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7. 배반 =========================================================================
손안의 감촉이 낯설다. 매캐한 연기가 손바닥을 휘도는 양 모호한 기운이 내부에서 움틀거리며 용솟음친다. 내부에 자리한, 물밑 소용돌이처럼 막강한 힘의 결집이 잡힐 듯이 느껴지는 순간, 압박감이 몸을 짓눌렀다. 난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고요한 대기가 호흡을 통해 빨려들며 이내 내 안에서 가라앉는다. 평온하다시피 모든 게 잠재워졌다.
난 손에 힘을 주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그리고 그 기저에 깔린 힘.
…평범한 외형의 검은 아니었다. 바위에 거의 육신을 묻고 있는 검 손잡이에 정교하게 돋을새김 된 나뭇잎 문양이 살갗에 고스란히 새겨지는 듯하다. 그러나 고아하게 세공된 겉모습보다도 이 보검을 범상치 않게 하는 건, 그 안에서 박동하는 듯한 원시적이고 생생한 마력.
무생물에다 가져다 붙이기는 우스운 표현이나 나는 마치 그 검이 살아있는 듯이 느꼈다. 움틀거리며 용솟음할 듯한 이 강대한 힘. 바다 아래 똬리 튼 수룡이 이러할까. 자격을 검증하듯 꿈틀거리며 내 마력을 음미하는 움직임이 읽혔다. 가진 바 마력이 조금이라도 약했다면, 내가 마탑의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이 검은 주저 없이 이를 드러내어 내게로 가차 없이 파고들었으리라. 허락받지 못한 이가 손댄다면 단숨에 집어삼킬 마검이었다. 가공할 마력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낸 검 손잡이를 굳세게 쥔 채 난 잠시 임무를 떠올렸다.
‘검을 회수하라고요?’
‘그래.’
‘그게… 다인가요?’
유귄은 말 대신 시선으로 답을 주었다. 불필요한 확인은 해주지 않는다는 냉정한 태도였다. 얼떨떨했다. 도착하자마자 한다는 말이 덜렁 ‘검을 회수하라.’라니. 벌을 받고도 반성하지 않고 마스터께 대들기까지 했으니, 이어지는 임무는 어려울 게 분명하다고 짐작했건만.
그러나 난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내가 못 미덥다곤 해도 한갓 물건 심부름에 시온을 보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그 검을 회수하기까지는, 또다시 난관에 봉착할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 다다르기까지 과정이 그리 쉬웠던 건 아니었으므로 예상은 일부 들어맞았다. 거조를 타고 내려선 곳은 온통 흐릿한 안개가 깔린 숲 기슭이었다. 광활한 숲엔 나무가 하늘을 뒤덮을 듯이 빽빽하여 저녁때처럼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수기가 그득하여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한 대기와 질척이는 발밑,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기이한 숲을 헤집고 들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검을 회수하는 것, 그게 내 임무였다.
숲에 깔린 마력의 역장 탓에 검의 위치를 마법으로 탐색하는 손쉬운 방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헤쳐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그물이 쳐져 있는 양 막막하기만 한 상태로 난 숲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는 몰랐으나 유귄이 ‘근처에 가면 검이 너를 부를 것이다.’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피부에 닿는 감각, 예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실로 그런 불명확하며 추상적인 것들이었다. 답답하긴 했으나 평온한 시간이었다. 숲을 막연히 헤매고 돌아다니며, 피곤해질 때쯤 나무둥치에 기대어 불편한 상대를 근처에 두고 잠들어야 했던 그 며칠간.
다른 시온들에 비하자면 그는 거의 동료라는 느낌이 없었다. 침묵을 지킨 채 나를 따르는 것이 고작. 나를 보좌하는 것이 임무이기에 유귄은 줄곧 나와 함께했다. 그는 극단적으로 말이 없었고, 실제로 나와 말을 섞는 자체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에 대한 첫인상이 어떠하건, 그런 점에서 유귄은 내게 달가운 상대였다. 말을 나누건 행동을 함께하건 어떤 의미로든 교류할 필요가 없다. 탑의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져 있었기에 시온도 아니고 탑 소속도 아닌 자와 함께하는 게 차라리 편했다. 적어도 이전까지 내 속을 뒤집어놓던 상념들을 다소 멀리할 수 있었으므로.
마스터, 기드온, 엘로힘, 시온, 블레셋, 그리고 또 다시 마스터……. 단서가 주어지지 않는 추적은 지독스레 나를 갉아먹는다. 내가 무얼 좇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무언가 있단 건 알고 있지만, 적어도 그건 내 빈한한 추리와 상상력이 닿을 만한 곳이 있지 않았다.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조차 잊은 채 난 다만 숲을 헤매었다. 그러다 문득, 나를 위해 애써준 엘리야에게 아무 감사 인사도 못 하고 왔단 걸 깨달았다. 돌아가면 꼭 만나서 이야기해야지.
돌아가면…….
찌릿, 가슴에 전류가 흘렀다. 거부 반응에 가까운 통증. 융기한 지면처럼 분노가 삽시간에 가슴을 메운다. 그래, 나는 마탑의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생각은 뇌리를 스친 순간, 본심이 되었다가 이내 강렬한 충동으로 화한다.
이게 기회는 아닐까, 하는 생각. 찰나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나와 함께한 유귄은 검사였고, 분명히 그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잘하면 그를 따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 나로서는 그의 힘을 재어볼 수는 없지만, 내 얕은 지식에 따르면 공간을 뛰어넘는 마법사의 도주를 추적하는 건…….
어차피 마스터는 날 죽일 수 없으니까. 그런데 왜? 어째서 그럴 수 없는 건데.
같은 질문에 직면할 때마다, 답을 찾을 수 없는 나는 순식간에 미로에 빠져든다. 그 막막함이란. 내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마스터 외엔 없었다. 그리고 마스터는 그걸 내게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틀림없이 그의 약점이므로.
난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결국 이렇듯 돌아온 질문은 나를 다시 상념 속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반복.
그러했기에 숲 속에서 헤매는 며칠의 시간이 내게 각별한 깨달음을 준 건 아니었다. 그저 어둠이 깔린 길을 걷고 있는 듯한 공허하고 무의미한 방황의 시간. 실제로 그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나흘째 되는 날, 난 비로소 무언가를 느꼈던 것이다. 가까워졌기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자석이 이끌리듯이 숲 한가운데에 꽂힌 검을 찾아내었다.
거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기이한 검. 자물쇠와 열쇠가 맞물리듯, 이 검을 회수할 수 있는 건 오직 마탑의 마법사뿐이라는 걸 난 바로 깨달았다.
검을 뽑기 전 난 아래로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이 물었다.
“이 검이 무엇이죠.”
“마탑의 힘의 일부.”
“그런 게 왜 여기에?”
“모른다. 회수를 명받았을 뿐.”
간결하고 명료한 답이다. 더 질문할 것도 없어 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척 보기에도 검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양은 실로 엄청났다. 왜 이만한 힘을 따로 떼어두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운용하지 않음이 손실로 여겨지리만큼 아까울 정도로 크다. 엘로힘을 부화시키려고 내 몸을 관통했던 그때의 마력처럼.
……가만. 그 때문인가? 퍼뜩 스치는 것이 있어 난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그때에 마탑의 마력을 다량 가져다 썼기에 이 힘이 새삼 필요해진 걸지도. 손실된 마력을 보충하는 목적인가. 중요하다면 중요하달 수 있는 임무였다. 끝나는 게 달갑지 않은 임무이기도 하지만. 그건 순전히 임무의 끝이 탑으로의 귀환을 의미하기에.
찰나 같은 망설임 끝에, 난 검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바위에 꽂혀있는 검을 빼내는 건, 놀랍도록 손쉬운 일이었다. 모래알이 흩어지듯 검을 둘러싼 결속이 사르르 빠져나가고, 무겁게 옥죄던 검집에서 벗어난 양 검날이 공중에서 기세를 떨쳤다. 사뿐히 들려 서늘한 빛을 발하는 검날은 담고 있는 마력의 속성이 그러하듯 그 역시도 검었다. 그러나 묵중해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빈 뼈다귀처럼 가벼웠다. 베기 위한 용도라기보단 들어서 후려치는 용도인 양 뭉뚝한 검날과 대조되는 무게였다. 검집이 달리 필요 없을 것 같다.
난 고개를 들었다. 기분 탓인지 숨 막히도록 피부를 짓누르고 있는 안개가 옅어진 것 같았다. 이 숲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가 검의 마력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검을 회수했으니 자연스레 안개도 사그라질 터였다. 아주 미미한 마력의 흐름이나 나는 검이 조금씩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갈 일만이 남았다. 난 아직 무엇도 정리하지 못했는데…….
“검이 모든 마력을 흡수할 때까지 기다린다.”
머뭇거리는 내게 유귄이 사무적인 투로 먼저 말했다. 그건 짧은 시간이나마 유보를 말하여, 나는 한시름 놓았다. 그를 힐끔거리며 난 대꾸하듯 질문을 꺼내었다.
“당신은 왜 나와 함께한…….”
까지 중얼거리던 난 그 이유가 너무 뻔해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능력적으로 못 미더울 만한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다른 이유로,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 마스터가 내 도주를 경계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나, 유귄은 다른 답을 내주었다.
“나는 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왜죠. 따로 명받은 바가 있나요?”
“그래.”
그게 무엇인지는 내게 알려줄 필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일단 그가 입을 열었기에, 난 이때를 기회로 삼기로 했다.
“당신은 마탑의 소속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럼 마스터와는 어떻게 연을 맺은 거죠?”
그의 실력을 의심한다거나 할 것 없이, 마력의 총량을 어림짐작하는 정도 외에는 내게 다른 이의 실력을 평가할 만한 수단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마스터가 따로 계약을 맺을 만한 강력한 검사라는 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다.
“나는 에퀼족 푸른 잎새 최고의 전사다. 우리 에퀼족은 집단적인 인간들과는 달리 종족을 지키기 위해 결집할 뿐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명을 받들지도 충성을 바치지도 않는다.”
훤칠한 장신,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분위기. 그걸 떠나서 어쨌든 어딘지 모르게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긴 했다. 이종족이라서 그렇다는 건가. 그 사실엔 별다른 감흥이 흐르지 않았다.
“그가 내 종족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마침 그에게 탑과 무관한 수하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난 필요할 때 그의 명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 마스터에게 당신이 필요하다는 뜻이군요.”
유귄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른 시온들이 이 유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지 못했단 게 생각이 났다. 나를 들인 게 의외였던 것처럼 유귄의 등장 역시도 그들에게는 작지 않은 변화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그 변화를 초래한 건 마스터. 가늠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흘러가고 있었다.
탑과 무관한 수하. 어째서 그렇지? 탑의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어차피 모든 마탑의 마법사는 마스터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난 퍼뜩 하나의 가정을 떠올렸다. 유귄을 필요로 하게 된 일이 마스터의 견고한 종속체제를 흔들만한, 그런 위험성을 품고 있는 거라면? 어쩌면 이건 마스터의 역린과 관계된 건…….
비약적으로 뻗어 나가는 상상을 난 추스를 수 없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외부에서 수하를 조달할 만하다. 그리고 그건 분명, 나와도 닿아 있었다. 그게 마스터가 나를 죽일 수 없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난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마스터는 나를 구했다. 그는 필경 나를 죽도록 내버려두려고 했고……. 그리고 등을 돌리던 그를 내가 붙잡았지. 그런데 죽어가던 나를 발견해서 살린 게, 시발점이 되었다면? 아니 애초에 내가 이 세계에 등장한 것 자체가 변수가 되었다면…….
내 존재를 딱히 대단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만,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이 될 수 있으니. 이세계에서 날아든 나라는 존재는 간과할 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스터는 내게 그런 가능성을 비쳐 보였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특별’하다는 걸 언급함으로써. 아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스터가 의도한 바이지 않을까.
머릿속을 빙빙 도는 생각과 입이 따로 놀았다. 정보를 캐내야 하긴 했는데, 실은 뭘 물어야 할지 모르겠단 게 맞다.
“당신은 마스터의 이름을…… 알고 있나요.”
무심코 그렇게 뱉어낸 난 혀를 깨물 뻔했다. 그깟 이름이 무슨 소용이라고.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걸 물었는지.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어이 내가 혀를 깨물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