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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80화 (80/155)

00080  5. 탑의 계약.  =========================================================================

방에 들어서자 가슴이 뻥 뚫리며 숨이 탁 놓였다. 난 문을 닫자마자 등을 기대어, 비스듬히 기운 채 마른세수를 했다. 입 밖으로 안도의 숨소리가 흘렀다. 제대로 잘 말할 수 있을지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른 시온들의 뻔뻔함과 고압적인 태도에서 배운 바 있었는지 생각보다 그럴싸하게 말하는 데 성공한 듯싶다.

샤자한에서의 난 좀 어설펐고, 이토록 허세 섞인 연기를 해본 건 또 처음이라, 어쩌면 내게 이런 쪽으로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면 배우에 도전해 볼까? 피식 웃은 난 걸음을 옮겨 침대로 향했다.

말에는 마력이 깃들기 마련이니, 내가 좀 어설프게 말했다고는 해도 성주의 귀에는 꽤 설득력 있게 들렸으리라. 실지로 그에게 말한 건 비틀린 진실이기는 했으나, 대부분 사실에 기인하고 있으니. 성주로서는 잠재적인 내부의 적들을 제거할 좋은 기회일 터.

난 침대에 드러누워 또다시 육체로부터 영체를 분리했다. 누군가를 몰래 지켜보는 건 솔직하게 말하자면, 흥미로운 일이었다. 스토킹 목적으로 이용하기에 딱 맞은 마법이란 말이지. 내가 불순한 용도로 쓸 만큼 타락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물론, 별로 스토킹하고 싶은 상대도 없지만.

나는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 며칠 간 성주를 지켜보기로 했다. 과연 그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지는 아직은 확신할 수 없으니, 주시하다 보면 또 소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 내 발언이 그를 제대로 흔든 것 같다. 그 파장은 온 성내에 미쳐, 성주는 그날 온종일 부하들과 하녀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물건을 내던지며 행패를 부렸고 초조한 듯 충혈된 눈으로 방안을 배회하였다. 성주가 성주 자리에 오르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고 하니, 제 자리를 빼앗길지 모르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하지만 성주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그러므로 아무리 날카로운 눈으로 제 아랫것들을 살핀다고 해도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성주는 그로부터 며칠 간 다소 바빠서, 우리 쪽에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괜스레 의심 가는 이를 몇몇 호출해서 트집을 잡아 추궁해보는가 싶더니, 이런 식으로 해봐야 반역자가 더 꼭꼭 숨어들 거라 생각했는지 성주는 냉정을 되찾았다. 그러면서도 저와 친근해 보였던 며칠 전에 목격한 사내한테도 웃는 얼굴로 은근히 속내를 떠보곤 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지지부진해서, 난 성주의 인내심이 금세 바닥날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내 의도대로 흘러간다. 이제 내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

성주를 찾아간 지 이틀 후, 난 바깥 풍경이 내보이는 홀의 예의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응접실을 연상케 하는 이 홀은 아주 유용해서, 귀찮게 이동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 이 게으른 마법사-나와 블레셋-들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등 일상적인 행위를 그저 방 밖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방 안에 있다가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하녀가 알아서 식사를 차려내고 우리를 불렀던 것이다.

그가 실지로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블레셋은 정말로 휴양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꼬박꼬박 식사시간 때마다 나와서 나와 마주 앉아 밥도 챙겨 먹고 매우 느긋한 얼굴로 바깥 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일은 잘되어가고 있느냐는, 여상한 물음 한 마디 없이 완전히 모른 체하며 임무를 잊은 듯이 행동했다.

그런 그를 앞두고 나도 어쩐지 편한 마음이었다. 란델 때에는 쫓기는 기분이 들어 초조하고, 속이 탔는데. 블레셋은 무관심이라는 방식으로 내게 동조하고 있었고, 난 그게 어쩌면 그 나름대로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확실히 그가 아무리 변화했다고는 해도, 마탑에서 그대로 있었다면 여전히 그와 난 데면데면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리 좋은 사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이전보다는 그가 편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여유롭게 차를 즐기고 있을 즈음이었다. 결계에 대한 구상을 하느라 머릿속으로 정리해가고 있던 그때에, 문득 몸을 흠칫 떤 블레셋의 입이 열렸다.

“누군가가 이리로 오고 있군.”

“……누가, 온다고요.”

난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아하게 물었다. 그저 아무나라면 거의 말 섞지 않고 있던 블레셋이 굳이 내게 말하지 않을 터였다. 블레셋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들었다. 일자를 그리던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렸다.

“탑으로부터 누군가가 오고 있다. 곧 도착할 테지.”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 역시 먼 곳에서 준동하는 마력을 느꼈다. 익숙하되 익숙지 않은 공간의 뒤틀림이었다. 블레셋이 나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이니, 그가 먼저 느꼈음이라.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데.”

쯧, 혀를 찬 블레셋은 찻잔을 내려놓았고 나 역시 마시고 있던 차를 꿀꺽 들이켰다. 그가 그리 말하니, 나 역시 불안감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갖는 불안감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한 즉시 해소되기 마련이다. 그 직후는 분명한 어떤 감정으로 모습을 바꿀지라도.

이윽고 눈보라 치는 기후를 뚫고 한 남자가 성을 방문했다. 내가 그걸 알 수 있었던 건, 그가 생생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이곳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며 어떤 안내도 받지 않고 바로 방안으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꾸벅 몸을 숙이는 회색 로브의 호리호리한 남자는 시온에 비견될 만큼 아름다웠다. 은빛으로 부서지듯이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도 그러했고, 이제껏 보아온 어떤 푸른 눈보다 투명한 빛을 띤 하늘색 눈동자도 그러했다. 블레셋처럼 성별을 규정하기 어렵게끔 곱상한 외견을 한 그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게 어쩐지 선득하게만 느껴졌다.

“처음 뵙습니다, 아힌 님. 요엘입니다.”

낭랑한 음성으로 홀리듯이 속삭이며 그는 눈을 접어 휘었다. 그러나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에는 온기가 조금도 없었다. 물론 마탑의 사람들이 온기와는 거리가 먼 미적지근하거나 싸늘한 이들이라지만, 요엘의 눈빛은 그 속성이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일전에 블레셋이 내게 드러냈던 것처럼 격렬한 분노나 살의는 아니었을지언정 거기에 담긴 감정은……. 혐오하거나 같잖은 대상을 바라보는 듯한 불유쾌함이었다. 어찌 보면 깔보는 듯도 한 시선으로 그는 날 주시하고 있었다.

요엘이라고 하면, 아모스 중의 하나로 강력한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난 직감적으로 그가 왜 날 그런 눈으로, 내키지 않는 듯이 바라보는지 알아채었다. 요엘은 나보다 강한 마법사였다. 그리고 틀림없이 나보다 무수히 더 많은 세월을 살아왔을 마법사이기도 하리라.

하지만 그는 아모스이고, 나는 마스터의 제자인 시온이었다. 마탑에서의 신분은 절대적이다. 그는 즉 자기보다 약한 윗분을 섬겨야 하는 몸이었으니, 거기에 불쾌감을 품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어쨌든 인사를 하기는 했으니 복잡한 기분에 잠긴 채 그의 인사를 맞받는데, 블레셋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지?”

놀랄 만큼 싸늘한 어조였다. 그제야 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블레셋이 내게 다소 온화한 투로 말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차디찬 냉대라고 표현함이 적합할 듯한 반응이었다. 고개를 치켜든 채 블레셋은 그를 정말로 아랫것 보듯이 내려다보았다. 요엘은 오히려 화사하게 보일만치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엘리야 님께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난 필요 없다고 말했고.”

“이곳에 온 게 제 의사가 아님은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것도 모르느냐는 양 무시하는 투에, 난 요엘이 나뿐만 아니라 블레셋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엘리야도 알 듯싶은데 왜 굳이 그를 블레셋에게 붙이려고 한 걸까. 물론, 그 사람은 웃으며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지.’ 따위로 주장할 성격 같기는 하다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블레셋은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칼날 같은 어조로 뱉어냈다.

“무슨 용건인지 짖어 봐.”

정말 아무리 계급 차가 있다지만, 기분이 팍 상했을 법한데 요엘은 눈썹만 들어 올렸을 뿐 이렇다 할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마스터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입니다.”

일순 바짝 굳어 그를 바라보는 블레셋과 나를 보면서, 요엘은 반반한 낯에 요요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불길하게 느껴지는 그 미소를.

“이 명을 하달받은 즉시,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하라.”

흡사 벼락이 떨어지는 듯했다. 난 본능적으로 급박하게 블레셋을 돌아보았다. 내가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하여, 블레셋이 임무를 미루어두며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마스터가 눈치채었던가? 어떻게. 혹시 엘로힘과의 대화 내용을 들어서…….

머릿속이 혼란하여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느긋했던 마음은 잊히고 속이 타들어간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블레셋은 평정을 유지했다.

“……이유는?”

“아시지 않습니까? 마스터께서 명하신 일에 이유는 필요 없습니다. 그저 따라야 할 뿐.”

얄밉도록 딱 부러지게 말하며 요엘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날 흘낏 훑었다.

“성주가 요청한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이 오래 걸릴 만한 연유라도 있는지.”

“기한은 구체적으로 언제까지지.”

“내일 중에는 출발해야 할듯합니다.”

지나치게 빠듯했다. 당장 내일이라니, 아직 성주의 소원을 돌려놓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세찬 폭풍이 밀려오듯 모든 게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그리고 혼란을 한층 더 가중되었던 건, 성주의 호출 이후였다.

성주가 새로운 손님의 방문 소식을 전해 듣는 건 필연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걸 소원을 돌이킬 수 있는 기한이 다해감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였으리라.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빠른 결정을 촉구했으니까. 다급해진 성주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 우리 셋을 불러들였고, 불새를 없애주는 대신 그의 성에 숨어 있는 반역자들을 없애달라고 말했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그로서는 추려내는 것이 불가하고, 추려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의심 많은 그는 안심하지 못하리라. 성주는 마탑에 신뢰를 품고 있었고, 그건 인간이 인간에 대한 믿음이 아닌 일을 확실하게 해결해주는 데 대한 신뢰였다.

그리고 새로이 마탑에서 내려온 이 마법사는, 성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냉소적인 웃음을 내보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로군요. 한 번 빈 소원은 그리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있을 수 있지. 네 방침을 내게도 강요하지는 마.”

“마탑의 계약은 마음 바뀌는 대로 뒤집을 수 있을 만치 가벼운 게 아닙니다. 엘리야 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겁니다.”

“그건 엘리야에게 물어봐야 아는 일이겠지. 네가 엘리야의 대변인도 아니지 않나?”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아는 일이 있음을 공교롭게도 블레셋 님께서는 모르시는 듯합니다.”

“네 교만한 확신이 감히 시온에게 들이댈 것이던가?”

“이 무의미한 언쟁을 이어나가시려는 의도를 감히 짐작하지 못하겠군요.”

타인 앞에서 공공연히 이럴 정도면 둘이 사이가 어지간히 좋지 않은 듯하다. 내분이 이는 광경을 목도한 성주가 어떻게 된 거냐는 듯이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내게만 초조함이 이는 건 아닌지 늘 여유로운 척하던 성주도 그리 낯빛이 좋지 못했다. 그를 병풍 취급하며 요엘이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에겐 정제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주가 빈 첫 소원이 우리의 이익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다른 대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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