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6. 형벌 =========================================================================
그리고 난 어쩌면 이제껏 견뎌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 사실이 가슴 속을 저미는 듯 고통스러웠다.
한동안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려보내자 점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날 세우고 무뎌지기를 반복하며 나를 괴롭히던 모든 상념도 이내 회색으로 죽어간다. 색채가 결여된 이 흑빛의 세상에서는 붉은 빛깔로 타올랐던 감정도 이내 표백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를 안식이라고 하기엔 어려울망정, 망각이라고 이름할 수는 있으리라. 난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린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잠들지 못한 의식은 깨어있으되, 감각이 사라져버린 양 무엇도 뇌리에 와 닿지 않았다. 그저 얼어버린 채 눈을 깜빡이며 모든 걸 흘려보낼 뿐.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하는 것조차 잊었을 때, 문득 나는 어떤 기척을 느꼈다. 기시감처럼 스며드는, 이 낯선 감각. 검은 커튼이 내리듯 서걱거리며 내 손등을 스치는 선득한 촉감. 유령처럼 스산한 한기가 밀려 올라온다.
꿈을…… 꾸는 걸까.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게 오로지 검기만 하여, 난 무엇도 확신하지 못했다. 몸이 차다 못해 싸늘하여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어둠에 휩싸인 시야에 언뜻 희게 어른거리는 무언가가 비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마스터?”
잔뜩 잠긴 음성이 자아낸 말은 열없이 흐릿하다. 그러나 물음도 본능인 양 정지된 의식은 미동도 없어, 나는 멍하니 내게로 몸을 굽히는 형상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도 내가 거의 생기 없는 상태라는 걸 알아차린 듯싶었다. 무기력하게 바닥에 누운 채 난 사자(死者)의 것처럼 뻗어온 손길이 내 등허리를 감아 들어 올리는 걸 느꼈다. 그리하는 손길이 너무도 가벼워 인형이 된 것 같다.
왜… 어째서 이곳에. 현실감 없이 나는 사신과도 같은 형상의 마스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설핏 잠든 내가 꿈에 빠져, 내 머릿속을 가장 강력하게 차지했던 이를 그려내고 있는 걸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은 의식의 표피만을 타고 흘러, 생동감 있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날 끌어올린 채 상태를 가늠해보던 그가 이내 내게로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었을 때-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탁 튀었다. 기름에 불살이 번지듯 순식간에 온몸에 열이 올랐다. 그게 전율로 전신을 일깨웠다. 그 입맞춤에 타는 듯이 가슴이 뛰고, 그토록 가슴이 뛰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분기 때문에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난 떨리는 손을 들어 힘껏, 그를 밀어내었다.
“내게 멋대로 입 맞추지 마세요…!”
난 똑바로 그를 노려보며 짓씹듯이 말했다. 그 찰나 같은 맞닿음만으로도, 육신에 힘이 깃들고 있었다. 그걸 의도했을 터였다. 시들어가는 화초에 양분이라도 주듯 그렇게 의미 없이- 마스터는 손쉽게 나를 흔들었다. 정작 그는 내게 결코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마력을 전해 받지 않으면 이곳에서 견디기 어렵다.”
분노를 발하긴커녕 마스터는 무미건조한 기색으로 냉담하게 직설했다.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를 보는 양 내 반응을 그저 멀거니 좌시하는 태도에 분이 치밀어, 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제가 견디기 어렵건 말건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네가 갇힌 건 네 행동에 대한 응분의 대가일진데, 어째서 내게 분노하지?”
여상한 물음이었다. 눈물에 젖은 내 얼굴은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일그러져 흉하기 그지없다. 내가 보이는 비이성적인 행동이, 추하다고 비난하는 듯하기도 했다. 그와 나, 각각을 차지한 온도가 너무도 달라, 이렇듯 가까이 있음에도 마치 공간이 분리되어 단절된 것 같다.
“그럼 절 좀 내버려두세요! 이대로 벌을 받게…!”
그러나 내 뜻은, 가차 없이 묵살 당했다. 그를 밀어내던 손에 스르르 힘이 빠졌다. 족쇄에 묶인 듯이 꼼짝할 수 없는 날 짓누르며 그가 입술을 겹쳤다. 강압적인 행동과 달리 온도가 결여된 몸짓.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강제하고 있을 뿐인-
감각마저 통제할 수 없는지 난 일순 심장을 짓이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입술을 통해 마스터의 마력이 내게로 흘러들었다. 난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닫힌 눈꺼풀을 비집고 눈물이 줄줄 새어나온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다.
“그럴 수 있었다면.”
이윽고 입술을 떼어낸 마스터가 나직이 뇌까렸다. 공허가 도사린 그 검은 눈이 뜻 모를 이채를 띠었다. 처음으로 무언가, 다 타고 남은 재처럼 희미한 잔재를 비치는 그 속삭임. 염원은 아니되 열망처럼 들리고 거기에 배인 한기는 숙명과 닮았다.
이세벨의 일이 뇌리를 스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깨달음이 번뜩이며 내게로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기이한 선율이 나를 울리며, 눈이 절로 크게 떠진다. 내게 깃든 마력이 어둠을 뿌리치는 양 몸 안을 휘돌며 온기를 실어 나른다. 이제 이곳 형벌의 방은 내게 그저 어둡고 음습한 골방에 지나지 않았다. 방의 영향력이 내게서 떨쳐지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안개에 둘러싸인 양 어렴풋하게만 보였던 시야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마스터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로브 자락이 몸을 스친다. 그 감정 없는 얼굴을 망연히 쳐다보는 나를 두고, 마스터는 그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어둠에 녹아드는 양 얕은 발소리도, 그의 긴 로브 자락도 허공에 삼켜졌다. 모든 것이 소멸한 듯 정적만이 긴 꼬리를 남겼다. 아릿하게 심장을 파고드는 통증을 절감하며 난 떠올렸다가 삼켜버린 질문을 다시금 되새겼다.
왜…… 제게 관대하시죠? 내가 대체 당신에게 무엇이건대.
엘로힘의 말이 맞았다. 그는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이성적인 필요를 떠나서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지만, 틀림없이 마스터에게는 그래야 할 불가해한 당위가 있었다.
나는 그가 사라져간 그 어딘가를 어둠 속에서 짚어내듯이 길게 응시했다. 속이 활활 타들어 가다 못해 목이 메었다. 커다란 불덩이가 뱃속에 들어앉은 듯 홧홧했다. 나는 몸을 태우는 그 불길 속에 한참을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희망의 불씨조차 남김없이 타버리기를 기도하며-
그 후로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렀을 때, 닫힌 방문이 열렸다.
***
“몸은 좀 어떻지.”
낮게 깔린 음색이 어색하게 고막을 울렸다. 소리 없는 공간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마스터가 흘려 넣은 마력도 거의 소실되어, 몸에 힘이라곤 없었다.
“괜…찮아요.”
나는 애써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냉철한 시선이 처음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어설프게 발을 내딛는 나를 샅샅이 살피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난 어색한 다리를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등 뒤로 입을 벌린 방이 지옥의 입구처럼 느껴져서, 한시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다. 날 무디고 무디게 만들어, 잠식해버릴 듯한 공간이었다. 고통스럽진 않았으되 그 경험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방 밖으로 나오자 서서히 몸에 마력이 고이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빈 우물에 물이 차오르듯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에스겔이 날 흘낏 보고 중얼거렸다.
“실성하지는 않았군. 다행이야.”
“…저기 들어가서 미친 사람도 있나요?”
“미치거나 백치가 되거나, 아니면 후유증이라도 남았지. 글쎄, 시온이 저기에 들어가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가 말한 것들 다 내가 겪은 경험에 비하자면 수위가 강하다 싶었다. 그 정도에 미쳤다면, 차원의 공간에 갇혔을 때 이미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말을 뱉어내는 에스겔을 마주하자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가 변하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시간감각을 잃었다고는 해도, 몇 개월이나 지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얼마나 저기에 있었던 거죠?”
“보름.”
“…생각보다 길었군요.”
고작해야 일주일 남짓 갇혀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갸웃하니, 에스겔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견딜만했나 보구나. 보통은 시간이 가지 않는 걸 고통스러워하며 갇힌 기간을 서너 배쯤 부풀려서 느끼기 마련인데 말이다.”
내가 이세계의 사람이기 때문일까. 마스터가 도와주었던 탓일까. 그 둘 모두가 유력하나 무엇 하나 실토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난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어째서. 뇌리를 메아리치는 그 한 마디에 나조차도 답을 찾기 어려웠으므로.
“엘리야가 널 거기서 꺼내기 위해서 노력했다. 결국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따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서늘한 시선이 닿음과 동시에, 에스겔이 차갑게 내뱉었다.
“네가 한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는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아니요.”
순순히 걸음을 옮기던 난 단숨에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후회하지 않아요.”
그 파편이 스쳐 쓰라렸을지라도, 옳은 일을 했다는 그 하나가 내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에스겔은 내게 지그시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너 홀로 대가를 치른 게 아님에도?”
“…블레셋은 어떻게 되었죠.”
“사흘 밤낮을 고통으로 몸부림쳤지.”
가슴이 철렁했다. 머뭇거리던 난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은…….”
“블레셋은 벌을 많이 받아왔다. 그가 받은 형벌 중 가장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을 터. 녀석은 멀쩡해.”
에스겔의 비취색 눈동자가 시린 빛을 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가 받은 고통이 감해지는 건 아니다.”
질책하는 듯이 들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에스겔은 블레셋과 친분이 두텁다고 알고 있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개인감정을 떠나서, 나 때문에 블레셋이 고통받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할 만하다. 나는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렇겠지요.”
그러나 블레셋이 빚을 갚으려고 했다고 한들, 내가 그에게 갖는 죄책감이 무뎌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방관하는 것이라 괜찮을 줄 알았건만, 기드온에서의 임무는 나를 동반했을지언정 전적으로 블레셋의 소관이라 책임을 면하지 못할 거라고 차마 생각지 못했다.
…아니, 정말로 생각지 못한 것뿐이던가. 난 자문해 보았다. 그저 블레셋이 내게 빚이 있으니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무심함으로, 안일하게 넘겨버렸던 건 아닌가. 그가 무슨 일을 당한다고 해도, 그가 내 목숨을 위협한 일과 비교하자면 소소할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게 아니던가. 회의 섞인 의심이 신빙성 있게 찔러 들었다. 가슴이 따끔했다. 그 때문에 가책을 느낀 난 불쑥 말해버렸다.
“…블레셋은 제가 찾아가 보겠어요. 그는 아직 탑에 있나요?”
혹여 벌써 다른 임무를 받아 떠나갔을까 봐 묻자 에스겔이 묵직하게 긍정을 표했다.
“그래.”
“어디에 있는지도 말해줄 수 있어요?”
블레셋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내가 알 리 없다. 엘리야처럼 그를 찾는 이를 인도하는 마법이라도 있지 않은 한 나로서는 그를 찾을 방도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잠시 설명해보려던 에스겔은, 이윽고 친히 나를 블레셋에게로 안내해주었다.
============================ 작품 후기 ============================
으...오랜만입니다. 덥다. 더위에 찌들고 있어요. 이번챕터는 한두 편이면 끝날듯.
태양을 삼킨 꽃 완결권인 9권이 서점에 출간중입니다.
miyusky님 한유주님 퍼플케이브님 쿠폰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