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2 5. 탑의 계약. =========================================================================
“그럼 내가 요엘을 붙잡아 두지.”
적극적인 공모자처럼 그리 내뱉은 블레셋이 등을 돌리고 사라진 뒤 결심에 이르기까지, 난 미적거리며 불분명한 속에서 산 속을 떠돌아다니듯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내딛던 발길이 돌부리에 걸리듯 퍼뜩 무언가가 스친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 그게 돌연 깨달음이 되어 물감처럼 번졌다.
그건 올곧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내가 마스터를 두려워하고 있기에, 오로지 그 두려움만이 장애가 되는 것처럼 다른 무엇도 생각지 않고 있다는-
내가 엘로힘을 돕고자 했던 그 모든 건 내 속에 뿌리를 깊이 뻗은 가치관 때문이었고, 나는 그게 틀림없이 옳은 일일 거라고 믿었다. 성주에 대한 반감이 눈에 어두워서가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당위가 있었다. 그러나 과정에서의 한 가지 절차가 빠져있다면, 과연 나는 내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즉 이것이다. 내가 옳다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이곳 기드온의 일에 대해서만 그럴 게 아니라 응당 마스터에게도 옳아야만 했다. 단순히 그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난 일을 저지르기 이전에, 마스터에게 도움을 구하고 의논해야만 했다. 그게 마스터가 이제껏 내게 해준 것에 대한 공정한 응대였다.
마스터께 잘 말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면, 블레셋은 소용없을 거라고 단칼에 자르며 내 의견에 결코 동조하지 않겠지. 오히려 그가 기껏 준 기회를 망치려 한다며 인상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시온이 가혹한 이라 말하는 마스터는 항상 내게만큼은 관대했다.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샤자한에서도 어김없이 필요한 지식을 주며 내가 뜻대로 행동하게 해주지 않았던가. 그때의 일과 지금과는 마탑에서 감수해야 하는 손해가 다르다고는 하나, 그 어떤 이유를 붙여도……. 필경 그게 거쳐야만 하는 절차라는 결론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또한 옳은 일이었으므로, 난 도망칠 수 없었다.
내가 언제 바른 생활 어린이처럼 살았다고. 입술을 씹으며 불평해 보고, 반려의 여지가 없나 고심 해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는 점점 더 확고해져 갔다. 그리고 난 마스터를 만나러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꿈속에서.
성으로 돌아가선 안 돼. 요엘이 있을 테니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잠들만한 은밀하고 안전한 장소, 그게 어디일까?
잠시 주변을 둘러본 난 바닥이 퍽 푹신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도 그럴 게, 눈이 쌓여 있었던 탓이다. 어차피 내가 입고 있는 로브는 추위를 막아주니, 눈 쌓인 위에서 잠들어도 등이 시리지는 않으리라. 몇 걸음 옮겨 나무에 가려진 자리로 이동한 난 거기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끔 결계를 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반듯이 드러누웠다.
……이런 곳에서 잠들어보는 건 처음이다. 수면마법을 걸자 이내 졸음이 몰려들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되는 기분이었지만, 바늘에 찔려 잠든 그녀는 그 순간까지 한가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조급했고, 잠들면서도 단단히 하나의 목적을 품고 있었다. 마스터를 만나야 한다는 걸, 의무에 젖어 입속으로 중얼거리던 난 곧 까무룩하게 저편으로 꺼져갔다. 익숙한 무의식의 감각이었다.
공중에서 한없이 하강하는 양, 아래로 치닫는 느낌은 아찔했다. 허우적거리다가 물에 잠기듯 먹물처럼 새까만 심연에 푹 파묻혔을 때, 나는 불현듯 몸서리치며 눈을 떴다. 꿈에서 눈을 떴다고 표현하기는 이상하지만, 실제로 나는 깨어나는 것처럼 느꼈다. 잠든 새 이동해, 어떤 외딴 장소에 떨어진 듯이.
그리고 나를 감쌌던 심연과 똑 닮은 검은 옷자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지독히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치달아, 전류가 흐르듯 전신의 신경을 일깨운다. 도무지 태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볼 수 없어,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를 찾은 이유가 무어냐.”
그 여전한, 차분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흐른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 한 마디에 심장이 떨렸다. 아니, 몸이 떨렸다. 그가 내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알려주듯이. 난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질 않는다. 그간의 도피가 헛된 것이었다고 질타하듯 그의 존재감이 매섭게 파고들었다.
참 웃기는 꼬락서니다. 난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지? 이대로라면 마스터가 알고 싶지 않아도, 내가 그를 좋아한단 걸 알아차리지 않겠는가. 두려움이 사랑과 반응이 유사하여 내가 줄곧 그를 두려워했단 게 방패막이 되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이다. 나는 결국 쥐어짜다시피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했다.
“청…하고 싶은 게 있어요.”
“네 임무에 대한 명령은 이미 내렸다만.”
자르듯이 떨어지는 그 목소리가 날 내치는 듯하였다. 난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힘껏 몸을 일으켜 몸을 바로 세웠다. 내가 원하는 바를 관철하려면, 당당해져야 하므로.
“그래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이렇게.”
마주한 그는 멸망처럼 짙은 암흑이 담긴 두 눈으로 날 주시하고 있었다. 금빛 나뭇가지를 등 뒤에 두르고 선 그의 어둠은 더욱 짙었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더 깊어지듯, 한없이 검었다.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요엘에게 말했던 내용을 그대로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내 음성은 쇠잔하여 생기를 잃은 채, 가느다란 물길처럼 흘렀다. 마스터와 요엘은 달랐고, 그의 앞에 서자 내 자신감이며 확신은 그에게 모조리 빨려 들어간 양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 깊은 우물 같은 눈이,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물밑을 들여다보듯이 섬뜩하였다. 그 안에 끔찍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난 압박감에 사로잡힌 채 끝끝내 결론을 발했다.
“……마스터라면 방법을 아실 거라고 믿어요.”
단 하루 만에, 빙정을 제어할 수 있는 그 고난도 결계를 만들어내는 방법. 실제로 그게 가능한지도 알지 못한 만큼 그런 믿음 따윈 없었지만, 난 그를 숭배하는 양 호소했다. 그러나 마스터는 내 그런 얄팍한 수작에 흔들릴 만큼 허영심 있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잘라 말했다.
“네 말이 얼마나 가당찮은 소리인 줄은 알 것이다.”
“…이제까지 늘 도와주셨잖아요. 이번에도-”
“내가 이제껏 너를 도운 건.”
내 미약한 항의에 마스터는 서늘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
“또한 손쉬운 일이었지. 이번과는 다르게.”
영점까지 떨어지는 듯한 그 싸늘한 거절에 피부가 시리고, 심장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내게는 그런 번거로운 일을 벌여야 할 필요도, 손해를 감수해야 할 필요도 없다.”
기대했던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음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단정으로 맺어진 그 틈 없는 논리를 마주하며, 두려움을 비집고 반감이 솟았다. 그에게 말하지 못하고 언제나 속에서 눌러 삭였던, 그러나 언젠가 부딪혀야 할 거라고 여겼던 그것이 치밀어 오른다. 걷잡을 수 없는 충동으로.
“필요가 아닌 다른 이유로 움직이실 수도 있잖아요.”
이번만큼 똑바로 마스터를 쳐다보며 말한 적이 없었으리라.
“마스터는 마탑의 주인이세요. 저는 그 힘을 재어보지 못하지만, 아마도 무엇이든 하실 수 있겠죠, 그런데 왜.”
왜, 그 물음이 속에서 다시금 울리며 목이 메었다. 답답한 마음이 가슴을 조여, 나는 성급히 물었다.
“옳은 일을 하시지는 않나요?”
힘을 가진 사람이 항상 옳은 일을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마스터는 가진바 힘을 휘두름에 있어서 악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마스터가 내 설득에 응해주기를 바랐다. 그 마음이 간절하도록 강렬하여 속이 타들어 간다.
내가 마스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해주기를 바라니까. 내가 좋아하는 이가 그릇된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니까. 다정스럽지 않더라도, 사람을 죽였더라도 변할 수 있기를 바라니까. 그가 악인이 아니게 되기를 바라니까. 그래야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용납할 수 있으니까!
폭풍이 나를 휩쓸고 있었다. 그 모든 바람이 한데 뒤섞여 험난하게 휘몰아친다. 마스터를 좋아하지 않기로 한다는 이성적인 선택지는 혼란한 와중에도 고려되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도 마치 내 세포 하나하나가 귀를 기울이듯, 마스터의 말만큼은 똑똑히 들려왔다.
“인세에서 옳다고 말해지는 일은 내게 의미가 없다.”
“…마스터.”
“분명히 말하건대 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 그 또한 내게 의미가 없다.”
침음을 내뱉는 나를 마스터는 그 검은 눈으로, 허공을 스치는 하찮은 먼지를 바라보듯 다만 그렇게 응시했다. 정말로 그의 말처럼, 아무 의미도 담지 않은 눈길이었다.
“기억하라. 네가 내게 종속된 몸임을.”
그 말이, 흡사 비수와 같았다. 아니, 차라리 창살로 관통당하는 느낌이다. 그게 내가 그의 종이고, 그 이상은 될 수 없다고 선고하는 듯하여, 그저 통증만이 느껴졌다. 눈앞이 아찔했다.
“명한 대로, 임무를 마치고 내일 귀환하라.”
그리고 나는 단숨에 꿈으로부터 내쳐졌다.
***
퍼뜩 몸을 일으키니, 축축해진 눈시울에서 뜨끈한 물기가 뺨을 따고 흘렀다. 가슴이 아팠다. 가슴이 찢기는 것 같다는 표현을 난 몸으로 생생히 느끼고 있었다. 실연을 당한, 그래……. 딱 그런 기분이다. 실제로 고백을 한 적도 없으면서.
난 자리에서 일어서 몸을 곧추세웠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우는 건 나중에. 내 기대는 배반당했고, 눈가는 젖어 있었고, 스스로 추스를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그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건 미룰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일을 해결하려면 내겐 오늘밖에 시간이 없었다.
블레셋이 요엘을 붙들어가며 만들어준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스터가 내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순순히 모든 걸 놓아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토록 얕은 마음이 아니었고, 나도 꽤 고집쟁이였으므로.
난 곧바로 엘로힘을 향해 마법을 펼쳤다. 깔끔한 공간 도약으로 난 불새의 알이 깃들어 있는 동굴에 도착했다. 성큼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서면서 난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결국 네가 말한 대로 되었네.”
가장 간결하되, 피하고 싶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방도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벌을 받으면 아플까? 전에 블레셋이 마스터에게 모종의 벌을 받을 때에는 굉장히 아파 보였지만……. 마스터가 처음에 내게 마력을 전달한다는 명목으로 했던 짓을 떠올리면, 그 이상의 고통은 아니리라. 애써 그렇게 위안 삼으면서도 가슴이 불안으로 두근거렸다.
이내 목적지에 도달해, 거대한 알을 앞에 두고 발길을 멈추자 불새의 환영이 허공에서 일렁이며 나타나 내게 말을 걸었다.
[결심한 거야?]
[그래.]
엘로힘은 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마워.]
…뜻밖의 말이라, 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하도 뻔뻔하게 굴길래 감사의 인사를 할 줄은 몰랐는데. 난 쑥스러운 기분을 티 내지 않으며 곧바로 본론에 접어들었다.
[내 마력을 받아들이면, 부화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네가 줄 수 있는 마력을 나로서는 가늠하지 못해. 하지만 마탑의 마력을 통한다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어차피 내 본신의 마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알에 손을 올린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저 먼 우주를 향해 손을 뻗듯이 의식을 육체에 깃든 영적인 영역으로 돌려, 근원으로 향했다.
의식의 세계로 본 근원은 기이하게도 아름다웠다.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처럼 지독하게 찬란한 빛의 근원은 꿈에서 본 금빛 숲과 같은 신비로운 빛살을 내뿜고 있었다. 마스터의 어둠을 의식했기에, 그 근원이 필경 무저갱과 같을 거라고 여겼던 난 예상을 뒤엎는 정경에 일순 넋을 잃었다. 그러나 이내 본능이 나를 인도하였다.
난 길을 열었다. 그건 실로 열었다고 표현할 만하였다. 그 가상의 연결, 그 길을 통해 무한한 힘이 나라는 작은 통로를 거쳐, 내 손을 타고 엘로힘에게 빨려들듯이 깃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거대한 마력이 내 몸을 부수지 않도록 최대한 집중하여 통제해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났을 때, 나는 손을 떨구었다. 어쩐지 손끝이 뜨거웠다.
몇 걸음 물러서자 이내 쩌적 하는 소리가 들리고, 껍질이 부서져 나간 알 속에서 더 이상 환영이 아닌 엘로힘이 날개를 펼친다. 불길로 이루어진 듯이 이글거리는 날개며 우아하게 뻗은 부리, 그 당당한 자태에 눈이 부셨다. 성화(聖火)처럼 화려하고 성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온화한 열기가 이 동굴 안을 따스하게 적시고, 빙정이 사라진 기드온을 녹이고 있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해냈구나. 입안으로 읊조리며 모든 마력이 소진된 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무엇도 할 기력이 없었다. 몸이 기울어 바닥에 닿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옅은 성취감과 우려 속에서도 나는 저항할 수 없이 빠르게 의식을 잃어갔다.
그런 내 귓가에 떠나가기 전 엘로힘의 마지막 말이 흘러들었다.
[잊지 마.]
[…….]
[떨어진 별은 대지를 사르게 되어 있어. 너는 모든 걸 바꿔놓을 수 있는 존재야.]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겨를도 없이, 시야가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 작품 후기 ============================
챕터 종료. 여기까지는 우선 보여드려야할 것 같아서.
다음편은 태양을 삼킨 꽃 외전을 끝내는대로....혹은 어느 정도 진전을 보는대로 가져올게요. 1/3쯤 썼어요.
다음 챕터의 이름은 형벌의 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