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5. 탑의 계약. =========================================================================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방 밖으로 흘러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밝아올 무렵이었다. 비척거리며 소파에 앉기 무섭게, 블레셋의 방문이 열렸다. 왔던 그대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하얀 로브 차림은 퍽 상징적으로 그가 이곳에 그저 임무를 수행하러 왔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지난밤 나 역시 잠들지 않았지만, 그 역시도 휴식을 취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쩐지 얼굴에 열기가 뻗어 오르는데 그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매달렸다.
“어젯밤에는 즐거웠어?”
뜨끔한 난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가늠해 보았다. 역시 내가 어젯밤에 나갔던 걸 알아챈 걸까. 이전의 앙금이 남아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와 나는 친하지 않았고 그에게 모든 걸 소상하게 말해야 할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터놓고 토로하기는 꺼려지는 감이 있었다.
“취향이 아니었나?”
가만히 중얼거리며 그는 내 앞의 소파에 몸을 걸쳤다. 그제야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민망한 기분을 누르며 나 역시 질문을 돌려주었다.
“당연히 아니었죠. 블레셋은요?”
“말했잖아? 향수 냄새, 불쾌해.”
쯧, 하고 혀를 차며 그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멍청한 성주가 제 취향의 여자만 침실에 밀어 넣으니, 기분이 좋을 턱이 있나.”
“……취향에 맞았으면 괜찮았을 거라는 이야기인가요?”
내가 의구심 어린 트집을 잡자, 블레셋이 고개를 까닥였다.
“글쎄, 내 취향의 여자라.”
생각해보지도 못했다는 투였다. 그리고 블레셋은 확실히 남자로 변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벌써, 라고 하기엔 묘하지만 딱히 여자 취향이 형성되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걸 말해줘야겠군.”
뭘 말해줘? 네 취향을? 그가 한 말이 어쨌거나 무슨 뜻인지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으므로, 난 질문을 삼켰다. 그는 손가락으로 소파를 툭툭 치며 무언가 생각에 잠겼고, 난 제대로 자지 못해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지난밤 있었던 일들을 되새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중인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성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저를 따르시지요.”
***
난 질린 눈으로 통으로 구워 나온 멧돼지 구이를 비롯하며 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음식물들을 응시했다. 곧 테이블이 무너져내리지 않을까 우려되는 풍성한 식탁이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아침부터 호사스러운 만찬을 즐기는 건, 단순히 그가 성주이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쟌느가 말했듯이 그가 수탈을 일삼는 군주라 그러한 걸까.
어쨌든 내가 그에게 가진 선입견에 힘입어, 그 가정은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어제 느낀 혐오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를 마주한 난 감정을 드러낼 뻔했지만 용케 눌러 참았다. 딱딱한 얼굴을 한 나와 블레셋에게 친근한 태도를 고수하며 성주가 예의상의 인사말을 몇 마디 던졌다. 그리고 이어 호쾌하게 웃으며 블레셋에게 결국 그 일을 언급하고 말았다.
“지난밤 제가 들인 아이를 취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라도 있으셨는지. 제 애첩 중 가장 예쁜 아이였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자기 애첩을 들여보냈단 말이야? 사람을 얼마나 물건 취급하는 거면. 하하 웃는 얼굴을 보니 식욕과 기분이 동시에 수직 하락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살피고자 마음을 굳혔는데, 성주는 알아서 착실하게 제 이미지를 깎아 먹고 있었다.
“성주의 취향은 내 취향과 좀 다른 것 같아. 박색인 여자를 골라 넣으니, 마음에 찰 리가 있나.”
접시를 들여다보며 블레셋이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심이라는 양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헷갈렸다. 그래서 이왕이면 취향의 여자를 들여 달라는 거야, 뭐야?
결벽스러운 흰 로브의 그답지 않은 발언에, 뻔뻔스러운 성주도 일순 당황을 느낀 듯했다. 그는 헛기침하며 억지로 웃음을 내보였다.
“하하, 그렇습니까? 이거 참, 마탑에서는 저희와 보는 눈이 다른가 봅니다. 그러면 어떤 여인을 선호하시는지 말씀만이라도 해주시면, 맞춰보겠습니다.”
블레셋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턱을 괴었다.
“내 취향은 좀 까다로워서.”
“마법사님의 까다로운 취향에 맞추는 게 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염려 말고 말씀해주시지요.”
블레셋의 고압적인 태도를 마주하고 있자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줄곧 사근사근함을 유지하는 성주도 참 심계가 깊은 사람인 듯싶다.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재촉하자, 블레셋이 ‘그래? 그러면.’ 하며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기본적으로 어린 여자는 질색이야. 내재한 생명력이 완숙되지 못해 설익은 냄새가 나거든.”
“그, 그렇습니까.”
같은 남자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블레셋의 말에 성주의 표정은 점점 가관이 되어갔다.
“최소한 80세는 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젊음은 유지하고 있어야겠지.”
“저, 젊음을 유지하는 80세 말씀이십니까.”
“그래, 정해진 수명은 어쩔 수 없으니 곧 꺼질 불길처럼 아름다운 생명력을 품고 있지.”
그리고 블레셋은 놀리듯이 줄줄 조건을 읊어갔다. ‘거절이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라고 보여주는 것 같다고 난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럴 의도이리라.
“체구는 가녀리되 자세가 곧고, 여전사처럼 당당하고 활기가 넘치는 여자였으면 좋겠군. 머리카락은…… 그래, 새까만 흑발.”
80세가 되도록 제 머리색을 하고 있기도 어렵거니와, 이곳 사람들은 척 보기에도 머리색이 밝았다. 나는 흑발이라는 말에 찰나처럼 한 사람을 떠올렸지만, 이내 의식적으로 지워냈다. 그 와중에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유심히 듣고 있던 성주가 난감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채 말했다. 놀라운 표정 관리다.
“하…하. 송구하오나 그런 여자는 저희 영지에 존재하지 않을 듯 하군요.”
“그럴 줄 알았어.”
블레셋이 새침하게 잘랐다. 역시 이딴 시골구석이란, 따위의 말을 꺼낼 듯이 도도한 자태였다. 그리고 세상 어느 나라 가서도 해당하는 여자를 찾기 어려울 성싶은 취향을 들이밀고 무시하는 것에 앙심을 품은 듯, 성주가 일격을 날렸다.
“그런데…… 블레셋 님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 취향이 곁에 계신 아힌 님과 대단히 맞아떨어지는 듯하군요.”
굳이 딴 데서 찾을 것 없지 않으냐는 투로. 나는 움찔하여 거의 동요를 보일 뻔했지만, 블레셋은 짤막한 말로 태연하게 맞받았다.
“80세라고 했잖나?”
힐끔 내 쪽으로 시선을 주는 게 ‘너는 너무 어려.’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 취향의 여자를 찾아낼 수 없다면, 성주의 애첩을 들이밀지는 말아줬으면 좋겠군. 솔직히 수준 떨어져.”
너 따위와 동급이 되고 싶지 않다는 소리를 블레셋은 살짝 돌려 말했다. 정말로 살짝이었다. 그냥 듣기에도 충분히 기분 나쁘게 들리는 말이었으니까. 지난밤의 일이 없고 내가 성주의 실체에 대해서 들은 바 없었다면 블레셋이 조금 심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통쾌했다.
“이거 참.”
성주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뜻을 받잡겠습니다. 그러면 아힌님은 어떻게, 혹시 찾으시는 취향이 따로 있으신지.”
그야말로 예의상으로 물어보는 투였지만, 차마 블레셋처럼 세세하게 조건을 불러댈 수 없었던 난 민망함을 감추며 꿋꿋하게 말했다.
“나는 잠이 많아서 밤에는 잠을 자야 하니 누구도 들이지 말았으면 해요.”
그리고 우리는 다소 조용해진 가운데 식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름대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셈이었던 성주는 일련의 시도가 실패하자 잠시 상심한 듯했다. 사실 그의 방식은 도무지 우리에게 맞지 않아, 의도한 바의 반대 효과를 미치고 있었다. 그의 호의를 거절하여, 어색해지고도 남을 분위기였건만, 성주는 굴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뜸을 들인 그는 조찬이 끝나갈 무렵 드디어 그 짐작할 만한 대단한 부탁-시온이 파견되어야만 했던-을 꺼내놓았다.
“기드온은 지금 아주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난 나도 모르게 슬쩍 블레셋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도 일련의 속사정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성주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일 전, 이 기드온에 괴생물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눈을 현혹하기에 좋은 모습이었지요. 그건 이 춥디추운 기드온을 다 태울 듯이 활활 이글거리는 몸을 한 거대한 불새였거든요!”
과장되게 팔을 벌려 보인 그는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놈은 교활했습니다. 이 기드온에 봄을 가져다준다고 하여, 우리 영지민들을 혹하여 분란을 조장하지 않나, 심지어 저 설산에 둥지를 틀었지 뭡니까? 마탑의 그, 룻 분들과 함께 몇 번이나 병사들을 보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글쎄.”
성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것참, 내가 들은 것과 다른 이야기인데.
“워낙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영물이라 가진 바 마력이 강해서 결계를 깨기가 어렵다더군요. 강력한 환상마법이 걸려 있어서 설산만 들어가면 미아가 되었다가 나오니 놈의 코빼기도 보기 힘들었습니다. 놈이 알을 까고 나오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 저로서는 방도가 없으니 마탑의 마법사님께서 놈을 처리해주십사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영지의 앞날을 근심하는 참된 군주인 양 성주는 정중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나는 성주의 진의를 확인해야만 했기에, 블레셋보다 앞서 입을 열었다.
“그 불새가 알을 깨고 나오면 기드온에 정말로 봄이 올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침착하게 꼬집자 성주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놈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영지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놈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마냥 믿기는 어렵습니다. 빙정을 먹고 강력해진 놈이 이 기드온을 불태우려고 들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상대로의 반박이었다. 그러나 나도 잠 못 이루는 와중에도, 그에 대해서 생각한 바 있었다.
“불새가 알을 깨고 나왔을 때, 그가 만약 기드온에 해를 끼치려고 든다면 그때 해결하면 되는 일 아닐까요.”
성주의 얼굴에 최초로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무어라 논리적인 반박을 끌어내려고 고심하는 듯했다. 그때 블레셋이 불쑥 중얼거렸다.
“빙정을 먹는다라…….”
성주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조급하게 이번 부탁이 자기에게만 이로운 게 아니라는 양 말을 쏟아냈다.
“예, 예. 맞습니다. 놈은 기드온의 빙정을 흡수하고 있지요. 때문에 아시다시피 저희가 생산하는 정제수는 빙정의 한랭한 마력에서 근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사라진다면 이 기드온은 더 이상 정제수를 만들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저희로서는 더 이상 마탑에 정제수를 보급하지 못하겠지요.”
“그 정제수가 얼어붙은 영지가 녹는 것보다 당신에게는 더 가치가 있나 보군요.”
마력석도 그러하지만 정제수 역시 마법 물품이니, 가격이 높다고 들었다. 더군다나 기드온에서 생산하는 최상질의 정제수란 말할 것도 없다. 성주의 본심에 대한 확신을 얻은 난 즉시 빈정거렸다.
정제수를 팔아치워 얻은 부, 그리고 얼어붙을 듯한 추위를 이용해 영지민들을 가두고 수탈하고 있으니, 변화가 내킬 리 없지 않겠는가. 영지민들에게 평판도 몹시 좋지 않은 듯하니, 아예 군주로서의 그의 기반이 흔들려 버릴 수 있었다. 그에게는 꽤 간절한 문제였으리라.
그러나 뒤이은 대답이 들려온 쪽은, 성주가 아니었다.
“그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야.”
내게 시선도 주지 않으며, 블레셋은 단칼에 잘라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답을 내었다.
“그 부탁, 수락하지.”
============================ 작품 후기 ============================
제가 기다리는 씬이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과 같을 거라고는(...)
보시고 욕하면 어쩌지.
음 이번 챕터는 열 편 안쪽으로 끝날 듯해요.
서은기님 쿠폰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