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달무리 금빛 숲-76화 (76/155)

00076  5. 탑의 계약.  =========================================================================

“블레셋!”

화색이 만면한 채 굽실거리는 성주를 뒤로하고 빠져나온 즉시, 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블레셋은 말할 테면 말해보라는 듯 날 돌아보며 눈꼬리를 슥 올렸다. 주위에 지나다니는 시중인을 의식해서 난 소리를 낮추었다.

“이야기를 좀 하죠.”

“성주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이미 결정된 사안이야. 그리고 그 부탁은 무리한 것이 아니었고, 마탑의 권익에도 해가 가지 않아. 그러면 마탑으로서는 그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지.”

블레셋은 방으로 향하며 단숨에 말을 흘려냈다. 오로지 이해타산만을 빠르게 계산하여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다. 그의 결정에 이의가 있었던 난 애써 솟구치는 반발심을 눌러 참았다. 난 그를 따라왔을 뿐이므로, 내게 그의 임무 처리에 대해서 의견을 낼 권리가 없단 걸 알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임무는 블레셋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니. 그리고 블레셋에게는 가뜩이나 사이도 별로인 나를 배려할 이유도 없었고.

하지만 그의 승낙은 조급스럽도록 빨랐고, 그 때문에 난 당황하다 못해 성이 났다. 적어도 내겐 그리 간단히 결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주는 척 보기에도 자기 잇속만을 차리고 있었고, 나는 그가 악인이라는 걸 거의 확신한 터였다. 그 순간 블레셋의 말은 악인에게 협조하겠단 것처럼 여겨졌다.

사람들의 눈 때문에 언성이 높아질까 봐 입을 꾹 닫고 속을 앓다가,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에는 마음도 다소 가라앉아서, 차분한 목소리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불새의 알을 깨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

성의 없이 대꾸하며 그대로 걸어간 그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문득 틀어진 블레셋의 시선이 저 멀리 불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설산을 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눈에는 기드온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던 푸르른 신록이 깃들어 있었다.

난 찰나처럼 시선을 빼앗겼다. 금빛 정수리에서 이마로, 콧날로, 이어 턱에서 목까지 떨어지는 옆선이 유려하여, 섬세하게 조각된 카메오를 떠올리게 한다. 실지로 햇살을 머금은 그의 피부는 하얀 패각처럼 은은한 윤이 났다.

그리고 블레셋은 인간답지 않은 아름다움만큼이나 비인간적인 마탑의 시온이었다. 이전의 그는 그렇지 않았지만, 변화를 마친 그는 무질서한 감정의 혼돈을 잃었고 그리하여 다른 시온들과 유사하게 냉담해졌다.

어쩌면 그들이 살아온 오랜 세월이 그들을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따스하거나 보드라운 감정에서 무뎌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고목인 그들을 그에 비하자면 묘목일 뿐인 내가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일순 그는 감정이 깃들지 않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지?”

“그야.”

이대로 가면, 성주에게만 좋은 일이 될 게 뻔했으니까. 이 일이 미칠 파급을 생각하자면, 좀 더 사정을 알아보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옳았다. 그리고 그 옳음은 성주에 대한 악감정과 쟌느의 이야기를 들은 뒤 이곳 사람들을 안쓰럽게 생각한 것에 기인한 터였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어젯밤에 잠깐 보았을 뿐인 그 불새 엘로힘은……. 그래, 사람 같았다. 무수한 종족이 상존하는 이곳 세계에서 실지로 사람처럼 대우해야 할 생물의 범위는 상당히 넓었다. 지성체이고 이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엘로힘도 한 명의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은 누군가의 욕심에 희생당해서는 안 되었다. 이세계의 도덕의식이 어떻든 간에 더욱이 그는 무고하고 또한 이로운 존재였기에.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블레셋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 혹은 그가 이해하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성주가 싫기 때문인가?”

“성주가 싫은 건 맞아요.”

“나는 다를 거라고 생각해?”

블레셋이 고운 미간을 언뜻 찡그렸다.

“너보다 내가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어. 성주에게서는 지독한 악취가 나지. 속이 그을린 듯이 검고 음흉하며 끈적끈적한 탐욕으로 가득한 자야.”

혐오감이 깃든 평가에 나는 도리어 반문했다.

“그런데 왜 블레셋은 성주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하죠?”

“그게 임무니까.”

블레셋은 먼 곳에 두던 시선을 내게 돌려 언짢은 듯이 말했다.

“마스터는 비정한 분이시지. 원하는 것만 취할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그러니까 이런 쓰레기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우리의 일인 거지. 앞으로 너도 익히 겪게 될 텐데.”

암담하게 들리는 소리에 난 눈썹을 들었다. 내 반감을 이해한 듯이 블레셋이 누그러진 투로 말을 보탰다.

“마탑이 하는 일은 대개 정당하지 않아. 그저 이해득실만이 고려될 뿐이지. 우리는 따라야 할 뿐.”

블레셋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던 난 빤히 그를 응시했다. 그의 말은 일견 타당하게 들리지만, 허점을 품고 있었다. 마탑의 임무를 수행하는 건 결국 시온. 그저 마탑의 뜻에 따를 뿐이라는 건 결과의 책임을 벗기 위한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할 뿐이다. 시온은 의무와 권한 사이에서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었다. 그 더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를 근거로 난 항의를 꺼냈다.

“최소한 더 나은 방법을 찾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봐요.”

피식, 블레셋은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앞으로 수행해야할 수백 수천의 임무를 생각해봐. 그 모든 임무에, 너는 그럴 수 있나? 부질없는 일이야.”

블레셋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다. 그는 혹독하도록 긴 세월을 마탑의 시온으로 살아왔으니……. 매번 주어지는 임무마다 도덕적인 심판대에 오른다면, 매번 가책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항상 바람직한 방법을 찾아내어 이상적으로 임무를 해결하기는 어렵겠지.

처음에는 양심에 매여 애쓰던 사람도 그 무력한 순간에 지치고, 차츰 노력을 게을리하게 될 터였다. 죄의식은 통증과 같아서, 익숙해지는 어느 순간 떠올리지 않게 될 것이니. 종래 마탑에 만연한 부도덕에 함몰되어 버리겠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마탑의 시온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거듭하는 고뇌를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런 심정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공감하지는 못하기에 난 또렷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앞으로 치를 수백 수천의 임무는 미래의 일이고, 지금 이 임무는 현재예요. 현재의 나는 그 노력이 부질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은 현재를 사는 동물이니, 훗날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속병을 앓을 듯한 임무를 계속 받아 수행하기보다는, 난 반드시 이 마탑을 벗어날 테니까.

“그래, 젊음은 정의롭지.”

비아냥거리는 투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무심했다.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재주껏 해보라고. 난 휴양 온 것처럼 생각할 테니까.”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서 시간을 끌면 성주도 속이 좀 타겠지. 블레셋은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내 그는 낮잠이나 자야겠다고 말하며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난 멀뚱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그가 앉아 있었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도 난 시간을 번 건가. 하기야 샤자한에서는 시간을 벌었다고 할 수 없다. 란델은 내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움직였고, 나는 남은 그대로 나름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블레셋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음껏 해보라는 듯이 말했다. 그건 당분간 손을 떼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새삼 깨달은 건, 블레셋은 란델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제야 난 블레셋보다 나를 더 만만하게 여겨서 불러냈다는 듯한 불새의 말을-내가 별이니 어쩌니 이상한 소리를 했던 걸 떠나서- 일부 이해할 수 있었다. 란델이라면 블레셋보다 엄하고 틈 없이 굴어서, 내게 기회조차 안겨주지 않았을 공산이 높았다. 샤자한에서도 그러했기에, 내가 마스터를 찾지 않았던가. 엘리야였다면 특유의 페이스대로 날 꼼짝 못 하게 휘둘러 버렸을 것 같다.

그들에 비하자면 확실히 블레셋은, 이렇게 표현하기에는 그 냉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물렁한 구석이 있었다. 란델이나 엘리야가 완연한 어른이라면, 블레셋은 나이 차 얼마 나지 않는 선배 같은 느낌이었고 그건 그만큼 더 관계가 대등하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기에 덜 완고하고, 더 물러서 내 말을 들어주는 듯싶었다.

……어쩌면 그가 내게 지은 죄가 있기에 조금쯤 양보해 주는 게 아닐까. 내가 블레셋의 속마음은 알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여하간 기회가 주어졌으면 유용하게 써야지.

난 턱을 괸 채 설산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블레셋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는 했지만, 시간을 끌고만 있으면 성주는 자신의 부탁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내가 필히 해야 할 건, 성주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

그가 얼어붙은 기드온이 녹는 게 정제수를 계속 얻는 것보다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게 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탑이 기드온에서 정제수를 대신해 대가로 취할만한 것도 모색해야 한다. 그건 틀림없이 정제수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겠지.

하지만 마력석이 그토록 중한 것인데, 정제수를 대신할 만한 게 대체 이 척박한 영토에서 뭐가 있지? 차라리 빙정을 통째로 어떻게든 분리해내서 탑으로 가져가면…….

마탑에 마법사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란델의 말이 뇌리에 스쳤다. 정제수를 정제할 만한 인력이 마탑에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그 형성 원리를 잘 모르지만, 정제수가 오로지 빙정의 존재를 기반으로만 생성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기드온은 필경 정제수가 만들어질 만한 그 외의 모든 여건을 갖추고 있으리라.

교활한 새대가리. 결국 저도 방법은 모르면서 도와달라고 한 거야? 나만 골치가 아프잖아. 난 불평스럽게 투덜대면서 골치가 아파져 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과부하가 걸려 얼음을 이마에 대고 싶은 기분이다.

그 정제수. 실은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성주를 잘 구슬려 부탁을 다른 것으로 돌려놓는다고 쳐도, 마탑에서 과연 빙정을 흡수하려는 엘로힘을 그대로 내버려둘까? 농부가 논밭의 잡초를 제거하듯 손쉽게 뿌리째 뽑아버리려고 들 텐데.

만약, 기드온에 정제수와 녹음이 공존할 수 있다면……. 그 가정에 생각이 미치자,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어쩌면 마탑의 마법이 그걸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내 미력한 마법 실력이 그걸 이루어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내가 가진 지식으로는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기드온이 얼어붙은 건, 빙정의 마력이 너무도 강력하여 온 영토에 영향력을 떨치기 때문이다. 점점 더 그 힘이 자라나고 있으니 정제수라는 부산물을 얻고 있다고는 하나 언젠가 그나마 사람 살 곳인 이 기드온의 영지마저 완전히 얼어버릴지도 모른다. 그 위험성을 부각한다면, 성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비록 엘로힘이 지금 빙정을 흡수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이 기드온에는 얼음의 마력이 가득하다. 그런 걸 볼 때 그도 빙정을 아주 일부밖에 흡수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엘로힘이 빙정의 힘을 다소 흡수하게 하여 분리해낸 뒤, 빙정이 더 커지거나 영지에 추위를 유발할 수 없게 제한하는 결계를 쳐두는 것. 빙정이 정제수를 생산해내게는 하되, 기드온에 영향을 줄 수 없도록.

……방안을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너무도 고난도의 마법이며, 거창한 일이었다. 체감하기에 내가 이제껏 행한 모든 마법을 한 번에 펼쳐내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설계도만 던져주고 집 한 채를 지어내라는 것과 엇비슷하다.

더군다나 그 이전에, 내가 아쉬운 모습을 보이면 바로 치고 들어올 그 교활한 성주를 상대로 설득해야 한다니. 그는 샤자한의 왕보다 더 어려운 상대일진대.

하지만 틀림없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엘로힘은 내게 도움을 구했고, 그리하여 난 기드온의 사정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알게 된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더치 생맥주라는 걸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요.

더치커피 원액+생맥주

태음님 Sun_Pk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한유주님이 서은기님인 듯한데....이러면 닉네임 바꾸신 걸 까발리게 되는 걸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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