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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83화 (83/155)

00083  6. 형벌  =========================================================================

사지에서 빨려나간 마력이, 우물물이 샘솟는 양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음은 마력의 방전 탓이었기에, 새카맣게 깔린 의식에 부싯돌이라도 맞부딪히듯 자잘한 불꽃이 일었다. 미약하게나마 의식은 밝아졌으되, 거의 온몸의 힘이 다한 난 노인처럼 쇠약하여 손가락 까닥할 힘도 없었다. 빨대를 꽂고 쪽쪽 수액을 빨아간 나무처럼 시들시들한 무기력함이었다.

그보다 더 기력이 살아났을 때, 나는 비로소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엘로힘은…… 무사히 날아갔을까. 설마, 일이 다 끝났는데 그를 어떻게 하진 않았겠지.

그리고 그가 당했을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서 생각하기 이전에, 나 자신 먼저 걱정해야 한단 걸 곧 깨달았다. 맙소사, 정말 내가 일을 쳤지. 그래, 친 거야.

하지만 일을 치기 이전에 오래 망설였을망정 굳건한 마음이, 새삼 후회로 돌변하지 않는 걸 보면 내 생각보다 난 소신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적어도 아직은, 후회가 찾아오진 않았다.

다만 두려웠다. 죽지는 않을지언정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빌만한, 일전에 겪은 고통을 상기하자 으슬한 공포가 밀려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이 이내 나를 깨웠다. 실로 눈만이 떠졌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백색 옷자락이었다. 그리고 내 윗가슴께를 짚고 있는 하얀 손. 흐릿한 정신이 몸서리치듯 맑아지며 모든 감각이 순식간에 깨쳐졌다.

“정신이 드나?”

성추행범치곤 당당하고 고아한 낯이었다. 곧바로 거두긴 했지만 조금 전까지 그의 손 위치가 부적절했다는 걸 지적하려는 찰나,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고막을 찔러 들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요엘.”

“보아하니 멀쩡하신 듯하군요. 이렇게 큰일을 벌이시다니, 진정 제정신이십니까.”

혀에 칼이 배인 양 날카로운 투였다. 처음부터 쌀쌀맞게 굴었긴 했지만, 각오한 이상으로 그의 태도는 가장된 정중함을 벗어버린 채 매몰찼다. 나를 직시하는 시선 끝이 유리조각처럼 파고드는 듯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을 피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책임을 물을 분은 마스터시다. 내가 건방진 태도를 삼가라 했지?”

“블레셋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붙잡아 두신다 싶더니, 시온 두 분이 공모하셨는가 보군요.”

그에게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하고 싶지 않았기에 난 황급히 변호했다.

“블레셋은 상관없는 일이야.”

“상관없는?”

비꼬듯이 반문한 요엘이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투명한 아쿠아마린 색 눈동자가 차가운 분노에 흡사 빙하처럼 파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죄라도 나누어지시는 편이 나을 텐데요? 사태가 이렇게 되어서 홀로 감당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다니?”

엘로힘은 떠났고, 빙정은 사라졌을 터. 요엘의 말은 마치 그 이상의 무슨 사건이 생겼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에 블레셋이 화답했다.

“네가 빙정을 녹이는 순간, 마탑과의 연결이 끊겼다.”

“네?”

“정신을 잃을 만치, 무식하게 마력을 쏟아 부었지 않습니까. 덕분에 불새는 마탑의 마력을 흠뻑 받아들여 손쓰기 어려울 만치 자라나서 훨훨 날아갔지요.”

“네가 과도한 마력을 가져다 쓴 탓인지, 나와 요엘 또한 마탑의 마력과 한동안 단절되었다.”

놀라운 내용에 눈을 휘둥그레 떴던 난 블레셋이 그리 확신하는 투가 아니란 것을 눈치채었다.

“확실한가요?”

“그래, 다만 원인이 너인지는 분명치 않아.”

“그게 아니면 원인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요엘이 단칼에 반박했다. 블레셋은 그의 무례를 질타하는 것도 질렸는지 잠자코 뇌까렸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의혹을 담은 음색은 어딘지 말미가 무거웠다. 그에 덩달아 나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마력 사용에 있어서 정도를 잘 조절하지 못한다는 건 자명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탑의 마력은 무한에 달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런데 그 말은-”

죄책감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궁금한 게 먼저였다.

“개인의 역량이 문제가 아니라, 가져다 쓸 수 있는 마력에 한계가 있다는 소리처럼 들려요.”

마탑의 힘을 의심하는 말이었다. 요엘의 눈이 한층 더 싸늘한 빛을 띠었다.

“이례적인 일입니다. 예상치 못한 지역에서의 과다한 마력수요 때문에 탑에서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걸 수도 있겠지만, 임무 중에 다량의 마력을 쓸 만한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은데요.”

“마력사용을 강제로 제재한 적은 처음이군. 본인의 역량을 벗어나는 마력을 끌어왔다간 자연스레 과부하가 걸려서 제재되기 마련인데, 그조차 개인에 한한 일이야. 당사자가 아닌 다른 마법사도 마탑의 마력을 쓸 수 없다니? 내가 아는 한 이런 일은 없었어,”

문득,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내 반응을 발견한 블레셋이,

“짐작 가는 게 있나?”

라고 묻자 난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실은 짐작…가는 구석이 있었다. 과도한 마력 수신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나, 그걸 행하는 게 나라는 게 전해졌다면. 그 즉시 아예 이 인근으로 공급되는 모든 마력을 끊어버렸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마스터에게 부탁했으니까. 나를 도와 달라고. 그리고 거절당한 내가 그를 거역할 가능성을, 마스터가 고려치 않았을 리 없다. 이곳 기드온에서 대량의 마력을 끌어다 쓰는 존재가 블레셋이나 요엘이 아닌 나라는 걸 깨달았다면, 뒤늦게라도 잘라냈음 직하다.

육체적으로 압박적일망정 버틸 만은 했는데, 마지막 순간 내 급속한 마력의 소진은 그 탓인가? 그래서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던가.

꿈에서 마스터를 만났던 일까지 고해도 좋은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침묵한 채 몸을 일으켰다. 삐거덕거리는 몸으로 힘겹게 균형을 잡고 일어선 난 그제야 여기가 엘로힘을 떠나보낸 동굴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온통 얼어붙어 있던 빙벽이 모조리 녹아, 그 물기까지 증발해버렸단 것도. 얼음 아래 가려져 있던 반들반들한 검은 벽면과 몸 주위를 휘도는 온화한 대기가 감흥을 되살렸다.

내가 정말로 해냈구나. 기드온을 녹인 거야.

무언가 가슴을 찌르르하게 울렸다. 죄책감과 뒤섞인 성취감이, 미약한 반항심과 뒤섞여 속에서 번져나갔다. 비록 마스터를 거스르는 일일지라도, 난 해야만 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스산한 속삭임은 그 단단한 결의에 흠집을 내지 못했다.

그건 당위에 가까운, 옳은 일이었다. 그리고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책만 느끼는 무력함보다 무언가를 하는 반역 쪽을 택했다.

나는 그들을 쳐다보며 침착하게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어쨌든 돌아가요. 내가 받아야 할 벌이 있다면, 받아야겠지요.”

내가 긴장을 풀기 위해 떠올릴 수 있는 건 마스터가 못난 제자의 뺨을 휘갈기고 찬물을 끼얹는 드라마틱한 상상 정도였지만, 그 상상과 마스터는 퍽 어울리지 않았다. 우습다기보다는 괴기한 느낌에 난 그 잘 그려지지 않는 이미지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어 블레셋과 요엘이 투닥거렸기에, 그 폭력이 동반되지 않은 언쟁에서 완전히 소외된, 그러나 사건의 주범인 난 모든 것에서 동떨어진 양 비현실감마저 느껴졌다. 그렇기에 불안감이 나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동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인영에 끔찍한 형태의 괴물이라도 목도한 양 얼어붙었다. 덜컥, 소리를 내며 하강한 심장이 땅과 충돌하는 듯했다.

…마스터는 아니었다. 그였다면 난 필경 본능적으로 등을 돌려 동굴 안으로 질주해 들어갔을지도.

그자였다. 마탑에 오기 전, 여관으로 찾아들었던 회색 망토의 살인마. 스스로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죄지은 것 없이 살인마를 만나게 되어도 두려울 것이지만, 찔리는 게 있는데 만나게 된다면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은 듯이 느끼리라.

복면을 쓴 그자의 시선이 내게 꽂힌 순간, 난 등골이 오싹하다 못해 온몸에 소름이 번졌다. 그의 등 뒤로 솟은 대검의 손잡이가 눈에 유독 크게 박히며, 재산을 탕진한 양 모조리 쏟아 부은 마력이 지독히도 아쉬워졌다. 느슨해진 신경을 나사처럼 죄게 할 만한 존재감이었다.

설마, 내게 내려진 처분은 즉결처형인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정지한 와중에, 가로막듯이 내 앞에 손을 뻗은 블레셋이 그를 불렀다.

“유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블레셋의 굳어진 낯빛에서 경계하는 기색이 풍겼다.

“여기는 어쩐 일이지?”

“탑주께서 즉각, 호송하라 명을 내리셨다.”

명료하되 낮은 저음이었다. 그의 눈길이 도주를 꾀하는 죄인을 의심하는 양 나를 주시한다. 훅 끼치는 바람처럼 흠칫 거리게 하는,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이 섬뜩한 눈길로.

유귄이라고. 난 이내 그가 마스터를 마스터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치미는 궁금증을 해소할 여유는 없었다.

“가시지요.”

요엘이 도주로를 차단하듯 내 다른 옆에 서자 위압감을 발산하며 유귄은 발을 내디뎠다. 그는 분명, 마법사가 아니었고 내 쪽으로 급격히 거리를 좁힌 그가 손을 쑥 뻗었다. 날 거의 물러설 뻔하게 만든 그 손에서 검은 구가 뚝 떨어져 내린다. 삽시간에 거기서 뻗어 나온 어둠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방이었다. 검은 하늘을 가르는 별의 긴 꼬리처럼 수많은 금빛 선이 온통 새카만 석면으로 이루어진 벽에서 가로 세로로, 혹은 나선과 직선으로 질주하며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냈다. 그 불가사의한 광경이 신비롭다기보다는 아득한 심해를 들여다보는 듯이 기괴하게 느껴져, 난 몸을 움츠렸다.

밀도 높은 마력으로 가득한 기이한 장소였다. 희미한 빛만이 안개처럼 어린 가운데 세 명의 시온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엄숙하도록 차분한 낯빛이다.

엘리야, 에스겔, 란델……. 그 셋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건 내가 보는 한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그 처음은 내게 색다른 감상을 넘어 거리낌과 유사하게 와 닿았다. 요엘과 블레셋, 그리고 유귄이라 불린 남자가 비껴나가자 난 심판대에 오른 죄수처럼 홀로 서 있게 되었다.

차마 눈길을 더 뻗지 못하고 바닥을 보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 분위기도, 저기 서 있는 시온들도, 내가 치러야 할 대가도 아니다. 그저, 나는……. 그의 앞에 서는 게 두려웠다. 그 공포는 맹목적인 절대였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담았다. 눈덩이 굴리듯 점점 부피를 부풀리던 공포는 제가 기인한 대상과 마주한 즉시 정점에 이르러, 그 이후로 잦아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게 정점은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사납게 뛰는 맥동에 경련할 만치 호흡이 조인다.

심연 속에 도사린 죽음처럼 마스터가 거기에 있었다. 높은 단상 위에 정좌한 마스터는 적어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무심한 얼굴로 기꺼이 날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이였다. 방안에 드리운 은은한 빛도 그의 주변에 이르면 블랙홀 안으로 빨려가는 듯, 공허한 어둠만이 번졌다.

그 앞에서 아이처럼 울면서 무릎 꿇고 싹싹 빌지 않는 내가 용했다. 마스터가 이 자리에서 죽음을 명한다면, 나는 죽을 것이다. 그건 내가 뒤집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로힘이 한 말만이 위로처럼 내 안에서 되풀이되었다.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넌 죽지 않을 거야.]

하지만 죽음보다 끔찍한 삶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있을진대 어찌 그걸로 안심할 수 있을까.

“보고하라.”

무감한 목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절대적인 명령. 자격을 잃은 블레셋을 대신해 요엘이 나섰다.

“요엘, 보고 올립니다.”

경외가 숨김없이 드러난 얼굴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그가 내게 보인 적대감과는 별개로, 마탑인답게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진실만을 서술했다. 마스터의 시선이 블레셋에게로 꽂혔다.

“부인할 내용이 있느냐.”

============================ 작품 후기 ============================

이 소설이 쫌 공포물스러우니 여름엔 딱인듯(...)

조만간 또 올게요 날이 참 덥군여 후덥후덥 더위 조심하시길!

쿠폰 주신 킨뿌뿌님 퍼플케이브님 종이사슴님 에블링님 Sun_Pk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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