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5. 탑의 계약. =========================================================================
[어떤 유능한 마법사의 도움이 있다면, 좀 더 빨라질 수 있겠지.]
엘로힘이 새침하게 아부를 섞어서 첨언하자, 난 코웃음 쳤다.
[네 뜻대로 해줄 생각은 없어. 이 빙정, 너 홀로 꿀꺽하기에는 너무 거대하지 않나?]
[무슨 소리야.]
화급히 답하는 데에 슬며시 탐욕이 드러났다. 이토록 강력한 마력의 근원이 되는 빙정이라면, 소화하는 데에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엘로힘에게는 무척 영양가 있는 먹이일 것이다. 지금의 엘로힘은 그래,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사람들을 위하는 척 말했지만, 사실 넌 이 빙정을 안전하게 흡수하고 떠나고 싶은 거잖아?]
뜨끔했는지 엘로힘이 즉각적으로 딱딱하게 반론을 가했다.
[하지만 그게 순리이기도 해. 이 세상 어느 곳에서건 비정상적으로 특정한 속성의 마력이 강해지면 어떻게든 자연스레 균형이 맞춰지게 되어 있어. 그래서 반대 속성을 가진 내가 이곳에 이끌려 오게 된 거지.]
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별로 뭐라는 건 아니야. 그래도 이 빙정, 네가 모조리 흡수하게 놔둘 순 없어. 빙정이 사라지면, 기드온에서는 더 이상 정제수가 나지 않을 거고 그래선 안 돼. 마탑에서 필요한 건 정제수니까.]
[마력석이라. 그도 순리를 알 텐데 무슨 생각인지. 애초에 정제수가 필요한 이유도-]
무언가 아는 듯이 투덜거리던 엘로힘은 내가 그를 유심히 바라보자 바로 침묵을 고수했다. 얘 은근히 떡밥을 던지는 듯한데, 실은 말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걸지도 몰랐다. 엘로힘이 죽건 말건 슬슬 파서 캐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난 어렵사리 참아냈다. 포르르 내 어깨에 내려앉은 엘로힘이 물었다.
[그래서 어쩔 계획인데?]
[빙정의 힘을 상당수 네가 흡수하게 하되 정제수를 만들어낼 만큼 존재는 남겨두고, 더 커지지 못하게 결계를 걸어두는 거지.]
[거창한 소리인데.]
[내가 생각해도 어려울 것 같긴 해.]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실제로도 가능할지. 나도 마법에 대해서 알지만, 빙정의 성장을 제한하려면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는 아주 정교한 결계가 필요할 거야.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줘야 할 테고.]
그의 말을 들을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려울 거라 예상했건만, 내 알량한 마음과 노력으로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마법사다운 학구심이 불탔는지 저편에 서서 대화를 듣고만 있던 테드라는 자가 턱을 슥 문지르며 말했다.
“이 몸이 비록 미천한 실력을 지녔다고는 하나, 한 마디 보태자면 그게 그리 쉬운 일처럼 들리지는 않소.”
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누가 몰라서 그래? 다른 방법이 없는걸. 나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입장이고, 마탑은 정제수를 원해! 이게 최선이라니까.”
문득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남자한테 말을 놓았다는데 생각이 미쳤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새랍시고 분명 영물이니 나이가 많을 게 뻔한 엘로힘한테는 반말을 찍찍 써두고 그에게만 말을 높이는 건 우습기도 하고.
“……나름대로 고충이 있으시겠군요.”
테드가 내 비위를 맞추듯 친근하게 말을 건네었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해보는 듯하던 엘로힘이 냉큼 말했다.
[게다가 큰 문제가 있는데, 정제수란 빙정의 기운이 녹아든 지하수로 제조하는 거잖아? 수맥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빙정은 결코 작지 않은 상태일 거야.]
치미는 불안감에 입술을 깨무는 내게 엘로힘은 대수롭지 않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허점을 짚어주었다.
[그렇게 되면 기드온은 이전과 같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추울 거라고.]
[……빙정이 더 커지지 못하게 제한하면서, 동시에 외부 기온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계를 같이 걸어둔다면 어때.]
지하수에만 영향을 미치도록 기운의 흐름을 조절한다니, 일이 점점 더 커지는 듯하여 눈앞이 아득했다. 뭐가 이리 고려해야 할 게 많아. 마법을 배운지 6개월 좀 지난 초보 마법사에게 주어지기엔 지나친 난제였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정교하게 이중 중첩된 결계는 만들기도 어렵거니와 생성할 때에 마력 소모도 엄청날걸? 더군다나 그만큼 큰 빙정이면, 제어하기도 어렵겠지.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줘야 하는 문제에 짐을 더하는 일이야.]
내가 수심에 잠김에 따라, 테드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져 갔다. 한참 방도를 생각해내다가 머리가 터질 무렵이 되어서야 갑작스레 분기가 솟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태평하게 문제 제기나 하고 있는 엘로힘이 심히 거슬렸기 때문이다. 방도를 떠올려야 하는 건 그쪽 아니야? 뭘 믿고 계속 부정적인 소리만 덧붙이는 거지? 내가 안 되겠다고 포기해버리면 어쩌려고.
[일이 어렵다는 소리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뭔데.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넌 내 도움을 바라잖아.]
엄포를 놓듯이 말하자, 엘로힘의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그런데 어려운 길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더 좋은, 다른 방법이 있다는 소리야?]
[간단한데.]
날개를 한번 푸드덕 홰친 엘로힘이 부리로 깃을 고르며 여유를 부렸다. 그리고 느긋하게 대꾸했다.
[네가 내 부화를 도와주면 되는 거야. 나로서도 그쪽이 더 좋고.]
[나한테 부화를 도와달라고? 어떻게.]
나는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내게 마력을 공급해서 더 빨리 빙정을 흡수하게 해준다면, 나는 바로 이 기드온을 녹이고 떠나갈 수 있겠지.]
[……그러면 정제수는 구할 수 없게 되잖아.]
[어쩔 수 없는 결과지. 하지만 가장 간편한 방법이기도 해.]
[너 지금 그건…….]
원점으로 돌아온 대화에 분이 치밀어서 난 얼굴을 구겼다. 오로지 그의 입장에서만 간편한 방법이지 않은가. 테드를 의식한 난 마법어의 전달 범주를 제한했다. 내 짜증이 담긴 외침이 쩌렁하게 엘로힘을 향해 꽂혔다.
[마스터에게 날 죽여 달라고 말하라는 소리야!]
네게는 그 빙정을 무사히 먹어치우고 떠나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내 목숨이라고. 내가 다소 도전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알량한 정의심을 들이대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 또한 내가 살아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걸 잊지는 않았다. 이기심에 찌든 불새를 난 이를 바득 갈며 노려보았다.
[이럴 바에는 널 돕지 않는 편이 낫겠어. 어차피 일은 블레셋이 할 거니까, 난 가만히 있으면 다 끝나겠네.]
[화낼 것 없어.]
엘로힘 역시 테드를 배제하고 내게만 마법어를 전해왔다. 보기로 무언가 마법어가 오가고 있다는 건 알만한데 들리지 않으니 테드는 어리둥절하게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네 말을 들으니, 도와줄 마음이 있다가도 사라지는데? 네 목숨은 중요하고 내 목숨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이렇듯 침착하게 묻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울컥, 화가 나 있었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기껏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려고 했더니 누굴 호구로 알아!
[나는 네가 이 임무를 망친다고 해서 죽을 거라고 생각지 않아.]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 혹시 알아? 내가 저 알을 깨버린다고 해도 네가 죽지 않을지.]
위협적으로 비아냥거리며 성큼 다가가 알 위에 손바닥을 얹자, 테드가 선불 맞은 양 펄쩍 뛰었다.
“아, 아니 뭐하는 짓이오!”
그러나 내 사나운 눈길이 스치자 그는 잔뜩 경계하며 물러났다. 내가 보란 듯이 일으킨 마력이 그에게도 느껴질 터였다. 분명히, 이 동굴 하나는 가볍게 부술 수 있을 만한 강력한 힘이었다.
[물러나 있어.]
내 어깨 위에서 엘로힘이 명령했다. 활활 타오르는 날개를 한 차례 퍼덕인 그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건 달라. 난 확신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조금 더 분명한 투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넌 죽지 않을 거야.]
가슴에 서늘한 감각이 스몄다. 역시 이 새는 내가 모르는, 마스터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다. 엘로힘의 장담이 선으로 이어진 듯이 얄팍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신경을 긁는다. 뿌옇게 연기가 인 물속을 난 들여다볼 수 없고, 그 안에 무엇이 잠겨 있는지 추측하는 것도 불가하다. 그러나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막막함을 네가 알까.
그게 무언지 모른다면, 거기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아는 것조차 무의미한 일이니. 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안 죽고 고문당하는 건 괜찮다는 소리야?]
[거기까지는 장담 못 하겠네. 하지만 네게 큰일은 없을 거야.]
엘로힘의 말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고, 난 좀 더 소리를 낮추어, 거의 잠길 듯한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네 말은……. 마스터가 내게 관대해져야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로 들려.]
그 말에, 심장이 멋대로 뛰고 있었다. 목덜미며 뺨에 번지듯이 열이 올랐다. 설렘일까, 두려움일까. 몹시 긴장한 채 스릴러 영화를 보고 있는 양, 어떤 예감이 깃털처럼 속을 간질였다. 입안에 침이 고여, 난 꿀꺽 소리를 냈다. 붉은 눈이 몇 번 말없이 끔뻑였다.
[그는 틀림없이 그럴 테지만, 어떤 이유가 있다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어. 나도 설명하기 어렵거든.]
엘로힘은 부리를 벌리며 숨을 토해냈는데, 그게 꼭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네 목숨이 아니라 내 목숨이야.]
어쩐지 우울한 기색이었다.
[여기까지 말했으니 만약 네가 나를 도와줘서 부화를 마친다고 해도, 그 이후에 그가 날 살려둘지.]
[지금 나눈 이 대화에 대해서 마스터가 꼭 알 거라고는. 설마.]
영문 모를 테드를 흘낏거리며 난 알 위에 얹은 손을 거두었다. 엘로힘은 내 어깨를 벗어나 제 알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부리 끝을 알껍질에 대며 중얼거렸다.
[그게 내 희망이지.]
어쩐지 별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몹시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죽음을 맞이할 것을 예감하는 양 시무룩해진 엘로힘을 보며 나 역시 숙연하게 고개를 내렸다.
그러나 곧 의심이 찾아들었다. 이 불새는 무척 오래 살았음이 분명하니, 거짓말에도 능숙할 수 있었다. 그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 어쩌면 제 뜻대로 날 이용해먹기 위해서 교활하게 연기하고 있는 걸지도.
이곳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내내 당해온 일들로 내게는 불신이 팽배해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한 번쯤 의심해보는 게 옳았다. 비록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지를 가진 이상 정직할 거라고 마냥 믿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배운 지식에 마법생물체는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없었다.
그리고 엘로힘의 말을 믿어서 내가 그를 도와 빙정을 아예 없앤다면 마탑은 기드온에서 정제수를 구할 수 없게 될 테니, 난 필연적으로 손해를 끼치게 된다. 마탑을 악의 축 비슷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 나라도 그게 내킬 리 없잖은가. 내가 마스터에게 받은 것들을 생각하자면 배은망덕하다고 비난받아도 쌌다.
……솔직히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내가 벌 받는 걸 감수하면서 엘로힘을 도와야만 할까. 그렇게까지 해야 해? 거기에 대해서도 난 회의적이었다. 내게는 하등 이득 될 것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마탑을 벗어나려면, 시키는 일이라도 열심히 해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다시금 성주를 떠올려 보면, 착한 척하는 걸 떠나서 엘로힘을 돕는 게 옳아 보이기는 했다. 그 얄팍한 도덕심이 한편으로는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되도록 모두에게 이로운 쪽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은데……. 물론 성주는 그 모두에 속하지 않지만.
난 결론을 내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네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난 거짓말하지 않아.]
[넌 지금 내게 죽음을 무릅쓰라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
실지로 마스터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그 말에는 무척이나 마음이 끌렸다. 지독하게 매력적으로 나를 잡아당겨, 믿어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마스터에게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되고 싶어서, 그 욕망 때문에 어떤 논리적 기반 없이 막연히 내가 그 말을 믿고 싶어 한다는 걸.
[그러니까, 이 일은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그리고 그 후에…….]
안 되면 네가 제안한 방법을 고려해 보아야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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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상황을 보아 150편안에 완결이 날 것같긴 해요, 희망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