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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73화 (73/155)

00073  5. 탑의 계약.  =========================================================================

이 새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는 건가? 난 의혹이 담긴 눈으로 이야기가 이어질 동안 꾸벅꾸벅 졸고 있는 쬐끄마한 새를 쳐다보았다.

“수개월 전 엘로힘 님이 서녘 하늘을 붉음으로 가득 채우며 나타나셨어요. 얼음 산맥이 온통 불타는 듯이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이었지요. 그리고 바로 이곳 설산으로 와 깊숙한 곳에 스스로 알로 만들어 심으셨지요. 저 알이 부화를 마치는 순간, 빙정은 사라지고 기드온은 다시 녹음을 찾게 될 거예요.”

희망찬 어조로 토로하는 여인은 마치 캄캄한 새벽이 걷히고 새로 날아든 여명의 빛을 떠올리는 양 환한 얼굴이었다. 나로서는 그 기분을 온전히 알기는 어려웠지만, 겨울뿐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어찌 봄을 바라지 않을까. 회색 하늘만 보고 산 사람이 푸른 하늘을 그리듯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허공에 시선을 두던 여인이 갑자기 화가 치미는 것처럼 낯을 확 찌푸렸다.

“그런데 이 기드온의 봄이 코앞에 있는데 그 탐욕스러운 성주라는 작자는!”

성주? 의아스러운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어머, 외부 분께 이런 말씀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건데.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성주와 갈등관계에 있나. 불새와 빙정과 성주라, 이 세 가지를 엮자니 알듯 모를 듯한 기분이다. 난 생각을 보류하고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말을 못하는데 이름이 엘로힘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죠?”

“마법사님이라면 엘로힘 님의 말을 들을 수 있을 텐데요?”

도리어 반문이 돌아오자, 난 대단히 의아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미심쩍은 눈길로 전음을 건넸다.

[야.]

[응.]

……화답해오는 이건 전음이라기보단 마법어였다. 서로 언어구조가 다른 종족끼리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의지의 언어. 그리고 그를 해석하는 데는 마력이 필요하니 이 엘로힘이라는 불새의 말을 마법사만 알아들을 수 있단 건 사실이리라. 근데 이게 왜 여태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거지? 난 불쾌한 눈초리로 불새를 노려보았다.

[날 왜 불러낸 거야?]

화염이 이는 듯한 붉은 눈이 나를 말끄러미 응시한다.

[네가 날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슬쩍 보니 여인은 내가 불새와 대화를 나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그래, 엘로힘. 내가 왜 너를 도와줘야 하지?]

[내가 기드온을 녹일 테니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알게 될 거야. 그전에, 보여주고 싶었어.]

의뭉스러운 말로 내 의혹을 증폭시킨 엘로힘이 재빠른 날갯짓으로 자리에서 날아올랐다. 따르라는 신호였다. 엘로힘이 아무것도 없는 얼음벽에 다가붙자 붉은빛이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얼음이 녹지 않되, 마치 녹는 듯한 일그러짐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너머로 언뜻 흐릿한 풍경이 비쳤다. 사람이 오가고, 어렴풋이 건물 비슷한 게 보인다. 마을?

“에, 엘로힘 님. 마을로 가시려는 거예요?”

여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날 힐끔대었다. 외부인을 함부로 자신들의 본거지로 들이는 것에 대해서 경계심이 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엘로힘이 먼저 입구 안으로 들어서자, 여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뒤를 따랐다. 난 잠시 조용히 잠들어 있는 알을 바라본 뒤 따라서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지금 에스키모 마을에 와 있는 건가? 난 눈을 끔뻑였다. 북극으로 탐방 온 손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분지였다. 곳곳에 에스키모가 살법한 이글루가 있었고- 아니 실지로 그건 이글루라기보다는 좀 더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춘 설집이었다. 얼음과 눈의 벽돌을 쌓아올려 만들어진 설집은 겨울철 아이들이 쌓인 눈으로 만들어보는 것과는 비할 수 없이 월등히 컸고, 제법 건물다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동화 속 풍경 같지만, 곳곳에 놓인 모닥불 하며 쌓아올려진 장작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임을 실감케 했다. 늦은 밤이라 그림자만 바람 따라 흔들리는 고요함이 배어 있는 이 작은 마을에는, 족히 수십 가구가 머물고 있는 듯이 보였다. 우리를 보고 모닥불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남녀 몇몇이 금세 다가왔다.

“쟌느, 어떻게 된 일이야?”

“이 분은 누구시지?”

탐색의 눈초리가 날 훑는 가운데 쟌느라고 불린 여인이 내 쪽을 바라보며, 아까와는 다른 호의 섞인 표정을 지었다.

“손님이셔.”

내가 이미 온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여인이 다정스레 속삭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오셨어요. 환영해요.”

***

여기서는 불새가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인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난 마을을 잠시 둘러보았다. 뭘 보여주고자 하든, 그래 어디 한 번 봐주지. 그런 알량한 마음으로. 임시로 지어진 돌이나 나무로 지어진 제대로 된 건물이 없는 게 묘했다. 주변 산에서 얼음을 가져오면 된다지만, 우물도 없고 변변한 시설이랄 만한 게 보이지 않는, 임시로 형성된 천막촌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평화롭고, 세상의 온갖 삿된 것과 동떨어져 있는 양 고요하기만 했다.

모닥불 가에 앉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콤한 차를 내어온다. 지난날, 낯선 사람이 준 음료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던 난 남몰래 정화마법을 걸고 차를 마셨다. 달콤하게 몸을 녹여주는 게 퍽 따스했다. 그래, 비록 로브 덕에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더라도 이곳의 하얗기만 한 정경이 내게 한기로 느껴졌나 보다.

더군다나 이 마을 사람들의 옷차림은 기드온이 이제껏 보아온 중에 가장 얇았다. 은은한 화기가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게 엘로힘의 가호가 그들을 추위에서 보호해주고 있는 듯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설산 안쪽의 이 마을이 현재 기드온에서 가장 따뜻한 지역이죠.”

마침 쟌느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 숄을 두른 채 자리에 앉은 그녀는 내게 고구마를 구워주겠다며 불을 뒤적이고 있었다. 불새는 또다시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는데, 나른한 기색이 또 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은 정보가 필요하여, 난 질문을 시작했다.

“이곳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마을인가 봐요.”

“그래요, 임시 거처랍니다. 엘로힘 님이 나타나시기 전, 우리는 기드온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벗어나지 못했단 그 소리가, 마치 감옥에 갇혀있었단 듯이 들렸다.

“현재의 성주는 절대자이고 폭군이에요. 기드온의 성주는 대대로 그랬지만, 이번 성주는 유독…… 가혹하죠. 그에게 백성은 그의 우리 안에 길러지는 짐승이에요. 그래요, 혹독한 추위 탓에 영지 밖에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 그와 그의 부하들은 난폭하고 짐승 같은 자들이에요! 재물이 있으면 빼앗고, 예쁜 여자는 머리채 끌고 잡아다 가서 첩으로 들이고, 길가는 사람을 붙잡아다 싸움을 붙이고…… 뜻대로 따르지 않으면 죽였죠.”

건조하게 가라앉는 음성에 배인 것은 슬픔이라기보단 분노였고, 분노라기보단 시리게 맺힌 한이었다. 불새가 위로하듯 그녀의 목에 머리를 비비자, 쟌느가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내 언니도 그들에게…… 끌려가다가, 도망쳤어요. 그리고 그들은 먹이를 몰듯이 쫓아가서 언니에게…… 몹쓸 짓을 하고 죽였어요. 그 좁을 골목길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죠. 하지만 인근의 집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어요.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죠. 언니의 비명을 들으면서 도와줄 수가 없었어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쩔 수가……. 누구도 저항할 생각 하지 못했어. 도망갈 생각도.”

그녀의 뺨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빨려드는 듯한 그녀의 사연에 소름이 끼치고, 이내 분노가 확 치달았다. 가슴 속에 묵직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얹힌다. 이야기를 꺼낸 그녀가 의도한 바였겠지만, 성주에 대한 반감이 참을 수 없이 치솟았다.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다. 그 호탕한 웃음이며 낯짝을 떠올리자 혐오감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기드온의 성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그 때문에 사람이 산채로 얼어붙는 밤의 추위에서도, 최소한 삶을 이어갈 수 있죠. 기드온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까지는 자그마치 열흘 거리야. 가다가 얼어 죽는 게 빈번하죠. 게다가 그쪽 영지에선, 도망쳐오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다시 기드온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요. 영지 밖으로 도주하다가 잡히면 일가족 모두 사형이니까!”

“…….”

“기드온은 지옥이었어요. 모두가 살기 위해 숨을 죽이고 땅을 기었죠. 그들의 눈에 띄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말소리가 이어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무겁고, 불편해졌다. 그 성주가 도움을 구하려고 초대한 이가 시온이며, 마탑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기에.

“우리는 다만 기도했죠. 불새가 나타나 이 땅을 녹이기를. 언젠가 그렇게 되면……  이 모든 게 달라지리라고 믿었죠.”

자기 아이라도 그리 어여삐 여기지는 못할 듯싶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쟌느가 불새를 바라보았다. 저편에서 사내 한 명이 다가와 쟌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슨 우중충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제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잖아.”

“우리 얘기를 들려드리고 있었어. 이분은.”

쟌느의 눈길이 내게 닿았을 때, 난 송곳에 찔리는 듯한 따끔함을 느꼈다. 죄짓다 들킨 양 움찔하는 나를 향해 그녀는 신뢰를 담아 말했다.

“엘로힘이 초대한 손님이잖아. 이런 적은 처음이지?”

“그래. 마법사님이라고 하셨죠? 우리에게도 마법사님이 계셔요. 그분이 엘로힘 님과 소통하여 우리를 이끌어주셨죠, 감사하게도.”

“성을 떠나 이곳에 자리 잡는 건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모두가 부화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머지않아 엘로힘 님이 새로이 거듭나시면…….”

그들의 만면에 희망이 배어 있었다. 희망이 없는 인간이 불우하다는 걸 볼 때 여기 사람들은 그래, 적어도 희망을 안고 있어 변변한 시설도 없는 이런 산속에서 불편한 삶을 사는 게 분명함에도, 행복해 보였다. 물속에 가라앉는 듯이, 침잠된 기분에 잠긴 내게 엘로힘이 말을 걸었다.

[그들이 간절히 봄을 기원하여 내가, 이 자리에 왔지.]

내 추측이 맞는다면……. 난 자못 날카롭게 찔렀다.

[넌 빙정을 먹고 사는 새 아니야? 실은 그래서 온 거 맞잖아.]

그간 마법에 대해서 배운 바 있어, 마법생물체의 생리나 자연계의 논리에 대해서 난 꽤 터득하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불새의 습성이 저와 반대되는 힘을 먹어치우는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맞아, 하지만 그들이 날 부른 것도 맞아. 빙정의 마력이 강렬한 이 땅에서 애타는 염원은 마법이 되니까.]

[날 부른 이유는 내가 마법사이기 때문이야?]

[응, 그것도 강력한 마법사지. 너라면 내 알을 깨트릴 수 있을 거야.]

솔직하다 못해 섬뜩한 소리에, 난 표정을 굳혔다.

[난 그럴 생각이 없어.]

[그럴 생각이 없어진 거지. 내가 너에게 날 죽이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알려주었으니까.]

[내가 못된 마법사였으면 네 알을 본 즉시 구워먹었을지도 모르는데 뭘 믿고 날 불렀지?]

[나는 이유 없이 생명을 해하지 않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어. 너는 진실을 안다면 그럴 수 없는 사람이야.]

……교활한 새대가리는, 영물이라 그런지 몰라도 날 잘 알았다. 그럴 수 없는, 그 말에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했다. 내 보잘것없는 도덕심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실지로 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내가 이 사실을 모른다면 너를 해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 넌 그래야 할 거야. 그게 성주의 바람이니까.]

붉은 눈이 나를 직시하자, 속이 얼어붙는 듯했다. 난 침착하게 물었다.

[네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왜 성주가 기드온이 녹는 걸 반대해야 하는 건데? 이 사람들은 그를 적대하는 것 같긴 하지만, 자기 영토가 살기 좋아진다는데 어느 성주가 싫어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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