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6 6. 형벌 =========================================================================
에스겔의 이동마법이 펼쳐진 직후 우리는 작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외벽 아래 작게 자리한, 블레셋의 상징색처럼 하얀 문은 흡사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인 양 느껴졌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성큼 손을 내뻗는 순간,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힌.”
난 무심코 돌아섰다.
“네.”
“마스터가…… 원망스럽지는 않은가.”
무슨 뜻으로 한 질문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답하기 어려워 난 잠시 망설였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았다고, 그러기에 원망 따윈 없다고? 그러나 나는 솔직하게 납득하고 있지 못했다. 무정하게 내게 형벌을 선고하던 마스터와 갇혀 있던 내게 찾아든 마스터가 동시에 스쳤다. 그 어느 때건 똑같은 색을 띠고 있던 고요한 검은 눈이 빛을 발하듯 지독하게 선명했다. 온몸의 세포를 일깨우는 듯한 그 암암한 어둠은 내가 결코 뿌리쳐낼 수 없는 것이었다. 혼란한 상념이 흐릿하게 뇌리를 점령한다.
나는 감정을 감춘 채 잠시 후 대답을 끄집어냈다.
“제가 어떻게 마스터를 원망할 수 있겠어요. 저를…… 구해주셨는데.”
저를 살려주셨는데. 제게 힘을 주셨는데. 비슷한 답이 모양을 바꿔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건 내 귀에도 진실이라기보단 다짐처럼 들렸다. 어쩐지 목이 메어와 난 입술을 달싹였다. 에스겔은 묘한 빛이 도는 비취색 눈동자를 내게로 향한 채 또 다시 물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시험하는 듯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개 이런 질문에서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마음을 도려낸 채, 읊조리듯이 말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 뚜렷하지 않은 투라 진심으로 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에스겔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안도하며 문을 열었다. 안은 녹음이 우거진 정원이었다.
“블레셋?”
맑은 새소리가 울려 퍼지는 울창한 나무숲이 낯설었다. 그러나 음향만이 깔려있는 양 생명체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틀림없이 인위로 조성한 마법적 공간일 터였다. 휴양을 즐기기에 딱일, 편안하고 온화로운 장소다. 몇 걸음 더 내딛지 않아 난 익숙한 음성을 들었다.
“아힌.”
바닥에 안착하는 소리가 가벼웠다.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듯한 그는 예상만큼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눈부시게 흰 로브도 구김 하나 없거니와 곱고 화사하여 도도한 기미를 띤 얼굴도 여전하여 흐트러진 차림새의 나보다 멀쩡해 보였다. 길게 뻗은 아름다운 금빛 속눈썹 아래에서 푸른 눈이 나를 천천히 훑었다.
“형벌의 방에서 빠져나온 건가.”
“그래요. 블레셋은…… 어떤가요.”
난 그 희고 반듯한 낯에서 사흘 밤낮으로 고통에 몸부림쳤을 흔적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악의적인 의도가 아니라, 그저 그게 내 가책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블레셋은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열흘도 더 된 일이야. 마스터께서 후유증을 남길 리 없지.”
용도가 분명한 이상, 후유증을 남길 만한 처벌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나 역시 그 사실을 무겁게 새겨 넣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에요.”
“너는?”
“제가 형벌의 방을 잘 견디는 체질인가 봐요. 괜찮아요.”
난 흔쾌히 답했다. 흐느껴 운 기억이 있기는 하되, 그건 적어도 고통 탓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고통 때문이기도 했다. 가슴이 저미는 듯한, 어쩔 수 없는 심장의 통증. 그렇다 해도 그에게 토로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리라. 말끔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
“도와주신 거 고마워요.”
지난 일의 앙금도 이제는 애초부터 없었던 양 깨끗하기만 하다. 확실히 그 큰 대가를 치러야 했던 단 한 번으로 블레셋과 내 사이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이 나아졌다. 그와 마주할 때면 저절로 표정이 굳어지고 쌀쌀맞은 태도를 감출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를 향해 웃음을 내비칠 수도 있다니 생각해보면 놀라운 변화다. 블레셋 역시도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나직이 물음을 꺼내었다.
“에스겔에게서 들었나?”
“네.”
이곳에 온 게 그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느냐는 뜻이라고 생각하여 냉큼 긍정의 답부터 건넸건만, 뒤이어 블레셋이 꺼내는 이야기는 좀 달랐다.
“비록 그곳 사람들은 불운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적어도 기드온은 봄을 찾았고, 불새 역시 떠나갔으니 말이지. 성주도 그 자리를 오래 보전하지 못할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난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불운을 피할 수 없었다고? 그리 표현될 만한 일이 무엇이 있지. 모든 게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온화하던 공기가 단숨에 변모하고 순간 발치 아래가 뚝 떨어져 내리듯, 섬뜩한 감각이 치닫는다. 난 얼어붙은 얼굴로 추궁하듯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너.”
블레셋은 곤혹스럽게 눈썹을 치켜들었다.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제가 들은 건 블레셋이 사흘 밤낮으로 고통받았단 거예요. 그 불운이란 게 뭐죠?”
빠르게 캐묻자 블레셋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오르고, 입가에 한숨이 고였다. 한층 굳어진 얼굴이 그의 입 밖으로 나올 심상치 않은 말을 예고하는 듯하다. 머리를 쓸어넘긴 블레셋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성주의 소원은 불새를 없애주는 거였지.”
“…….”
“그리고 우리는 그의 바람을 이루어주지 못했고.”
“그랬죠.”
“그래서 마탑에선 그걸 대신할 그의 다른 소원을 들어줘야만 했지. 그게 규칙이니까.”
“…그래서요?”
불길함이 담긴 질문에 블레셋은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성주가 바란 건, 그의 안전을 위해 반역자들을 소탕하는 거였지. 그래서 마탑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어. 마스터의 명에 따라 요엘이 여러 명의 룻을 거느리고 기드온으로 향했다.”
“반역자들이라면…?”
떨림을 머금은 질문은 거의 바닥에 깔리듯이 낮은 어조로 흘러나왔다. 지독하게 무거웠다. 블레셋은 내게 눈을 맞춘 채로 찬찬히 말을 이었다.
“기드온을 이탈해 설산에서 불새를 섬기던 이들을 말함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묻고 싶지 않은,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음에도, 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듯 아찔하다시피 어지럽고, 머릿속이 뱅뱅 돌았다. 엘로힘이 나를 불러낸 그 날 만난 쟌느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을에서 고단한 삶을 견디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그 얼굴들도. 모닥불 아래에서 번져나가던 그 온기.
…짧은 시간이었다. 정을 쌓거나 마음을 줄 만한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내가 그들을 돕도록 만들었던 그것이- 그 모두가 무참히 짓밟혀 있었다. 내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 순간에.
“모두 죽었다.”
단두대의 날이 떨어지는 듯했다. 그 분명한 단정에, 시야가 깜깜해지고 일순 숨이 막힌다. 현기증이 일어, 난 비틀거렸다. 왜, 어째서, 그래야만……. 당연한 논리로 이루어진 잔혹한 결말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고작해야 그 방에 갇혀서, 시간이 지나기만을 망연히 바라고 있었던 때에 모든 건 끝났다. 남은 건 통보처럼 전해져 온 죽음뿐. 재해의 흔적을 뒤늦게 목도한 양 그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다. 눈앞이 꺼멓게 먹혀갔다.
어떤 감정이라고 칭할 수 없이 처절하고, 또 무참했다.
블레셋이 누그러진 투로 속삭였다.
“마탑의 누구에게도 사람을 해하며 즐기는 악취미는 없으니, 모두 고통 없이 죽었을 터이다.”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딴 소리를 그리 덤덤히 말할 수 있는 게,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아. 당신들한테는 이게 그저 스쳐 보낼 만한 일인가? 별것 아닌, 하루의 일상을 말하듯이 그렇게- 아니, 어쩌면 당신도 알고 있었던가.
블레셋의 눈은 차분하기만 하여, 난 이미 그가 이 일을 체념하듯 예감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물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요?”
“그래.”
“그럼에도…… 결과가 정해져 있는데도 나를 돕고 싶던가요? 내게 한 마디라도 말해줄 수는 없었어요!”
이렇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면, 그랬다면……. 도움을 준 이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을지언정, 사나운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왔다. 목 안쪽이 피를 토하기라도 한 것처럼 쓰라렸다. 입안에서 쇠 비린내가 돌고 목젖이 당긴다.
그가 말해주었다면 난 엘로힘에게 마력을 쏟아붓는 짓 따윈 벌이지 않았을까? 그건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블레셋이 정말 날 돕고 싶었다면, 내게 말했어야만 했다. 내가 어떻게 방비할 수라도 있게. 난 퍼뜩 깨달았다.
그러니까 블레셋은 내 의지에 진지하게 동조했던 게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로 날 도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네가 깨달아야 했으니까.”
블레셋이 찬찬히 설파했다.
“마탑에 반하여 믿음을 고수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
“네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건, 어떤 뜻을 품고 있건 그게 실상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차분하되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푸른 눈과 함께 유리조각의 말단처럼 날카롭게 내게로 파고들었다.
“시온은 마스터의 도구다. 넌 그걸 알아야 해.”
내 안쪽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무언가가 팽 돌다가 죄이고, 머릿속에서 울렸다. 종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를 그대로 맞고 있는 듯싶었다. 속이 텅텅 빈 것처럼 몸 안이 저릿저릿 울렸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내 안에서 사납게 울부짖었다. 문득 손이 아팠다. 하얗게 질릴 만치 세게 주먹을 쥔 채로 난 되는대로 지껄였다.
“웃기지 마! 그냥 당신은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잖아.”
“…….”
“내가 마스터에게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아아, 그래 당신은.
“당신과 내가 마스터에게 똑같이 하찮은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거잖아! 질투심 때문에 날 죽이려고 한 당신이라면!”
“틀려.”
내 흥분에 동조되지 않은 고요한 눈이었다. 격류와 같았던 그는 없고 변화를 거친 그는 내 앞에서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관조하는 듯한 시선. 다른 시온들과 마찬가지로-
“난 그걸 증명할 필요가 없어. 이미-”
담담한 대답이 떨어졌다.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이가 악물렸다. 목구멍까지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며 맴돌았다. 부정할 수 없는 충동이 열로 올라 입술을 달싹이게 했다. 난 그 말을 가슴이 터질 만큼, 강렬하게 부인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형벌의 방에서 마스터가 내게 했던 말은 뭐냐고. 왜 그가 내 고통을 감해주며, 구태여 거기까지 찾아들어 신경을 썼던 거냐고. 내가 특별하지 않다면 어째서…….
그러나 난 이내 깨닫고 만다. 블레셋의 말을 부인하고 싶은 그 자체가, 내 소망임을. 어쩔 수 없이 품고 있는 기대며, 단 하나 내가 놓지 못하고 매달리고 있는 일말의 가능성. 그 여지 때문에 내가 응당 마스터에게 돌려야 할 분노를, 블레셋에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이리도 못날까. 어쩌면 이렇게도…… 어리석을까!
내게로 블레셋의 막힘없는 음성이 흘러내렸다.
“왜 네가 필요한 건진 모르겠지만, 너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아. 너도 이제 더 이상, 마스터를 거역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알았겠지.”
“그래서 날 위해서 일부러 그랬다는 건가요.”
“그게 바로 위 시온의 역할이니.”
그 흔들림 없는 모습은 내가 그러했듯, 그가 생각하는 옳음이었다. 블레셋의 그의 옳음을 내게 관철하고 있었다. 난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뜨고 빠르게 내뱉은 뒤,
“이만 가봐야겠어요.”
대답을 들을 새 없이 바로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