었다. 그게 그의 임무였을지라도, 내가 저지른 잘못을 보고하여 날 형벌의 방에 처넣은 건 바로 이 요엘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는 마탑의 마법사였고, 성격 자체가 아주 반감을 득득 불러일으켰다.

“뭐가 문제입니까?”

바로 돌아서 내 불만스러운 기색이 그득한 얼굴을 마주한 요엘이 싸늘하게 물었다.

“왜 문이 열리지 않은 건데.”

“고장 났습니다.”

“그게 말이 돼? 마스터는 뭐하시고.”

“…그런 소소한 일에 신경 쓰실 계제가 아닙니다.”

평소보다 비틀린, 날카로운 투였다. 저번 일로 날 완전히 경멸하게 된 걸까. 그건 이쪽도 다르지 않다고.

“난 임무를 보고해야 해. 마스터를 뵈어야겠어.”

“지금은 안 되십니다.”

“어째서?”

“다른 시온 분들과 함께하시는 중이니까요, 아주 중요한 일로.”

요엘은 내가 번거롭게 구는 게 거슬렸는지 슬쩍 눈썹을 치켜들었다. 묘하게 초조감마저 비치는 얼굴이다. 뭔가 바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의 표정을 살피던 난 이내 의문을 접어두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으면 안 될 이유도 없잖아. 나도 시온인데. 따로 명받은 일 없으니 난 마스터께로 가겠어.”

차라리 다른 시온이 있는 자리에서 마스터와 대면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엘리야나 란델도 한 번 만나 봐야 하고.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지 몰라도 시온인 이상, 내게도 그 자리에 낄 자격이 있다.

난 요엘을 제치고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금세 요엘이 나를 앞질러 길을 가로막았다.

“엘리야님이 제게 안내를 부탁하셨습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임무보고가 먼저야.”

나는 정면으로 원칙을 내세웠다. 그리고 내가 이렇듯 보고를 고집하는 건 요엘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서가 아니었다. 만약 그게 마스터의 명이었다면, 그대로 따랐으리라. 하지만 요엘은 엘리야가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건 마스터의 뜻이 아니라는 것.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는 몰라도 날 위한다는 명목하에 날 배제하는 것일 수 있었다.

그런 배려라면, 내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마스터는 날 죽일 수 없고, 그렇기에 난 마스터에게 요령껏 맞서볼 생각이었다. 가급적 그런 일은 피해야겠지만. 그리고 오늘따라 묘하게 끈질기게 구는 요엘이 좀 걸리기도 하고.

그러나 요엘을 제치고 나아간 난 홀에서 이내 뜻밖의 광경을 목도했다.

“이들은 누구지?”

낯선 광경이었다. 로브를 둘러쓴 수십 명의 마법사가 늘어서 있다가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온갖 색의 눈이 무미건조한 빛을 띠고 날 쳐다보며, 이윽고 고개를 숙여온다. 비록 찰나였지만, 누군가를 파악하기에는 족한 시간이다. 천장에서 카메라가 지켜보는 양, 마법사들 특유의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쏠리자 난 일순 섬뜩해졌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용모에 선연히 느껴질 만치 강렬한 마력이 몸에 흘렀다. 마탑에 이리도 사람이 몰려있었던 적이 있나.

“그들은 룻입니다.”

“룻들이 왜 여기에?”

이제껏 배워온 지식과는 대치되는 상황이라 난 인상을 찌푸렸다. 룻은 마탑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임무를 외부에서 수행하기 때문에. 애초에 마탑에 거의 드나들지 않는 이들 아니던가. 그런데 이렇게나 많이, 이곳에. 마스터의 면전에? 이걸 마스터가 용납했다고?

요엘이 선득한 음성을 내 지척에서 흘려냈다.

“아주 중요한 의식을 치르고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어깨에 얹어지는 손이 스산한 한기를 담고 있었다.

“저를 따르시지요.”

나는 요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내게 쉽사리 속이 읽힐 만큼 가면을 쓰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자는 아니다.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는 동요 없이 차갑고, 사무적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만들어진 듯한 인위를 엿보았다면, 그건 내 착각일까. 어떤 허점도 내보이지 않는 그를 앞두고 결심은 반대로 더 강해졌다. 도대체 그 의식이란 게 무엇인데? 난 다짐하듯 읊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난 마스터를 뵈어야겠어.”

요엘의 눈동자에 광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빛이 예사롭지 않아, 난 한순간 숨을 죽였다. 얕은 한숨과 함께, 이내 요엘이 속삭였다.

“…정히 그렇다면 저를 따라오십시오. 마스터는 그 방에 계시지 않습니다.”

싸늘한 등을 보이며 요엘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난 홀을, 그리고 여전히 예를 취하고 있는 룻들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은 뒤 이번에야말로 그를 따랐다.

홀을 성큼 벗어나는 걸음은 빨랐다. 내가 성가시게 군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요엘은 성이 난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유를 잃은 모습이다. 그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내가 과민한 건지도 모른다. 마스터가 내게 마탑의 힘을 품은 검을 회수해오라고 한 것도 사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저지른 일이 마탑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와서 그 때문에 이 모든 게 필요해진 거라면. 정말로 중요한 의식을 치르고 있고, 내가 거기에 방해가 되는 거라면. …실수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혹여 내가 보게 될 것이 인간을 산 제물로 바치는 악마적인 의식의 한 장면이 아닐지 가슴이 무거워졌다. 걱정이 된다기보단 그건 기실 두려움에 가까웠다. 기드온의 일도 귀로만 전해 들었을 뿐, 마탑의 잔혹함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실감한 일은 적었기에. 마탑과 의식이라는 단어를 연결 짓자면 그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곳은 내게 마왕성이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요엘을 뒤따르면서, 난 그에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이성적인 자였고, 또한 아모스였으며 마탑의 규율대로 나는 그가 섬겨야 할 시온이었기에. 홀을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벽면 앞에 서기까지도, 나는 그를 의심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난데없이 강력한 마법이 쏟아져 나를 강습했을 때, 그 모든 것이 뒤틀렸다.

―콰직!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본능에 가깝게 친 결계가 반쯤 뭉개졌을 때 난 눈을, 그리고 내가 직면한 이 상황을 의심했다. 그저 경악뿐이었다. 강대한 마력이 기류처럼 요엘의 몸을 휘돌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한층 더 투명해져서, 이제는 사람의 것 같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고 무시무시한 마력의 발현.

“아쉽군요. 제가 당신을 너무 얕봤나 봅니다.”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려세운 요엘이 나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거침없이, 죽이기 위한 목적만을 담은 그 손길. 거기에 실린 마력이 지독히도 강력해서, 난 차마 받아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몸을 피했다. 가까스로 비껴내며 난 본능적으로 결계를 수복시켰다. 결계마법 하나는 나도 능숙하지. 그간 겪은 목숨의 위협 덕택에 단련된 바 있으니까. 그리고 요엘은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적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마스터가, 엘리야가 이걸 알고도 가만 놔둘 거라고 생각해?!”

난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날카롭게 항변했다. 놀람과 충격에 뒤이어 혼란이 머리를 가득 메운다. 내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마스터를 만나 뵈러 간다고. 이게 할 짓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내 요엘은 이미 내 말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실지로 그는 결정을 내렸다. 나를 없애기로. 동요 한 점 머금지 않은 하늘빛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은사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그가 일으킨 돌풍에 사방으로 흩날린다.

“이는 피치 못함입니다. 엘리야 님께서도 용서해주실 겁니다.

============================ 작품 후기 ============================

추석인사를 이래서 저번 편에 안했던거죠. 또 올 거였으니깐.

맛난 거 많이 드시고 추석 즐겁게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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