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6. 형벌 =========================================================================
내딛는 걸음의 끝이 무디디무뎠다. 흐리게 깔린 안개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듯하다. 그럼에도 난 서슴없이 발을 내디뎠다. 혼란한 정신과 별개로 무의식이 날 인도하고 있었다. 이제껏 날 망설이고, 머뭇거리게 하던 그 무엇도 홀린 듯이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는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두려움을 압도하는 비이성. 속을 저미고 드는 통증. 짓이기고 날붙이로 헤집는 듯한 그 모든 게 광포하게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홀을 통해 난 곧장 마스터의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기에 그가 있었다. 그가 거기에 있을 거란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마스터.
단정하게 드리워진 검은 로브, 펼쳐진 흑발과 대조되어 요요하게 빛나는 흰 얼굴이 달빛을 머금은 양 희었다. 방안에 머무르는 그 모습이 오래된 비석처럼 괴괴하고, 오랫동안 한 데 고인 우물 같기도 했다. 그래, 어떤 생명도 살지 않는 죽어버린 물. 겨울날의 얼어붙어 가는 웅덩이. 날 보는 그 시선이 그토록 메마르고 차가웠다.
“왜 그러셨어요.”
불쑥, 입 밖으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상하게 목이 아팠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장작처럼.
“왜 꼭 그들을 죽여야만 했는데요.”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생각했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를 생각했다면. 공기를 장악하고 피부를 내리누르는 특유의 감각은 여전하되, 그를 향해가는 걸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아니, 내가 멈출 수 없었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게끔, 이성을 지탱하던 댐은 터져버렸고 모든 게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휩쓸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스터는 여전히 평온한 투로 물었다.
“벌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냐.”
그 새카만 시선이, 섬뜩한 위압감으로 내리꽂혔다. 복종을 맹세하듯 날 무릎 꿇릴 힘을 담아-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그러나 난 꺾이지 않았다. 반항하듯 몸속에서 피어오르는 마력이 단단히 육신을 지탱했다. 마탑의 것이 아닌, 내 본연의 마력. 그가 주었으되 이제는 내 것인.
난 마스터 앞에 가까이 섰다. 그에게 가까워지는 걸 몸서리치도록 두려워했던 본능도 불길에 먹혀져 고개를 디밀지 못했다. 난 자조하듯 서늘하게 내뱉었다.
“마스터가 끔찍해요.”
“…….”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고, 그걸 명령하고, 따르고. 이 마탑이란 건 미친 집단이야. 당신도 제정신이 아니고.”
이런 말, 그의 앞에서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미친 건 내 쪽인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난 그리 인내심이 깊은 쪽이 못되었다. 그 결과로 무엇이 초래될지라도.
그런데 돌연 뻣뻣하게 선 몸이 힘을 잃었다. 통제를 벗어났다기보단 그냥 몸에서 힘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생명력을 빨아들인 양 난 풀썩 쓰러져 바닥에 맞부딪혔다. 이상하리 만치 몸이 무거웠다. 당황과 두려움에 휩싸여 가까스로 고개를 든 난 기이한 빛을 띤 검은 눈을 마주했다.
“네 감상 따윈 무가치하다.”
턱을 치켜드는 손길이 한기가 어린 듯 찼다. 생명체와 접촉하고 있다기보단, 외계의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는 양 비현실적이다. 피부에 닿는 온도는 이리도 찬데 가슴은 뜨겁다니. 무기질적인 눈빛이 파고드는 듯했음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비틀린 음성을 내었다.
“무가치한 저를 왜 찾아오신 거지요?”
그건 꿈이 아니었다. 환상도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내게로 찾아왔고, 그리고 내게…….
그러나 마스터는 그대로 단칼에 부인했다.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구나.”
“착각하지 않게 모른 척하시지 그랬어요!”
난 거듭 소리를 높였다.
“내가 거기서 죽든 말든, 버티든 버티지 못하든 그냥 내버려 두지.”
그래서 내게-
“기대 같은 거 주지도 말지…….”
중얼거림이 튀어나오자마자, 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잇새에 힘을 주어도, 북받치는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어 눈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눈물샘이 터졌는지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그의 손등을 적셨다.
무력하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상대를 증오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가 원망스럽지 않느냐는 에스겔의 물음이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를 원망한다. 실은 그렇다. 그렇지만……. 증오할 수는 없었다. 그게 되질 않았다. 증오와 사랑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데, 난 그 종이 한 장을 뒤집지 못했다. 그건 내게 산을 무너뜨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 눈물에 젖은 볼품없는 얼굴을 지켜만 보고 있던 마스터의 손이 문득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그 유령 같은 손길이, 길게 뻗은 손가락이 내 목을 턱 움켜쥐었을 때 난 신음을 삼켰다. 잡힌 목 언저리가 얼어붙는 듯했다.
힘을 주지 않은 채 마스터는 특유의 고요한 투로 물음을 던졌다.
“내가 정말로 너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벼린 칼날 같은 질문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기묘하게 부풀어 오르는, 둥실 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엘로힘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나는…….
막연히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물었다.
“죽일 수 있다면, 왜 죽이지 않으세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던 이세벨도 죽였으면서. 당신을 비난하기까지 한 나는 왜?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이제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난 재차 추궁했다.
“저를 왜 살리셨어요.”
그 순간, 마스터의 눈 속에서 새카만 어둠이 넘실거렸다. 수렁처럼 깊고 어두운 그 어떤…… 형언할 수 없는 감정. 그건 달콤하다거나 부드럽다거나, 결코 그렇게는 표현되지 않을 차갑고 혹독한 종류였다. 정체 모를 괴물을 마주한 양 등골이 오싹하여 난 벗어나려고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나 꼼짝할 수 없었다.
마스터는 석고상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네게 임무를 내리마.”
“저는-”
또다시 그가 내리는 해악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라고?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하려는 내게, 그의 말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형벌의 방에서 일 년을 나고 싶으냐.”
혀를 앗아간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실 탈출을 노리며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들을 세고 있었던 나이기에. 그리 오랜 시간을 벌 받는 것으로 소요하기는 어려웠다. 그건 내게 가장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유귄을 붙여주마. 가면 그가 임무를 말해줄 터, 바로 떠나라.”
…손에 조금만 힘을 주었다면, 그는 필경 그대로 내 목을 비틀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마스터는 너무도 깔끔하게 내게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그리고 손을 거둔 채 이전과 같이 부동자세로 앉아 단절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그건 하나의 대답이었다. 그는 나를 죽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세벨에게 했듯 나를 치죄할 수 없었다. 그를 향한 감정이 내게 거역할 수 없는 절대이듯, 마스터 역시도 같은 것이리라. 그 안에 도사린 심연이 무엇을 품고 있을지라도, 현재는.
난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미동 없이 명상에 잠긴 낯이 칠흑 같은 밤의 달빛처럼 스산하고 아름다웠다. 허공에 달무리가 번져나듯 이상하게 가슴을 적셨다.
난 완전히 몸을 바로 세웠다. 언제나 그렇다.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 달처럼 그는 그토록 쉽게, 내 마음을 바꾸고, 기분을 바꾸고, 나를 움직였다. 저항하려는 노력은 부질없었다. 그의 한기가 전염된 듯 손이 차가웠다. 뜨겁도록 달아올랐던 심장도 땀이 식은 양 서늘했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그의 명이 어떤 것인지 우선 들어보아야겠다고, 멍하니 상념이 흘렀다. 마스터가 드러낸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걸까? 수많은 의문이 내 안의 동굴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혹여 마스터가 나를……. 그런 추측은 공상적이고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그럴 리가 없었다. 마스터가 일말이라도 날 마음에 담았다면, 내게 그런 눈을 보일 리 있겠는가. 사랑이라고 하기엔 어둡고 차가웠다. 그러나 어찌 보면 사랑과 비슷하다고 할 만큼 강렬했다. 타는 듯한 강렬함은 아닐지라도, 그 무언가가 마스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불러일으키는 게 나라면,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오는 길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그자가 어느새 홀에 우뚝 서 있었다. 위협적일 만치 큰 키도, 형형한 기운도 처음 만났던 여전하다. 회색 복면 속에서 날카로운 빛을 띤 두 개의 눈이 나를 직시했다. 유귄이라는 이름이었지. 날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내가 처음 마탑에 오기 전 여관 밖 마법사들을 살해한 검사.
그러나 그는 마스터를 마스터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마탑에서 유일하게. 그건 퍽 기묘한 일이었다. 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유귄.”
무뚝뚝하고 짧은 답변에 난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름 말고요. 시온은 아닐 테고 당신은 룻인가요, 아모스인가요.”
“나는 마탑의 권속이 아니다.”
의외의 말에 난 눈을 크게 부릅떴다.
“외부인이라는 뜻인가요?”
“나는 마탑에 소속되지 않은, 탑주의 계약자다.”
“그건 어떻게 다르죠?”
“나는 탑주에게 종속되지 않았다. 계약에 의해, 그의 명을 수행할 뿐.”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 그러나 이 마탑에서 그게…… 가능한 관계던가? 마탑은 누구와도 계약을 맺지 않는데. 그저 소원을 이루어 줄 뿐. 그러나 그는 마탑이 아닌, 마스터와만 연관된 계약자였다. 그건 곧 마스터의 비밀과 연결된 건 아닐까. 이 마탑이 마스터의 것임에도, 그렇게 분리되는 누군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의외스러운 일이었다.
“임무는?”
“도착해서 말하지. 바로 출발한다.”
더 이상 내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겠다는 듯, 유귄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바로 등을 돌렸다. 그 굳건한 등을 따르며 난 판단을 보류했다. 일단은…… 따라가 보아야겠지. 아무리 마스터의 수족인 그라도, 시온보다 높지는 않을 테니 내게 무언가를 강제할 수는 없을 터. 나를 감시할 목적으로 함께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순순히 따를 생각은 없다. 더 이상은, 어떤 것도.
어쩌면 이게 탈출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시온과 함께하지 않고 탑을 나서는 첫 임무이지 않던가. 난 유귄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는 마법사라기보단 검사였고, 그렇기에 내가 도망쳐도 추적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 이제 난 그가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미 최소한 수 명의 사람을 죽인 자이니, 내가 도망친다고 해서 그가 당할 불이익을 우려할 필요는 없다. 가책을 느낄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도망치기에 머뭇거려지는 점이 있다면-
난 내 안에서 언뜻 무언가가 싹트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이름 모를, 아직은 어렴풋한 감정. 막막함, 두려움, 부(不)의 감정과 유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망과 비슷한 색을 품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에게 반항하고도 죽지 않았고, 그건 블레셋이 한 말과는 달리 내가 마스터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든 특별한 존재라는 걸 의미했다.
…거기에 더 걸어 봐도 되지 않을까. 그 미련이 발목을 붙든다. 그러나 난 곧 한숨을 내쉰 뒤, 허리를 곧게 폈다.
어떤 생각을 품었건, 일단 나가봐야 결정할 수 있을 노릇이다. 지금은 치러야 할 세 번째 임무가 눈앞에 있었다. 그게 가장 시급한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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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챕터의 제목은 '배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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