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달무리 금빛 숲-81화 (81/155)

00081  5. 탑의 계약.  =========================================================================

그저 요엘에게 태클을 걸고 싶었던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닫는 블레셋을 대신해 내가 나섰다. 성주에게 마탑이 정제수를 얻지 못하게 되길 바란다고 말해놓은 내가 그의 면전에서 실은 다른 계획이 있다는 걸 토로하는 건 그리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실 마탑에서 결정할 일, 성주에게 들려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는 소원을 바꾸겠다고 말한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 곧바로 결계를 펼쳐서 성주를 대화에서 소외시킨 난 요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가 구상한 해법을 펼쳐내었다. 불새와 나 사이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숨긴 채, 그게 가장 나은 해결방안이라는 걸 부각하며.

그러나 답은 요엘이 아닌 다른 쪽에서 돌아왔다.

“그만한 결계를 하룻밤 만에 구축하는 건 어려운 일이야.”

딱 잘라 말한 건 블레셋이었다. 거기다가 요엘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보태었다. 다분히 빈정거리는 투로.

“가능하긴 하다고 쳐도, 무엇 때문에 그리 수고로운 일을 해야 합니까?”

난 요엘을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모두에게 좋은 방법이니까.”

그래, 난 모두에게 좋은 방법을 택하고 싶었어. 내 사소한 노력이, 그로 인해 파생되는 결정이 어쩌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마탑의 마법사라는 게 그런 존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내 앞가림도 하기 어려우면서,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게 어리석어 보일 수는 있어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부족함이 손발을 잡아매는 족쇄가 되어 숨 막힐 듯이 갑갑할지언정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죄책감을 느끼거나 모른 체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난 내 어깨에 강제적으로 지워진 이 짐을 온전히 감내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마도 블레셋 이상으로 오랜 세월 마탑의 사람으로 살아왔을 이 은발의 마법사는, 마탑의 결정이 기드온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그는 다분히 가르치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모두에게 좋은 방법을 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가 아니라……!”

그 단호함이 마탑의 방침을 설명해주는 듯하여, 말문이 막혔다. 그래, 마탑은 항상 이랬다. 그 어떤 도덕적 감정적 사유도 용납하지 않고 냉혈하게 저들만의 길을 추구한다. 거기에 반감이 일고, 그 반감의 저변에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 옳지 않음은 비정한 논리로 설명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논리가 나를 설득할 수도 없었다.

마탑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소시오패스 집단인 걸 알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건 내가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또한 그게 내 한계이기도 하고. 난 타들어 가는 속내를 감추며 말을 이었다.

“기드온의 성주는 이 추위를 이용해 영지를 벗어날 수 없는 주민들을 수탈해왔어. 그리고 이대로 변함없이 빙정이 존속한다면, 성주에게 협조하는 게 되고. 성주에게 반하는 이들은 모두 죽을 거야.”

틀림없이 그럴 테지. 엘로힘이 죽는다면 그 깊은 산중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지금 이 논의에 목숨이 걸려있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아힌 님.”

잠자코 듣고만 있던 요엘이 이내 혀를 찼다.

“송구하오나, 묻지 않을 수 없군요. 기드온의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그게 마탑과 무슨 상관입니까.”

어김없이, 예상한대로의 답이 돌아오자 머릿속이 아찔해진다. 내가 대답을 자아내기도 전에, 요엘이 차가운 얼굴로 단정 짓듯이 말했다.

“마탑의 임무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효율입니다.”

“…….”

“그리고 말씀하신 바는 일을 처리하는 데 효율성을 전혀 생각지 않는, 공상적인 이야기로군요.”

“요엘, 말이 지나치다.”

블레셋이 싸늘하게 가로막고 나섰지만, 요엘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술술 읊었다.

“그 결계를 치려면 마탑의 마력을 동원해야겠지요. 물론 마탑의 마력은 무한에 가까우나 그 마력을 전달하는 와중에 소모될 마력석이며 정제수를 생각하면…… 명백히 그럴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내 생각은 달라. 그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요엘의 낭랑한 음성에 내 목소리가 첨예하게 맞부딪혔다.

“마탑은 양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 마탑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고. 강자로서 관용을 베푸는 게 당연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해악을 끼칠 걸 알면서도 편의만을 추구해야 하나?”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으나, 내 말은 허공에서 의미 없이 흩날리다 부스러지는 듯이 느껴졌다. 요엘은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생명의 가치를 논하고자 하신다면, 마탑을 부정하셔야 할 겁니다. 마탑이 세워진 이래로, 이제껏 짓뭉개온 생명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물음이 섬뜩하게 나를 짓눌렀으되, 나는 나직하게 희망을 말하였다.

“앞으로 바뀔 수도 있잖아.”

“마스터께서 변하시지 않는 한, 마탑에 변화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히 평할 수는 없으나, 마스터는 변하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

절망적으로 견고하고 드높은 벽을 앞둔 듯하다. 요엘은 비웃는 듯이 굴었을망정 이성적인 태도를 잃지는 않았고 그렇기에 그의 말은 더욱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가 굴곡 없는 어조로 예단하는 모든 것들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내 몸을 파고드는 듯했다.

마스터는 변하지 않았고…… 수백 년을 그와 함께해온 이가 그리 말한다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진실이다. 허나 나는 부정하고 싶었다.

……엘로힘은 나더러 유성이라고 말했다. 그게 내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라면, 그 말에 애타도록 매달리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요엘은 처음부터 내게 품었던 악감정에 더해서, 나를 질타할 기회를 잡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가파르게 끌어올렸다.

“아직 어리신 분이니 그 하등 쓸모없는 이타심을 버리지 못하신 점도 이해가 갑니다만.”

이타심을 쓸모없다고 말하는 그라면, 제가 싫어하는 나를 후벼 파는 일에는 더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다. 심리적인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할 터이니.

“마탑에서 피우기엔 지나친 어리광이십니다. 아힌 님은 이런 임무를 처리하기에 아직 준비가 되시지 않은 듯하군요. 이번 일에는, 개입하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

“제 의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블레셋 님.”

요엘의 차분한 되확인에 블레셋의 시선이 짧게나마 나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대답을 발했다.

“……아니.”

그러나 답한 즉시 사나운 눈길이 지목하는 상대를 바꾸어 요엘을 담았다.

“다만 시온을 향한 네 무례는 탑으로 돌아가 필히 벌해야겠다.”

“원하시는 대로.”

전혀 개의치 않는 투로 요엘은 얄밉도록 차분하게 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 논의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며 덧붙였다.

“그러면 이제 결정된 것 같군요.”

내가 더 무어라 할 겨를도 없었다. 오싹한 미소를 띤 요엘이 손을 내밀자 성급히 둘러쳤던 결계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인형극을 보듯이 우리의 들리지 않는 설전을 지켜보고 있던 성주는 불만스러운 듯했으나 급히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어떻게 하기로 하셨는지.”

요엘이 당신 소관이라는 양 시선을 주자 블레셋이 마지못한 듯이 나서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네 소원은 전자만이 유효하며 그를 이루는 즉시 우리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 그럼 성안의 반역자들은!”

“그건 성주가 알아서 할 노릇이지. 이미 이번 년치의 소원을 빌었으니.”

내쏘는 말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와는 다른 이유겠지만, 블레셋 역시 요엘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걸 내키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성주는 내 쪽에 시선을 던졌다. 분기가 뒤섞인 그 눈동자가 날 쪼는 듯했다. 기껏 말 꺼내 놓고 이게 무어냐고 추궁하는 양 번들거렸다.

하지만 요엘이 등장할 줄 내가 어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난 이를 악물었다. 유리조각처럼 예리하게 찔러든 요엘의 지적이, 갓 입힌 상처처럼 뜨거웠다. 그 지독한 열패감이 온통 나를 사로잡아 열기로 번져나갔다.

내가 입을 닫고 있는 순간에도 대화는 이어졌다.

“하, 하지만 제가 혹시라도 죽게 되면 정제수를 보급하는 일에 차질이 생길 텐데…….”

“성주가 죽게 되어도 이 기드온을 차지한 자가 머리가 있다면 탑에 정제수를 보급할 테지.”

일침을 가한 블레셋이 바로 단정하듯 말을 맺었다.

“내일부로 불새를 제거하여 마탑의 임무를 종료한다.”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의 눈이 필경 물방울을 맞은 수면처럼 흔들리고 있을 내 눈과 수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움켜쥔 순간, 눈앞의 광경이 뒤바뀌었다.

이동한 곳의 풍경은 눈에 익었다. 며칠 전 우리가 이 기드온을 방문했을 때 거조를 타고 날아와 내려섰던 그 부근이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울부짖듯이 소리를 내어 머리카락을 헤치고 흐트러트려, 난 부산해지는 그 끝단을 잡아매었다.

뜨겁게 얼룩졌던 마음이 차가운 바람에 철판이 식듯 차게 가라앉아, 난 곧 평정심을 그려낼 수 있었다. 우뚝 제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으며 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블레셋을 응시했다.

요엘을 따돌렸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블레셋이 왜 그리했는지는 전혀 추측이 불가했다. 하얀 로브 자락을 흩날리며 선 블레셋은 눈살을 찌푸리며,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너…….”

“…….”

“네게는 아직 시간이 있어. 네가 생각하는 최악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담담하게 고하는 그의 음성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나는 혼란에 잠겨서 빤히 그를 주시했다.

“하루 만에 네가 말한 결계를 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하루 만에 이 기드온을 녹이는 건 가능한 일이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난 눈을 크게 떴다.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다. 블레셋은 무언가를 내게 제안하고 있었고, 그건 분명히……. 그의 임무를 망쳐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다른 시온이었다면 내게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리라.

“내일 동틀 때까지야.”

열 시를 앞둔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심장이 일순 어긋난 박자로 튀었다. 그의 말뜻이 온전히 이해되자 속이 울렁거린다. 그가 한 말을 알아는 들었지만, 블레셋이 왜 내게 그런 기회를 주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요엘을 따돌리면서까지 왜, 그가 내게…….

만약 내가 오늘 밤 엘로힘을 부화시킨다면 죽지는 않을지라도 나는 필경 벌을 받겠지. 불새의 말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마스터가 그간 투자한 게 아까워서라도 이 한 번의 일로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아직도 내가 죽기를 바라서 날 인도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타당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전부터 품고 있었던 하나의 추측을 난 입 밖으로 내었다.

“내게 빚이 있다고 느끼는 건가요.”

놀랍도록 순순히, 블레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눈감아 주려는 건가요.”

“그래.”

나는 찬찬히 블레셋의 눈빛이며 표정을 들여다보며 그의 입안에서 발해지는 음성의 아주 작은 떨림까지 온 힘을 기울여 관찰했다. 백 년 넘게 살아온 그이기에 블레셋의 의중을 읽어내는 건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에게서 요엘과 같은 악의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블레셋의 의사는 명확해졌지만 등 떠미는 대로 떠밀려가기엔 내게 용기가 모자랐다. 마탑을 거역하는 일이다. 그건 곧 마스터를 거역하는 일이라는 걸 의미했다. 그게 내 발길을 붙들고, 날 머뭇거리게 했다.

============================ 작품 후기 ============================

사고치기 직전!!

외전은 1/7 정도 써서 그래도 진척이 있어요. 후..... 태양을 삼킨 꽃을 빨리 끝내야할 텐데. 졸음을 이기고 집필에 몰두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더치커피 기기를 구입! 모든 걸 가내수공업으로 해결......

좋은 하루 되시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