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4 6. 형벌 =========================================================================
“…없습니다.”
요엘은 블레셋과 내가 공조했단 의심을 공적인 견해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추측할 만한 것이었다. 블레셋이 고개를 숙이자, 마스터가 손을 들어 올린다. 검은 동공이 품은 어둠이 확연히 짙었다. 그 느릿한 동작에 저 깊은 물밑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끔찍한 걸 보는 양 불길한 그늘이 나를 덮쳐들었다.
이세벨의 이야기가 떠오르며, 재가 되어 부스러져 내리는 블레셋의 모습이 아찔하게 머릿속을 점령한다. 나 때문에 그가 죽기라도 한다면-
“제 독단이었어요!”
생각한 겨를도 없이 날카롭게 튀어나온 내 목소리가 고요한 대기를 갈랐다. 그러나 무의미했다. 무형의 힘이 가로막고 선 나를 뛰어넘었다. 블레셋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그는 무릎 꿇은 채 경련하며 바닥을 긁었다. 하얀 로브가 엉망으로 구겨지며 눈에 핏줄이 섰다. 지독한 고문을 당하는 듯이 반응을 내보이는 블레셋을 목도한 난 얼어붙었다.
두려웠다. 급속도로 피가 빠져나가는 양 온몸에 한기가 고이고, 손끝에 바르르 떨린다. 그저 한없는 공포.
“그의 임무였으니, 그의 책임이기도 하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그 음성이 심장 소리를 키운다. 가쁘게 펄떡이는 박동 때문에 귓가에 열이 오른다. 고막이 파열할 것 같다.
“엘리야.”
“예, 마스터.”
“네가 말해보아라. 탑을 거역한 죄인에게 어떤 형벌이 적합할지.”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고르는 양 여상하기 짝이 없는 투. 그래서…… 그 무정함이 더 사무쳤다. 공포에 절어 감각 없는 심장에 찌릿한 통증이 인다. 나는 저 사람에게 무얼 기대했지. 가능성 없는 핑크빛 꿈에 젖어있기라도 했나?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흩날리는 파편이 날을 세워 박혔다. 위가 쓰라렸다.
배신감, 혹은 실망. 그 우습고 헛된 감정이 날 상처 입히고 있다는 게 용납이 되질 않았다. 멋대로 그를 좋아한 내 어리석음을 비웃듯, 속이 고통스럽게 뒤틀렸다. 배신당한 것도 아닐진대,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뭐며 저미듯이 심장이 아픈 건 왜지?
그 반문은 즉시, 비아냥거림으로 돌아왔다.
현실을 바라봐, 네가 뭐라도 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에게 난 고작 도구일 뿐이야……. 그리고 이제는, 그보다도 못한 죄인에 불과한데.
지목당한 엘리야가 나직이 의견을 꺼내었다.
“…아직 임무를 수행하기에 아힌은 어리고 미숙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진바 힘을 앗고, 근신하게 하심이 어떠한지.”
엘리야가 신중하게 토로한 방책은 내 귀에도, 관대하기 짝이 없는 처분으로 들렸다. 마스터의 냉랭한 말소리가 뒤이었다.
“네게 하찮은 자비를 베풀라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탑에 소속된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참작하시어-”
“그러하기에 살려두는 것이다.”
적어도 죽이지는 않겠단 소리로 들려, 난 퍼뜩 마스터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일은 일대로 친 주제에 삶을 갈망하는 이 진저리나는 본능이라니.
“규율을 어겼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의 곁에서 머물렀던 시간 따윈 단숨에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그 시선. 거기에 담긴 감정 없는 무기질적인 암흑이 날 멈췄다. 배를 침몰시키는 태풍이 가책을 느끼지 않듯, 그는 그저 재해와 같았다.
그리고 이내, 나에 대한 처결이 마스터의 입 밖으로 떨어졌다.
“에스겔, 죄인을 형벌의 방으로 데려가라.”
“가혹한… 벌이라고 생각됩니다.”
잠자코 있다가 나선 란델의 말에 마스터가 차갑게 내뱉었다.
“네게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위압감을 담고 에스겔에게 박혔다. 독촉의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에스겔은 침중한 눈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내 팔을 붙잡았다. 누구도 그 과정을 제지하지 못했다.
난 멍하니 그에게 이끌렸다. 앞으로 나아가는 다리는 조종당하는 양 감각이 없었다. 난 각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각오는 까끌한 돌 바닥에 쓸리듯 마모되어 지금 여기서, 흔적도 없었다. 단단한 의지라 믿었던 것도 결국 두려움 앞에서 초라해질 뿐.
형벌의 방. 급진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내게 그 섬뜩한 단어는 남 일처럼 느껴졌다. 애써 생각을 피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잡힌 손목이 아릿했다. 에스겔이 날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되뇌었다.
“이리 두려워할 거면서, 어떻게 마스터를 거역할 생각을 했지.”
난 그제야, 사시나무처럼 내 몸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취색 눈이 그림자가 드리운 양 짙다. 에스겔은 필경 날 한심하다고 비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듯이 걸음을 늦추었다.
“저는… 눈앞에 있는 것밖에 못 봐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물음에 답한다기보단,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다.
“네 목숨은 여분이라도 가지고 있나? 네 충동적인 판단이 너를 죽일 수 있어.”
“이번에는 아니겠지요.”
난 확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저는 어떻게 되나요.”
“죽지는 않겠지.”
건조하게 돌아오는 회답에 나는 내가 가게 될 곳, 당하게 될 일이 어떤 거냐고 물으려던 말을 삼켰다.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알게 되는 게 무서웠다. 컴컴한 동굴 안을 걷듯 가는 길은 어두웠고 머리 위로 희미한 빛만이 드리웠다. 탑의 어느 곳을 걷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 도망치려고 시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저항 없이 따랐다.
에스겔이 멈춰 섰을 때, 우리는 작은 문 앞에 서 있었다.
통짜로 된 벽에 가져다 붙인 양 덩그러니 놓인 문의 형상은 내게 한없이 불길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 너머에 생지옥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돋을 새김된 문은 어떤 기색도 내지 않고 잠잠했다. 마력을 품고 있되, 고요하게 내재되어 있다.
에스겔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형벌의 방에서 너는 고독과 어둠 속에 홀로 갇힐 것이다.”
“…….”
“육신은 멀쩡하겠지만, 정신은 벌레한테 파먹히는 듯이 좀먹고 사지의 감각은 사라지겠지.”
그가 하는 말이, 내 귓가를 스멀스멀 잠식한다.
“최악의 상상만이 반복되며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듯하고, 한 호흡이 영원처럼 느껴질 터.”
저주라기엔 덤덤히 말을 이어가며, 에스겔은 문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옆으로 밀려나간다. 뻥 뚫린 어둠이었다.
“마스터가 너를 꺼내라 명하실 때까지, 너는 이곳에 있게 될 것이다.”
괴물의 쩍 벌린 입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양 느껴졌다. 줄곧 팔을 붙들고 있던 굳건한 손이 파랗게 굳은 날 빠르게 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버티려 몸에 힘줄 새도 없었다.
“경고하건대 너 스스로를 지켜라.”
그 말과 함께 나동그라진 내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그리고 오직 암흑이 깔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흘러가는 시간을 가늠할 길이 없는 그 차갑고 적막한 공간에서 나는 몸을 뉘이고 있었다. 이곳은 별빛 한 줄기 없는 외떨어진 하나의 우주였고, 블랙홀이었다. 난파선의 선실에 갇힌 양 나는 이 대해에서 모든 게 끝나기를 기다리는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밀도 높은 대기는 물 먹은 듯이 전신을 무겁게 만들어 힘을 앗아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정신을 마비시킨다. 식물인간이 된 것처럼 난 한 발짝도 움직이지도, 심지어 기는 것조차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촉각이 살아있는 손끝으로 더듬어 이곳을 재어보려 애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평평하여 고르다는 감각은 있되, 바닥은 짚이지 않는 구름이었다. 단단한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이 손이 파고들지 못했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듯도 하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부유감이 없다.
가로로도 세로로도 무한히 뻗어있되, 정작 난 제자리에서 조금도 이동하지 못했다. 웅덩이 위를 맴도는 나뭇잎이 된 듯하여, 그 정체된 표류는 날 숨 막히게 한다. 좁은 공간에 오래 갇혀있으면 폐소공포증을 느끼게 되듯이, 그 무기력함은 공포로 화할 듯이 나를 침식해갔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암흑 속은 아이러니하게도 곧 붉은 눈의 괴물이라도 나타날 듯이 긴장감을 자극한다. 생명력을 서서히 빨아들이는 양 스산함을 머금고 있는 대기며 고독한 이 아공간은…….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난 문득 깨달았다. 마스터와 만나기 이전, 내가 갇혀있었던 그 차원의 틈새가 이와 유사한 느낌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의 상황과 지금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여태껏 익힌 마법이 모조리 무용지물이었기에. 혈관째로 굳어버린 양 마력의 흐름이 멈춘 이곳에서 난 나를 위한 촛불처럼 작은 불빛도 불러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전이었다면 미쳐버리고도 남았을 법한 이 완벽하고 단조로운 칠흑빛 세상을 나는 꽤 침착하게 견뎌내고 있었다. 벌레가 심장을 갉아먹는 듯한 공포심도 몸을 움츠리게 할망정 비명을 지를 만치 끔찍하지는 않았다. 그건 순전히 내가 그보다 두려운 어둠을 겪어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막연히 느낄 수 있었던 건, 내게 비관적이고도 참담한 심상을 심어줄 부(不)의 속성을 띤 이 암흑이, 내 전신을 지배할 듯이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정작 조금도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보호받고 있는 것처럼.
그 문장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나는 란델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가 행한 정신계 마법은 내 안에 설치된 무언가에 가로막혀, 내 머릿속을 헤집지 못했지. 마스터가 행한 일이라고 했어. 그게 아직도 유효하단 말인가.
그 보호의 잔재가 은은한 빛처럼 나를 밝혀 주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서, 누구도 내 비밀을 캐낼 수 없도록- 마스터는 그가 행한 마법을 남겨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도 이 형벌의 방에서 모든 정신적 간섭을 배제하는 효력을 어김없이 발하여, 내 정신을 지켜내고 있었다. 벌을 내린 건 그인데, 그의 안배가 날 지키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잠들어 이 형벌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빨리 스쳐 보내고 싶었지만, 사지를 누르는 이 거북스러운 감각이 그것까지는 내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 편하다면 벌이 되지 못할 것이니.
…만약 내가 차원의 틈새에 갇혀본 적이 없었더라면, 그 고통스럽고 외로운 상태로 그저 움켜쥔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서서히 생을 잃고 죽어가는 걸 실감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걸 무척 괴롭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무력감, 아무도 모를 곳에서 고립된 채 싸늘한 시체로 남게 될 거라는 두려움.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였다. 맨정신을 유지하며 버텨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눈을 뜨고 있는 건 무의미했다. 눈꺼풀을 굳게 닫자, 그간 여유가 없어서 떠올리지 못한, 혹은 피하고 있었던 상념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그건 추억이라 이름 하는 것이었다.
부모님과 언니, 남동생, 우리 가족……. 친구들, 학교. 이곳에서의 삭막하고 모호한 인연과는 다른, 따스하고 온정 넘치는 그 모든 것들.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일상일지언정 평화롭고 안온했다. 그게 얼마나 가치 있는 건지 몰랐었다. 잃기 전에는 소중함을 모르는 평범한 어리석음.
나는 어느덧 내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꺼풀을 비집고 샘솟은 뜨거운 눈물이 눈가를 적신다. 내가 남겨두고 온 이들이 사라진 나를 그리워하고 찾고 있기를 바랐다. 내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독히도 간절하였다. 나를 잊지 않는 그들이 나를 다시 그리로 끌어당겨 줄 것처럼-
그제야 난 내가 이제껏 이 낯선 세상을 온 힘을 다해 견뎌내고 있었단 걸 자각했다. 그게 가장 힘들고 고된 과정이라, 고작 이런 곳에 갇히는 형벌 따윈 그에 비하자면 미미하단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