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7 5. 탑의 계약. =========================================================================
“이 오지랖이 언젠가 나를 죽일 거야.”
난 한숨과 함께 투덜거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하듯이, 내게는 오지랖이 딱 그런 듯싶었다. 하지만 성주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블레셋을 말리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나는 그에게 일조한 셈이 된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내가 이렇듯 나설 수 있는 건, 역시 샤자한의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 덕이리라. 그 일로 난 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이 내게 싹튼 자신감이며 용기였다.
마탑의 의지에 따르지 않고, 마탑의 시온이 아닌 나로서 움직이는 건, 한편으로는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내가 나라는 정체성. 나는 마탑의 시온이기 이전에 이아힌이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흡사 내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마스터에게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록 그것에 실패해서 도망쳐온 나이지만, 반항심에서건 어쨌건 난 다른 방향으로 그리하고 있었다.
우선은 성주의 약점을 찾아보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난 샤자한에서의 일을 교훈 삼아 움직였다. 침대에 누워 이전처럼 정신을 집중하니, 육신에서 뻗어 나온 유체가 자오록하게 방안을 감돌았다.
연기처럼 흐릿하며 공기처럼 투명하게 변화한 감각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난 미끄러지듯이 벽을 통과해 빠르게 성주의 방으로 내달았다. 이동하는 도중에 저편 어딘가에서 높은 외침과 날카로운 소음이 섞여 들려왔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인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나아가, 벽을 넘어서자마자 난 날 통과해서 벽에 부딪히는 접시에 깜짝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더 던질 물건이 없자 성난 얼굴의 성주가 소리를 지르며 양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지진 난 듯이 탁자가 흔들리며 삐걱거리는 소음을 토해냈다. 어찌 그리 감추고 있었는지 모를 포악함이었다. 하녀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다가와 주섬주섬 잔해를 치워내는 가운데 성주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가구를 걷어찼다.
“그 천한 년의 아가리를 찢어버렸어야 하는데!”
‘그 천한 년’이 누구인지 알 것 같지?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단박에 날 후려쳤을 만한 분노였다. 성주의 안에 이토록 감정이 쌓여 있었다니, 그걸 우리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티 내지 않았단 것에 놀랄 지경이다. 때맞춰 방에 들어온 한 사내가 급히 만류했다.
“성주님, 이러다 손님들 귀에 들어가겠습니다.”
“기껏 성의를 보였더니 반응이 좆같지를 않나 부탁을 했으면 바로 달려갈 것이지 바로 방안에 처박히질 않나. 쌍것들.”
걸쭉한 욕설에 기분 나쁜 걸 떠나서 난 아연해지고 말았다. 무슨 성주가 입이 저리 험하담.
“마탑의 마법사들이야 원래 빤질빤질한 낯짝을 해서 죄 도도하지 않았습니까. 진정하시지요.”
……시온말고 룻도 다들 외모가 괜찮은가 보다. 다른 이들을 보지 못해서 내가 시온 중에서는 못난 편이지만, 마탑에서 개중 제일 못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자신감이 다소 감소한다.
“진정은 무슨.”
씩씩대면서도 성주는 그제야 화가 식었는지 의자에 지하철 민폐남처럼 다리를 쩍 벌리고 주저앉았다. 당연스레 내 호감도는 더 떨어질 수 없을 만치 바닥을 쳤다. 꽤 친근한 사이로 보이는 사내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래도 그 계집 꽤 이쁘장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쁘긴 무슨. 블레셋이라는 자 옆에 놓으니 볼품없기만 하더라. 차라리 내 취향은 고 새초롬한 눈빛의 하얀 로브 쪽이-”
다시 떠올려보니 심취할 만한 듯 성주는 눈을 감은 채 음음,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로 보이는 사내가 미심쩍게 물었다.
“제가 성주 님의 취향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사내에게는 손대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여태 본 어떤 여자보다도 곱더군. 살도 눈결같이 하얀 게 도도하니 어쩐지 동하게 만들더구만. 그 정도라면 없던 취향도 생길 수 있지.”
입맛을 다시는 성주를 보자, 무시당해 기분 나빴던 마음은 가셨지만 속성을 달리해 난 무척 찜찜해졌다. 못 볼꼴을 계속 보고 있는 듯하다. 블레셋에게 이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해주면, 그가 과연 성주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할까. 좀 더 감정적으로 무던해진 듯한 그라도 참아 넘길 성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성주의 숨통을 끊어는 놓겠지.
이걸 담아둘 내 머릿속 저장소와 전달할 입이 더러워지는 기분이었지만, 난 그 방법을 최후의 방책으로 고려해 넣었다. 동시에 떠올린 내가 대단히 타락한 듯한 새로운 발상 또한 뇌리를 스쳤다. 이제 난 정신계 마법을 쓸 줄 아니까, 성주에게 조금만, 아주 조금 손을 대서 그 마음속의 욕망을 부풀린다면…….
나는 살의로 번들거리는 블레셋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일의 결과로 성주는 시체조차 온전하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죄책감은 놀랍도록 미미했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블레셋이 내 수작을 혹시라도 알아챈다면?
……그건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네. 내가 망상에 잠기는 동안에도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암, 성주 님 안목이야 워낙 높으시니, 그럴 만도 하지요.”
“이딴 소리를 해서 무얼 하겠나, 마탑의 시온이라니 어디 손도 못 댈 건데.”
“근데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겁니까.”
“난들 아나, 마탑인지 뭔지 어디 콧구멍에 붙었는지 원. 매번 정제수를 싹 쓸어가니 솔직히 아깝긴 해. 하지만 어쩔 수 없잖나. 꼼수라도 부렸다간 내 대갈통을 잘라버리고도 남을 작자들이니 말이지.”
“정제수를 꼬박꼬박 챙겨가는 대신, 일은 확실히 해주지 않습니까. 그놈의 새 모가지만 따버리면…….”
“그놈의 불새만 사라지면 설산으로 도망간 것들은 죄다 얼어 죽겠지. 은혜도 모르는 것들! 누구 덕에 기드온이 이만큼 살고 있는 건데. 한낱 미물에 미혹되어선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가니, 쯧쯧.”
“아량을 베푸셔서 그것들을 잡아다가 기드온의 공용 노예로 쓰시지요. 그들도 인력인데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흠, 그것도 생각해볼 만한 일이군. 그렇게 되면 그들의 관리를 자네에게 맡기지, 카론.”
“영광입니다. 성주 님.”
기분이 풀린 성주와 카론이라고 불린 사내는 하하 웃으며 앞으로의 찬란한 미래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말을 가릴 필요가 없기에 그러했겠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악당의 표본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불새의 본심을 의심할 필요도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명백했다.
그러면, 자 어떻게 한다. 고민 속에서 난 근처에 서 있는 하녀의 머릿속에서 성주에 관한 정보를 빨아들였다. 그러나 바라던 성과는 주어지지 않았다. 성주는 약점이 거의 없어 보였던 것이다. 첩들은 여럿 두었으나 돌아가면서 총애할 뿐 유독 아끼는 누군가는 없으며, 본처는 아직 들이지 않았고 자식도 아직 없다고 한다.
성주 자리에 오르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는지 그나마 있는 형제는 모조리 죽었다. 성주는 혈혈단신인 몸이었고, 교활하며 주제를 알아서 강자 앞에서는 몸을 수그렸다. 아마 누군가를 믿지도 않으리라.
거기까지 이르자, 난 문득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성주의 부탁을 바꿀만한 방법이라. 그건 꽤 그럴듯했지만, 구체화하기에는 좀 일렀다. 그리고 성주의 부탁을 다른 것으로 바꾸게 하더라도, 빙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모든 게 무의미했다. 어쨌든 마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정제수이니까 말이다.
성안을 헤매어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지언정, 내 몸으로 돌아오는 건 그저 돌아가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제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어젯밤 이동했던, 설산의 그 장소를 떠올렸다. 고유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다면, 한 번 가본 곳으로 다시 이동하는 건 손쉬운 일이다. 몸 안쪽에서 일어난 자연스럽게 몸을 감싸고 돈 직후, 난 발밑에서 부서지는 눈의 감촉을 느꼈다.
머리 위로 하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입에서 나오는 숨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구태여 헤맬 필요가 없었기에, 내가 이동한 곳은 붉은 환영이 서렸던 곳이 아닌 엘로힘의 알이 있는 그 동굴 앞이었다.
동굴 안으로 발을 막 들이려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로브를 입은 한 사내가 날 향해 손가락질하며 경악하여 외쳤다.
“당신은!”
그 옆에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서 있었다.
“테드, 그녀를 아세요? 마법사라고 하시던데.”
“어떻게 여기에……. 성주가 도와달라고 불러서 어제 도착한 마법사야!”
“네에?”
성에서는 본 적 없는 얼굴이니 아마 마을에 들어설 때 날 보았는지, 테드라 불린 사내가 경계심 어린 기색으로 내게서 거리를 두었다. 쟌느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지!”
삿대질하면서 그는 마력을 일으켜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 나오면 당장에라도 공격할 듯이 기세를 세웠다.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사인지 대충 가늠할 수 있는 것 보니, 그리 강한 편은 아닌 듯하다. 그러므로 걱정할 필요 없이 내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아마도 쟌느가 말한, 자리를 비웠다던 마법사가 그인 듯싶었다. 엘로힘의 말을 전달하는 역할도 할 테지.
“저, 저어? 테드. 이러지 말아요. 저분은 해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쟌느가 불안한 듯이 그와 나를 번갈아 보며 묻자 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테드라는 사내가 의혹 어린 눈길로 쟌느를 응시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느냐니요. 어젯밤 찾아오셨을 때에도 아무 일 없었는…….”
“지금 외부인을 여기로 들였다는 말이야!”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쟌느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변명했다.
“아니, 제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엘로힘 님께서-”
[자는데 밖에서 시끄럽게 굴지 마.]
동굴 밖으로 불그스름한 빛과 함께 마법어가 흘러나왔다. 살랑거리며 붉은 깃의 새 한 마리가 날아오자 사내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엘로힘 님.]
[흥분할 것 없어, 테드. 내가 초대한 손님이니까. 오늘은 아니지만?]
가늘어진 눈매의 틈 사이로 불새의 눈동자가 나를 슥 훑었다. 한 번 심술을 부려보는 듯하다. 어쭈, 아쉬운 게 누구인데 나한테 이런 태도야? 전날 모호한 말을 해놓고 대꾸해주지 않은 것에 맺힌 게 있었던 난 거만하게 쏘아붙였다.
[날 박대할 처지가 아닐 텐데.]
[그건 사실이지. 일단 들어오겠어?]
[그래.]
나와 엘로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은 사내는 동굴 안쪽으로 사라지는 불새를 따라 발을 들이는 날 막지 않았다. 그는 복잡한 표정이 되어 내 뒤를 따랐고, 쟌느 역시도 함께였다.
알이 자리한 동굴의 내지로 들어서자마자, 난 주변을 빠르게 마력으로 탐색했다. 산 깊숙한 곳에 패여 있는 동굴이라고는 하나, 이 산맥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리 깊다고는 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그러나 빙정과는 확실히 이어져 있는지 동굴을 둘러싼 지맥에서 살갗을 도려낼 듯한 지독한 한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엘로힘이 그를 흡수하여 이 동굴 안을 자신의 기운으로 적시고 있지 않았다면 마법사인 나와 테드는 그렇다 치고 쟌느는 산채로 얼어버렸으리라.
[빙정의 흡수는 얼마만큼 진행되었지?]
[더뎌. 빙정의 성장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서, 흡수하여 내 몸으로 치환하는 데 시간이 걸려. 하지만 알의 부피가 커지고 있으니 가속도가 붙어서 반년 안에는 부화할 수 있을 거야.]
[반년이라…….]
그 정도면 성주가 내년 치 소원을 빌기 전에 완전히 일이 끝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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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되었는데도 블레셋은 성주에게....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