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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74화 (74/155)

00074  5. 탑의 계약.  =========================================================================

[어려운 질문인데. 성주는 인간이고 인간은 좀 복잡한 구석이 있거든.]

그러나 룻으로는 해결되지 않아, 마탑의 시온을 호출하여 뜸을 들일 일이라면……. 성주의 부탁이 바가 불새가 말한 것과 상통하리라는 건 부정하기 어려웠다.

[왜 블레셋이 아닌 나를 부른 거야? 내 말은, 성에는 나보다 강한 마법사가 있는데.]

[만만치 않은 자야. 이미 완성된 마법사였지. 냉정하게 굳어져서, 의지가 단단해 보였어. 그는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거든.]

그렇다면 난 만만하다는 뜻인가? 제법 불쾌한 소리였기에 난 눈썹을 들었다.

[나도 명령을 받아 온몸이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탑에 속한 자들에게 마탑의 의지는 죽음의 손길처럼 절대적이지. 그 지배력은 영혼까지 미쳐서, 옳고 그름, 선악,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그자는 너보다 강했지만, 깊이 물들어 있었어. 하지만 넌 달랐어.]

[…….]

[너는 그들과 같지 않아. 그게 느껴져.]

끊어질 듯 말듯 가느다란 줄을 튕기는 양, 아슬아슬했다. 무엇이 날 긴장하게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목이 탔다. 나는 처음으로 마탑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마탑 밖의 존재를 앞두고 있었다. 난 초조한 기분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마탑에 대해서 알아?]

[어떻게 모를까.]

알쏭달쏭하게 말한 불새는 날개를 털어내듯이 펼쳤다. 날아가려는 듯이 보여 나도 모르게 손을 내뻗자, 손이 실체 없는 허공을 스쳐 쟌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손님?”

쟌느가 의아한 기색으로 날 바라보자, 난 급히 손을 거두었다. 본체가 알에 잠들어 있으므로, 여기 있는 엘로힘은 환영에 불과할 뿐이었다. 변명과 동시에 전음이 튀어나왔다. 조급스러운 마음 탓인지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탑에 대해서 뭘 알고 있는데? 네가 아는 게 뭔지 말해 봐.]

불새는 빙그르르 허공을 날아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말할 수 없어.]

잔뜩 부풀었던 마음에 일순 바람이 빠져나간 듯했다. 난 추궁하듯이 물었다.

[어째서.]

[나는 그가 두려우니까.]

그라니……. 그러나 두렵다고 말할 이는 명백했기에, 난 바로 엘로힘이 지칭하는 이를 추론해냈다.

[마스터를 말하는 거야?]

[마탑의 탑주, 탑의 주인.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 나는 그를 알아. 아니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정령이며 환수들이 그를 알지.]

[내 도움을 바란다면 마탑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거야.]

어깃장 놓듯이 단언하자, 엘로힘은 신중하게 답변을 모색하는 듯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쳐들었다.

[……말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 그에 관해서 말하는 건 우리에게 금기거든.]

인간보다 더욱 본능적으로 말을 삼가기보다는 상위의 존재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투였다.

[그는 한낱 인간 마법사가 아니야. 왜 그런 식으로 탑을 세우고…….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두고 있다고?]

[뭐 어차피 인세에 개입할 수 없으니, 상관없는 건가.]

엘로힘은 빠르게 말을 돌렸다. 점점 더 궁금증이 가증되기만 했다.

[마스터의 정체가 뭔데? 왜 인세에 개입할 수 없지?]

[안 돼, 난 말할 수 없어.]

엘로힘은 빠르게 도리질 쳤다.

[내가 너에게 모든 걸 다 말한다면 틀림없이 그가 날 죽일 거야. 그게 느껴져. 그래서 안 돼. 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움직이고 있어. 그가 눈치챌지도 몰라.]

목숨이 걸려 있다니, 더 추궁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원리는 잘 모르지만, 마스터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성싶었다.

[마스터의 이름은 뭐지? 네 이름이 엘로힘이듯 그에게도 이름이 있을 거 아냐.]

이름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저 먼 옛 시대의 고서적을 뒤져서라도 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또한, 알고 싶었다. 그리고 실은 그 알고 싶다는 마음이 놀랍도록 강렬하게 충동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우리에게 왕과 같아. 인간들은 왕을 폐하라고 부르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잖아? 나는 허락받지 못했기에 그 이름을 발설할 수 없어. 이해해 줘.]

그가 말한 모든 이야기가 진실의 언저리만 훑고 지나가, 듣는 나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우리와 같은 마력생명체들은 보이지 않은 힘의 제약을 받고 있지. 그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워. 심지어 말 한마디마저도.]

[마스터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나에게 네 사정을 말하기보단 마스터에게 잘 말해보는 게 어때? 말했지만, 난 마스터의 명에 따를 뿐이라고.]

[그가 내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어.]

엘로힘은 담담하게 토로했다.

[내 하찮은 목숨이 꺼지든 이 기드온이 영구히 얼어붙어 사람들이 고통받든 그에게는 상관 없는 일일 거야. 다만 너는…….]

그는 뜬금없는 소리로 말을 맺었다.

[이를테면 유성이지. 그래서 희망이 있는 거고.]

***

그 후로 여러 차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대답을 요구했지만, 엘로힘은 더 말할 수 없다며 모른척했다. 그리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오히려 나를 내몰기까지 했다. 부탁하는 것치고는 뻔뻔스러울 만치 당당한 태도다. 쟌느와 마을 사람 몇이 나를 마을 밖까지 배웅해주었고 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떠난 자리, 성의 그 장소로 되돌아왔다.

짧은 외출을 블레셋이 알아채었을까 걱정했지만, 그가 나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간 난 낯선 잠자리에 누워 가만히 불새가 말한 내용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내가 유성이라고 했지. 유성이라면 비유적인 의미로 외부 세계에서 온 낯선 것, 새로운 것. 내가 이계에서 왔다는 걸 말함일까.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라도 있다는 걸까. 하지만 그게 엘로힘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지? 그건 내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

하지만 엘로힘이 금기에 제한받듯이 내게는 금제가 걸려 있고……. 실상 마스터에게 종속되어 있을 뿐인 내게, 엘로힘은 왜 그리 묘한 뉘앙스로 말을 했던 걸까. 그저 나를 흔들려는 수작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 너머에 알 수 없는 비밀이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건 과거에 내가 품은 의문과 가닥이 닿아 있었다.

애당초 마스터는 왜 나를 구해서, 제자로 삼았을까. 엘리야나 블레셋이 마탑에 들기 전부터 특별한 존재였음은 불 보듯 뻔한데, 나는 왜? 내가 이세계에서 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소용돌이치는 의문에 휩싸인 난, 붉은빛을 따라 설산으로 이동했던 의도처럼 마스터에 대한 상념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한동안 막막한 어둠 속을 배회하듯 단 하나의 실마리라도 움켜쥐려고 머릿속을 헤집던 어느 순간 잠이 몰려왔고……. 난 언제나처럼 본능이 굴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잠을 깨운 것 또한 본능이었다. 샤자한에서 내 잠자리를 덮친 이리스 라하느의 일은 질기도록 오래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떻게 지낼 진 알 수 없으나, 그녀에게 내가 겪는 것과 같은 악몽을 선사해주고 싶은 악의가 때때로 속에서 뭉클뭉클 샘솟곤 했다.

그 일 이후로 사소한 기척에 민감하게 된 난, 잠을 일깨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번에도 예민한 신경이 과민하게 반응한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무심코 시선을 들었을 때, 난 침대 가까이에 서 있는 하얀 형체를 발견했다.

하얗고 긴 천 같은 걸 뒤집어쓴 무언가가 앞에서 웅크리는 걸 목도하니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 안에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도 숨어있을 듯하여, 방안의 안온한 어둠이 순식간에 공포로 닥치는 기분이었다. 오래된 성이니 유령이라도 사는 건가?

난 처음 마스터를 만났을 때 이상으로 심장이 떨어질 만치 놀라서, 화급히 벽에 등을 가져다 붙였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며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겁먹었단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난 최대한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야.”

날 불러낸 불새도 있었으니 성주에게 원한을 갚아달라는 영혼도 있을 법하다.

“곤히 주무시기에 물러나려고 했는데, 잠을 깨워 송구합니다.”

머뭇거리며 말하는 음성은 낮고 공손했고,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마음이 놓이는 것도 찰나 잔뜩 놀란 데다가, 다 큰 처자의 방에 남자가 함부로 들어왔다는 데 생각이 미친 난 신경질이 솟구쳤다.

“일어나서 그 천 쪼가리나 벗고 얼굴을 보여.”

짜증스럽게 명령하자, 그가 조심스레 웅크린 몸을 폈다. 그 얇은 하얀 천이 무언가 했더니, 베일이었던 듯싶다. 양손으로 베일을 걷어 내리자, 희고 반듯한 얼굴이 드러난다.

투명한 초록색 눈동자에 연한 금발을 가진 내 또래의 남자였다. 체격이 크지 않고 피부는 상아처럼 고왔지만 소년이라기보단 청년에 가까운 듯싶었다. 화사하다고 표현할 만한 미인이었는데, 그간 마탑의 시온들을 보아오면서 눈이 높아지지 않았다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이 풀려버렸을 듯하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차림이 묘해 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발치까지 내려오는 베일을 벗고 나니 상체는 목이 깊이 파며 가슴의 절반이 드러날 지경이었고, 그나마도 잠옷처럼 얇은 옷깃이었다. 여기 시종들은 원래 저런 옷을 입나? 잠자다가 잠깐 살피러 온 건가.

내일을 위해서라도 빨리 다시 잠들고 싶었기에, 난 의구심을 뿌리치며 답을 재촉했다.

“여긴 왜 들어왔지?”

그가 다소곳하게 시선을 내리면서 화답했다.

“혹시 밤 시중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밤 시중? 그런 게 왜 필요…….”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말을 내뱉던 내 둔해진 뇌리에 뒤늦게 찬물을 끼얹듯 깨달음이 찾아  들었다. 뺨에 불이 붙는 듯했다. 그의 옷차림과 지금 상황, 그리고 그 ‘밤 시중’이라는 단어가 매치되며 분노와 부끄러움이 동시에 일어나 열기가 머리끝까지 타고 올랐다. 뭐, 밤 시중?

혼란한 와중에도 고양된 감정을 추스르며 난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았다. 아까 낮에도 블레셋에게 여성을 붙인 바 있듯이, 이 성주는 성 접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였다.

그러니 침실에 누군가를 들여보내는 건, 가능한 이야기라는 소리다. 설마 내게도 그럴 줄은 몰랐지만, 성주는 아까 내게 결례를 범했다고 말했고……. 그걸 이런 식으로 보상하려던 걸 수 있었다.

“그으- 옆방에 머물고 있는 내 일행에게도 여자가 들었어?”

“네.”

속이 확확 달아오른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블레셋이 설마 받아들였겠나 싶으면서도, 확인하려 드는 건 곤란한 노릇이었다. 그가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지 않겠어? 상상력이 그리 뛰어난 편도 아니건만, 바로 옆방에서 여자와 뒹굴 그가 떠오르니 민망하다 못해 속이 탔다.

일단, 이 사람을 보내야겠어. 굳게 다짐하면서도 블레셋의 말을 잊지 않았으므로 난 먼저 확인하기로 했다.

“내가 너를 그냥 내보내면 성주가 네 목을 치나? 대답해.”

“그렇지는 아니합니다. 원치 않으시면 바로 나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래, 나는 여자니까 내 취향이 아니거나 바라지 않을 가능성도 고려했겠지. 그걸 떠나서 손님방에 그런 목적으로 사람을 밀어 넣는, 그 자체가 이해가 안 되었다. 당장에라도 나가 성주의 멱살을 잡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그야말로, 야밤에 봉변당한 기분이다. 그리고 심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는지, 그가 몸을 숙이며 빌었다.

“제, 제가 잘못했으니, 부디 화를 푸십시오.”

겁에 질린 채 떠는 모습을 보니, 섣불리 성주에게 따지고 들었다가는, 그에게 화가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필경 그러하리라.

“됐으니 나가.”

주섬주섬 베일을 추슬러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난 이 불편한 경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에 잠겨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복선을 투척한다.

이번 챕터가 끝나면 기다리던 씬이 나올텐데....두근두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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