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5. 탑의 계약. =========================================================================
엘로힘과 대화를 마친 직후 난 꽤 초조해진 터였다. 그가 지적한 것들은 하나같이 일리가 있었고, 그를 극복하기에 내 마법 실력은 한참 모자랐다. 그 정도의 정교한 대규모 마법 결계를 형성하는 게 내게 가능하긴 할련지. 처음에는 기세 좋게 펼쳤던 긍정적인 전망도 흐려져 갔다. 머릿속에는 전달받은 지식들이 그득하다고 해도, 난 내 몸 지키는 결계 외에는 쳐본 적이 없으니.
내가 도움을 구할 상대라고 해봐야, 현재로써는 블레셋뿐이다. 그렇다고 해봐야 미온적인 태도로 한 걸음 물러난 것뿐이지만, 그게 어디인가. 그렇게나마 마탑의 사람 중 내가 하려는 일을 간접적으로나마 도우려고 든 이는 그밖에 없었다.
…아니, 한 명 더 있었지. 어쩌면 내게 가장 유효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도 그였으니. 난 뇌리에 바로 스치듯이 떠오른 상을 흩어버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랜 시간, 가까이에 있어왔던 탓에 그 생생한 영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언제나 세상과 단절하듯 눈을 내리감은 그 모습- 우묵한 데 고인 어둠처럼 짙고, 고요한 호흡. 달빛이 배인 얼음 조각처럼 흰 피부. 가장 캄캄한 새벽을 닮은, 밤조차 숨죽일 듯한 그 눈동자가 현실을 뛰어넘어 지독하게 나를 일망한다.
영혼을 빼앗길 듯이 그 면면이 아름다운 낯을 떠올리자면, 그리고 그를 기억하자면 뱃속이 떨렸다. 내 안에 다른 생물이 살고 있는 양 속에서 알 수 없는 움직임이 일었다. 마스터는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건 의심할 길 없이 그러했다.
도망치고 싶어도, 길들어버린 사고는 어려움에 직면하면 바로 그를 찾아버려서 제 자리에 돌아온 난 숨이 막혔다. 정말, 바로 그를 떠올려버린 걸 보면 버릇이 심각하게 나빠진 듯하다.
…실은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의 도움을 비는 것보다도, 마스터에게 간청하는 게 낫다는 것을. 왜냐하면 마스터는 이때까지 어김없이 내 청을 들어주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명을 수행할 뿐인 엘리야나 란델, 에스겔이라면 내가 말을 꺼낸 즉시 만류하거나 블레셋에게 연락하여 당장에라도 일을 진행시켰으리라.
그러나 내가 도움을 구해선 안 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마스터이기에. 그를 피하여 도망 온 이 자리에서 다시금 그를 찾는 일은 있어선 안 되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뿌리쳐냈다. 꾹 누르듯 눈을 감았다 뜨자, 내 앞에 당장 해야 할 일만 남았다.
성주의 마음을 바꾸는 것. 즉, 그의 요구사항을 바꾸어 놓는 일. 재물로 매수하기는 빈털터리 신세인 나로서는 불가능할 것이며, 또한 그를 구슬리려고 들어서는 안 되었다. 마탑의 시온은 아쉬움을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이므로. 그러니까 나는 성주 스스로 마음을 바꾸도록 유도해야 했다.
그와 거래할 방법이 없고 설득도 어렵다면 답은, 위협이지 않을까. 물론, 목에 칼을 들이대는 종류의 위협은 아니지만 말이다. 간단하고 명료한 결론이었다. 그리고 난 그 결론을 선보이려고 바로 성주를 찾았다.
샤자한의 왕보다 기드온의 성주 쪽이 더 무게감이 낮고, 그러므로 그를 지키는 방비가 더 허술하리라는 건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아무런 장애 없이, 허공 속에서 그려지듯이 집무실에 앉아 정무를 보는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그리고 성주의 입이 쩍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그야 나라도 화들짝 놀랐을 법하다. 그의 손이 어느덧 허리춤에 가 있는 걸 보니 검을 뽑아들려고 한 듯싶었다. 제 오롯한 공간을 침범당한 성주가 으흠, 헛기침하며 날 바라보았다. 가까스로 온화한 체하는 눈빛이었다.
“아힌님? 제게 볼일이 있다면 말씀만 하셨어도 달려갔을 터인데, 어찌 이리 방문하셨는지.”
그의 실체를 본 나로선 친근한 척 웃으며 굽실거리는 그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더러 천한 년 이랬던가. 그 생각을 하자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았지만, 난 애써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천연덕스럽게 그의 앞 의자에 허락 없이 걸터앉았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날 반갑게 생각하게 될 거예요.”
사소한 복수심에 보란 듯이 다리를 꼬고 앉아, 부러 거만하게 말했음에도 성주의 얼굴에는 변화가 일지 않았다. 성주는 내가 그에게 반감을 품었음을 이미 눈치채었으리라. 그리 티를 냈으니.
“말씀하시지요.”
난 다분히 가르치는 투로 말을 시작했다.
“성주가 뭘 잘 모르는가 본데, 당신네 영지는 지금도 얼어붙고 있어요.”
저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애한테 이런 식으로 소리를 들으면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하긴 블레셋이 여든 살 먹은 할머니가 취향이라고 운운했으니, 그가 어리다고 말했다고 한들 성주로서는 내가 꽤 나이가 있다고 유추할 것이다. 성주가 태연자약하게 반문했다.
“기드온은 예전부터 얼어 있었습니다만?”
“내 말은, 더 얼어붙고 있다는 거죠. 지금은 성의 결계가 있어서 그럭저럭 버티고 있지만, 글쎄 그게 언제까지 가능하려나? 빙정의 마력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어요. 마력은 모여들수록 강해지는 법이니.”
“…….”
난 말을 끊으며 슬며시 성주의 낯을 살피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미묘하게 달라진 기색이 내 말이 그를 흔들기는 한 듯싶었다.
“결계로도 그 추위를 막을 수 없을 때가 올 거예요. 그러면 이 영지는 더 이상 사람 살 수 없는 곳이 되겠지요. 북쪽의 끝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때에는 마탑에서 성의 결계를 보강해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때에도 마탑이 요구하는 대가가 지금과 같을 거라 생각하나 보죠?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허겁지겁 빙정을 없애달라고 말해도, 마탑은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우리에게 이로운 계약만 하니까.”
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정도로 위급함이 닥친다면 그에게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줄 정제수의 전부를, 마탑은 요구할 수 있었다. 성주도 얼어 죽기 싫다면 그에 응해야 하리라. 빙정의 마력을 억누를 만큼 강력한 결계는 마탑 정도만이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아도 옳았다. 막대한 비용을 들이면 안 될 건 없겠지만, 빙정의 마력이 더 강해지면 그마저도 무용한 시도가 되리라.
성주는 눈앞의 이득을 생각하기보다는, 미래를 내다봐야 했다. 척 보기에 성의 결계가 수십 년은 여력이 있어 보였지만, 그 수십 년 동안 또다시 불새가 출현한다는 보장은 없으니 그에게는 차라리 잘 된 기회일 수 있다.
턱을 쓸어내린 성주가 잠자코 물었다.
“으흠, 그렇다면 그리되는 게 마탑의 입장에서는 이득일 텐데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까?”
저의를 의심하는 그의 눈빛은 자못 날카로웠다. 난 태연한 척 성주의 시선을 맞받았다. 나로서는 그의 적일 쟌느를 비롯하여 기드온 사람들을 위한다는, 내 순진한 의도를 들켜서는 안 되었다. 선의는 항상 이용당하기 마련이므로.
이런 자일수록 더 계략적이고, 정치적인 논리에 설득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아무도 믿지 않는 자일수록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동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성주에게 이게 그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내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란 걸 알릴 필요가 있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탑 안에서도 이해타산은 있기 마련이지요. 당신이 똑똑하다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겠지만.”
“고귀하신 마탑의 마법사님들은 탑주님 아래에서 충실히 명을 수행하지 않습니까.”
성주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신뢰를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꺼내라고 요구하는 의도가 느껴져 난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준비했던 답변을 토로했다.
“난 마탑이 정제수를 얻지 못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거든요.”
“그건 참…… 흥미로운 이야기이군요.”
성주의 단단한 입매에 묘한 웃음기가 배어났다. 미지의 것처럼 생각되었던 마탑 내부 사정을 들을 만한, 그럴싸한 기회로 여겨졌음이라.
“간단히 말해, 나와 블레셋의 사이는 좋지 않죠. 그리고 이 임무는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고요.”
“제게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이십니까.”
“당신이 빌 수 있는 소원을 다른 걸로 돌리는 것.”
그렇게 하면 난 이제 시간을 벌 수 있다. 불새가 빙정을 흡수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니. 엘로힘이 빙정을 약화할 동안, 나는 결계를 구현해내야 했다. 빙정의 힘과 성장을 막고 봉인할 결계.
어쨌든 계약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탑에서 엘로힘을 처치하려들 것 같지는 않았다. 인세에 개입하지 못하는 마탑이 과연 어떤 사유도 없이 자연계의 섭리에 거역하려고 들 수 있을까. 그리고 블레셋은 임무 수행에 별로 의욕적인 편이 아니니.
“제가 블레셋 님께 이 이야기를 고하면 어쩌려고, 이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느물거리며 웃는 게 약점을 잡아 이용하려드는 악당의 표정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해 놓았지. 나날이 치밀해져 가는 난 그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다가 마력을 내쏘았다. 성주가 순발력 있게 몸을 옆으로 틀었지만, 이건 화살이 아니다. 제게 스며드는 마력을 느낀 성주의 낯에 분기가 차올랐다.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낼 때도 되었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난 마법사예요. 당신 하나쯤은 이 방 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울 수 있는.”
“저를 위협하신다고-”
“아니, 탑의 계약자에게 그럴 수야 있나. 당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아서, 좀 상기시켜 주려고.”
“…….”
붉으락푸르락 한 낯으로 성주는 입을 사려 물었다. 그래야 마땅한 이였으므로 난 죄책감 없이 읊조렸다.
“성주는 이 건에 관해서 입도 떼지 못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면 시험해도 좋아요. 아쉬운 건 내 목숨이 아니니.”
“제게 좀 지나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전혀.”
억울한 듯 항의하는 성주에게 딱 잘라 말한 난 입꼬리를 씩 들어 올렸다.
“블레셋은 내가 이렇게까지 할지는 모르고 있지요. 내가 그의 앞에서 고분고분한 후배인 척 굴었으니까. 그러니 어차피 당신이 뭐라고 지껄여도 그는 듣지 않겠지.”
“…….”
역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타입답게 성주는 내가 패기 돋게 나가니까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 그러면 할 이야기는 다 했고 이제는 시간을 주어야겠지. 난 이제 갈 거라고 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툭툭 털었다.
“현명한 선택을 하길 빌어요. 블레셋은 그리 느긋한 성품이 아니니.”
“…글쎄, 생각해 보아도 빌만한 다른 소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모쪼록 아힌님의 고견을 들려주시겠습니까.”
내 의견을 구하는 건, 정말로 어찌할지 모르겠어서가 아니다. 성주의 표정은 여전히 능청스러웠고, 그는 내게서 좀 더 무언가를 캐내려 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것도 예상된 반응 안이었다. 다리 밑에 돗자리를 깔아도 되겠어! 뒤늦게 깨달은 재능에 아쉬움을 느끼며 난 비웃는 듯이 속삭였다.
“난 당신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무얼 말입니까.”
“세상에는 언제나 주인의 목줄기를 물어뜯으려는 들개 같은 작자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의심 많은 성주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고 있을 터였고, 내가 읽어낸 그의 부하며 하녀들도 한결같이 그리 생각했다. 실지로 그의 부하 중에 성주 욕을 해대면서 그의 자리를 꿈꾸는 이들도 없는 건 아니니까.
“이 성안에도, 그런 자들이 있고요.”
“제 부하들은 모두가 충성스럽습니다.”
“겉으로는 그럴 테죠. 속으로는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테지만.”
내 말이 그의 심중을 흔들었는지, 어두운 낯빛으로 성주가 턱을 쓰다듬는다. 난 그를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잘 생각해 보라고요.”
그리고 곧바로 처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