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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72화 (72/155)

00072  5. 탑의 계약.  =========================================================================

그러나 곧 충동이 얄팍한 경계심을 이겼다. 난 무얼 두려워하고 있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든, 이곳에 앉아 부질없는 상념에 허덕이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아. 홀리듯이 천천히 앞으로 뻗어 간 손이 본능처럼 마력을 떨쳤다.

순식간에 구현된 마법이 나를 감싸 안았다. 발밑의 감촉과 대기와 그 모든 것이 변화를 얻는다. 한 걸음 내딛자 얼음 눈이 퍼석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난 단숨에 공간을 도약하여 이곳, 얼음 바람이 휘몰아치는 설산에 서 있었다.

달빛을 반사하는 은색의 대지에 서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 은은한 어둠만이 그림자처럼 내려앉은 실로 고독한 장소였다. 싸라기눈처럼 부서지는 눈안개 속에 있자니, 설녀가 등장할 듯하다.

그리고 내가 찾아온 붉은빛의 정체가 무언지, 난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었다. 어떤 불도 쉽사리 잦아들 것 같은 이 장소에서, 불의 새라니. 활활 타오르는 불길 이는 날개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온전히 불의 형상을 하고 있음에도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는 게, 놀랄 만치 생생하다.

전설에 나오는 불사조가 이러할까. 날개를 퍼덕여 보인 불새는 내가 다가서자마자 놀리듯 한달음에 멀어졌다. 도망치는 건가? 그러나 불새는 나와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자 자리에 멈춰 선 채, 공중에서 이지러지며 불길을 자아냈다. 따라오라는…… 뜻인가.

“엘리야?”

기시감에 난 그의 이름을 뇌까렸다. 하지만 그가 이런 방식으로 나를 초대할 연유는 없다. 하물며 탑을 떠난 이 시점에서- 이 독특한 초대를 어떻게 할까 가늠해볼 것도 없이, 난 선뜻 걸음을 내디뎠다. 신중하게 굴기에는 눈앞의 광경이 나를 너무도 매혹시켰다.

얼어붙은 산에서, 불새를 따라가는 마법사라. 마법사 대신 소녀라는 단어를 넣는 쪽이 더 신비로웠겠지만, 날 소녀라고 표현하는 건 좀 멋쩍은 일이었다. 그리고 동화가 무너지는 것보다야 애초에 현실감 있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불새는 천천히 날갯짓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나비를 쫓는 아이가 되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십여 분 쯤 걷자 지치지는 않았으되, 내 모자란 인내심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느냐고 불평을 토해냈다. 난 혹시 저 새가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얼마든지 빨리 날아도 따라갈 수 있으니 어서 목적지로 인도해달라고 독촉할 마음을 품었다.

내가 조급한 짓으로 이 기묘한 산책의 무드를 박살 내기 전에, 다행히 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얼음 동굴이라니. 함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세련된 방식이다. 성주가 녹록지 않은 이라는 건 경고 받았지만, 그리 섬세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걸려들어도 될 만큼 성의가 있다.

다분히 비논리적인 이유로 난 흔쾌히 이 초대에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을 대비해 몸에 결계를 둘러내고, 어느새 동굴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불새를 따라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살을 에는 바람이 멎었음에도 여전히 온도가 낮은 동굴 안은 냉동고를 연상케 했다. 안쪽으로 사람 네다섯 명이 걸을 만한 폭의 길이 깊숙이 뻗어 있었다. 바닥이 온통 빙판이라, 난 걷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난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녹고 얼어붙고를 반복하였다면 바닥과 벽면이 울퉁불퉁해야 할 텐데, 동굴은 온통 대리석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흡사 얼음벽을 뜨거운 온도로 녹여 구멍을 뚫은 듯한 인위적인 기미를 풍긴다.

그래, 나는 지금 누군가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친절한 불새가 미끼를 흔드는 듯이 계속 저 앞에서 어른거린다. 망설이는 마음이 살짝 스쳤지만, 난 자신을 가지기로 했다. 아마 날 초대한 그 누군가도, 마탑의 시온이 어떤 존재인지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 끝에 다다랐을 때, 난 우뚝 멈춰 섰다.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었다.

투명한 벽면에 흩뿌려낸 듯이 붉은빛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빛은 모든 것을 불사르는 파괴적인 화기라기보다는, 볕을 쬐는 사람이 느낄 법한 햇살의 따스함에 가까웠다. 여명에 물든 양 따스하고 보드라운 빛이었다. 그리고 동굴 안을 환하게 밝히는 그 빛의 근원은-

거대한 알이었다. 실로 코끼리만 한 크기의. 그만한 크기의 알이 존재할 수 있느냐를 떠나서, 얼음벽 가운데에 박혀 따스한 기운을 내는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마탑에서 이동수단으로 이용하는, 괴조도 이만한 크기의 알에서 나지는 않을 듯싶다.

심장이 뛰는 듯이 맥동하는 알에서 생명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얼음 동굴 깊숙한 곳에 왜 이런 것이 존재하는지는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태어나기도 이전에 나를 부른 거라면, 태어난다면 무언가 대단한 생물체가 되지 않을까.

친근함을 표하듯 우웅 거리며 소리를 내는 알에 난 가까이 다가섰다. 알에서 번져 나온 빛은 한데 모여, 금세 내가 좇던 불새의 모습을 갖추었다. 불새는 알 위에 내려앉은 채 새침하게 날개 깃을 골랐다.

불러놓았으면 용건이 있겠지? 악한 목적으로 날 불러낸 건 아닌듯하여, 느긋해진 난 호기심에 손가락을 내밀어서 불새를 콕콕 찔러 보았다. 환영이란 건 알고 있어도 뜨거울 줄 알았건만, 약간의 온기만 손끝에 감돈다. 놀랍도록 감정 표현에 능숙한 불새는 뾰로통한 기색을 내비치며 옆으로 몇 걸음 움직였다. 심지어 부리로 쪼려는 듯 불길로 구현된 주둥이를 달싹거리기도 했다.

신기하긴 했지만, 난 싹 얼굴을 굳히고 짐짓 냉정한 척 말했다.

“용건이나 말해.”

불새는 목소리가 나지 않는 양 부리를 뻐끔뻐끔했다. 말도 할 줄 모르면서 나는 도대체 왜 부른 거야? 멍청한 새대가리가. 속으로 투덜대기 무섭게 뒤쪽에서 타닥, 하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손님이 들어 계셨네요.”

콧잔등에 주근깨가 송송 난 젊은 여인이 날 발견하고 멈춰 섰다. 눈빛에 경계의 기색이 감돌았으나,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슥 훑어보니 별다른 힘도 느껴지지 않는 게 평범한 여자인 듯하여, 난 어깨를 으쓱하며 편안한 투로 답했다.

“이 새가 날 불렀어요.”

“네? 엘로힘님! 정말, 내가 못 살아! 어떻게 그리 함부로 행동하세요!”

여인이 다가서서 소리를 내지르니 화들짝 놀란 불새가 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어른에게 혼나는 아이 느낌이다. 이름도 있었네, 엘로힘이라고? 지성을 가진 건 확실해 보인다.

어휴, 한차례 한숨을 내쉰 여인이 내게 가까이 접근했다. 내가 건장한 남자였다면 이렇듯 다가오지도 않았겠지만, 어쨌든 난 만만해 보이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나를 보고 위협을 느낀다면 그건 분명 지독한 겁쟁이이거나 과민증 환자일 테니까. 여인의 눈길이 바로 내 얼굴에 꽂혔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실례지만, 어디서 온 분이신지?”

“여행자예요, 기드온에는 처음 왔죠.”

“로브……. 마법사이신가요?”

온 사방이 붉으니, 내 눈에 띌만한 붉은 로브도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보다. 보호색이라고 해야 하나.

“네, 무슨 문제라도?”

마법사라는 게 무슨 위험분자라도 된다는 양 여인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금세 내게서 뒷걸음질쳤다.

“당신, 여긴 어떻게 왔죠?”

난 심드렁한 표정으로 여인을 응시했다.

“저 새가 날 부르던데요.”

“엘로힘님이, 당신을 불렀다고요?”

“아니면 이 넓은 산에서 초행인 제가 어떻게 여길 찾아왔겠어요? 저 새한테 물어보세요. 아, 말을 할 줄 모르나.”

망설임 없이 답하는데, 새가 알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내 대답이 여인을 안심시킨 듯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런 시기에 이곳에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해를 끼치려는 분이 아닐 거라고 믿겠어요. 엘로힘님은 사람을 알아보는 분이니, 악의를 품고 계셨다면 초대하지 않았겠지요.”

불새가 포르르 날아가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여인은 경의와 애정을 담은 다정스러운 눈길로 불새를 바라보았다. 숭배하는 듯한 눈빛이다. 추운 나라이니 불새를 숭배하는 종교라도 있는 걸까. 척 보기에도 마법적 생물체인 것 같긴 한데, 내 짧은 지식으로는 아는 바 없는 존재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분이시지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곧 태어나실 거예요.”

내 사소한 지적에 여인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난 내친김에 의문을 풀기로 했다.

“저 새는 도대체 정체가 뭐지요? 왜 이런 곳에 알이 있는 거고, 어미는 어디로 갔나요?”

“불새가 이 땅에 출현할 때, 기드온에 녹음이 내리리니.”

여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배어났다.

“눈 녹은 대지에 생명이 깃들리라.”

“……그게 무슨 뜻이지요?”

가만히 묻자, 여인이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여행자시니, 잘 모르시겠지요. 이곳 기드온에는 전설이 있답니다.”

그리고 여인은, 찬미하는 듯한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먼 옛날의 기드온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답니다. 그래요, 이렇듯 춥고 삭막하여 숨쉬기 어려운 대지가 아니었지요. 그때에는 때로 혹독한 겨울이 찾아들기는 해도 봄이 있었고, 여름이 있었고, 푸르름이 가득했다고 해요.”

극지방에 가까워서 추운 거 아니었어? 빙하기라도 찾아든 건가. 혼란에 잠겨 곰곰이 생각해 본 난 빙하기가 찾아들었다면 샤자한도 추웠을 거라는 결론에 쉽사리 도달했다. 그래, 마법적인 이야기를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겠지.

“마법사라니 아시겠지만, 간혹, 마력이 풍부한 대지에서는 힘의 결정이 형성된다고 들었어요.”

사실 나도 잘 몰랐지만, 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샤자한의 늪에서 나는 마력석도 마력이 고여 생기는 것이 아니던가.

“이 기드온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저 땅 깊은 곳에서 차가운 기운을 띤 빙정이 자라나기 시작했어요. 아주 기이한 현상이었지요. 빙정이 자라나는 동안 날은 추워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여름이 오지 않게 되어, 마침내 봄마저 사라졌지요. 온도가 끊임없이 떨어져 쌀쌀한 가을조차도 그립게 되었어요.”

“안타까운 일이네요. 빙정을 제거할 수는 없었나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무의미했죠. 빙정은 너무도 강력한 얼음의 마법을 품고 저 대지 깊은 곳에 묻혀 있어요. 사람이 다가갈 수가 없답니다. 지금은 성장을 멈춰 답보 상태라고는 하나, 어디선가 자극이 있어 빙정이 성장을 시작하면 그때야말로 기드온은 죽음의 땅이 될 거예요.”

마탑이었다면, 빙정을 없애주었을 만도 한데. 계약의 상대로 적절하지 않다고 본 걸까.

“결국 빙정에 대해서 연구하던 사람들은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알아냈어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난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얼음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생명체. 불새는 빙정의 힘을 먹이로 삼을 수 있지요. 연구자들은 고대의 기록에서 한 전설을 발견했답니다. 그 전설은 빙정의 힘으로 얼어붙은 대지에 나타나 마력을 거두어간 불새에 관한 것이었어요. 그 후로 불새가 내리면 겨울이 걷힌다는 전설이, 기드온에 퍼져 나갔지요.”

엘로힘이라고 불린 불새가 으스대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불새는 어디에서 오는 건가요.”

“세상의 균형은 맞추어지기 마련이니, 높은 곳에서 오겠지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여인의 눈이 생기를 머금었다.

“기드온의 모든 사람이 전설이 이루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환희를 띤 얼굴로 여인은 내 손을 덥석 붙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염원에 부응하듯, 드디어 엘로힘님이 나타나신 거랍니다.”

============================ 작품 후기 ============================

아마 내일중에 또 한 편이...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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