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1 5. 탑의 계약. =========================================================================
복잡한 상념을 떨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식사 장소로 향하면서 블레셋과 성주는-비록 전체적인 양상이 성주가 친근하게 질문하면 블레셋이 냉담하게 쳐내는 식으로 이루어졌을지라도-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비서처럼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어쨌거나 성주에게 한 번이라도 말을 허용했다간 피곤해질 듯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 자! 어서 잔을 드시지요.”
갓 음식이 날라진 듯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풍성한 식탁을 두고 앉자마자 대낮부터 대뜸 술을 권하는 성주의 모습에 난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거나한 만찬을 예상하긴 했지만, 술은 아직 이르지 않은가. 더군다나 술잔을 받자마자 이어진 상황은 낯설다 못해 언짢은 종류였다.
야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옷을 입은 미모의 여자 둘이 블레셋과 성주의 곁에 각자 딱 달라붙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이 나라에도 기녀가 있는 건지, 속이 다비치는 옷에 푹 팬 가슴골도 민망하거니와 상체를 노골적으로 들이대며 바짝 붙이는 퇴폐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라 밥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식사하면서 이런 꼴을 보고 싶은 이는 없을 텐데, 이걸 융숭한 접대라고 하는 건가.
문화 차를 넘어서 무어라고 면박하고 싶은 반감이 솟았지만, 블레셋이 가만히 있었기에 나 역시 말을 삼켰다. 말없이 블레셋 뒤로 물러나 있었던 건 애초에 그렇게 여기기를 바란 것이었지만, 역시 이곳에서도 난 딸려온 덤 취급인가 보다.
블레셋은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던 거의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음식을 깨작였다. 원래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깨작인다는 것보다 나은 표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식사량은 적었다. 갓 남자가 된 그가 여자들의 육체적인 접근을 좋아할지는 가늠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한기가 풀풀 풍기는 표정을 보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간 접해온 블레셋은 타인의 접촉을 극도로 싫어하여, 바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까탈스러운 성격에 가까울 듯한데. 이곳 기드온에서는 흔한 접대방식이라 내버려두는 걸까. 어쨌든 그가 보이는 초연함은 란델의 냉정한 태도와 닮아 있어서, 퍽 마탑의 시온다웠다.
“오늘 오신 마법사님들은 기존의 저희 기드온을 도와주셨던 마법사님들보다 더 높으신 분들이라 들었습니다.”
“기드온에 관한 임무는 룻에서 시온에게로 이관되었다.”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성주에게 반말을 고수하는 투가 쌀쌀맞기 그지없어, 내가 다 무안해지는 것 같다. 물론, 백 살 넘은 그가 존대할 만한 이도 많지 않겠지마는 외관상 성주에 비하자면 블레셋은 새파랗게 어리니까. 거기에 불쾌감을 느낄 법도 한 성주는 도리어 환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시온이라니, 이것 참 영광입니다. 본 성주의 이름은 바함이라고 합니다만, 성함을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블레셋.”
짤막하게 대꾸한 그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이쪽은 아힌. 나와 같은 시온이다.”
주목이 내게로 돌려지자, 성주의 낯빛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아아, 이쪽 분도 시온이셨군요. 이것 참, 제 결례를 용서하시기를.”
그가 내게 관심을 두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별달리 결례를 범한 건 없었는데. ……설마 블레셋에게만 여자를 붙여준 걸 말함은 아니겠지. 난 강조하듯이 말했다.
“난 괜찮아요.”
란델도 샤자한의 왕에게 존대를 썼으니까, 이건 내 재량일 터였다. 예상대로 블레셋은 내게 눈치를 주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몇 마디 더 의미 없는 말이 오간 뒤 블레셋은 성주의 성의를 최소한으로만 받아들일 요량이었던 듯, 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끊어내듯 딱 잘라 말했다.
“용건이 없다면 오늘은 쉬고 싶군.”
그 와중에 옆의 두 여자가 애교를 떨면서, ‘아이- 좀 더 있다가 가시지요.’라며 매달렸음에도 블레셋의 표정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이런, 여행하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제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아쉽지만, 이만 방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성주가 손짓하자, 하녀 한 명이 바로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머무실 방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내일 아침,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하지요.”
블레셋은 성주를 힐끔 보고 인사 없이 바로 몸을 돌렸다.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기에 이리 뜸을 들이는지. 분명한 건 그게 별로 유효할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블레셋과 내가 쉴 처소는 성 안 높은 층에 위치해 있었다. 바깥쪽과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문 없는 원형의 홀에 이르자 응접실처럼 탁자와 소파가 구비되어 있는 게 보였다. 거기에서 뒤로 뻗어 나가는 복도에 방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중 아무 방이나 쓰면 되었다.
홀 한쪽 전면은 투명한 유리창이라 기드온의 전경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여, 눈을 빼앗긴 난 방에 들어가지 않고 일단 소파에 걸터앉았다. 차를 가져오겠다며, 하녀가 사라지기 무섭게 블레셋이 불쾌하다는 듯이 옷을 털어냈다.
“냄새가 지독하군.”
여자의 향수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그에게 난 시선을 주었다. 역시 싫은 데 참고 있었나. 하지만 인내심도 별로 없는 블레셋이 왜?
“그 여자들을 내치면 되었잖아요.”
“그랬다면 피비린내를 맡게 되었겠지.”
“……네?”
섬뜩한 소리에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블레셋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술자리에서 여자로 접대하는 것이 기드온의 관습이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손님의 무례를 벌하거나 손님을 만족시키지 못한 여자들을 벌하여 성주의 위신을 세워야겠지. 그리고 상대가 나인 이상 그가 선택할 건 후자여야겠고.”
“무슨… 법도가 그래요.”
기가 질렸다. 여행 나온 것처럼 느슨해졌던 마음이 싹 가시며, 긴장감이 엄습한다.
“강자를 존중하기에 친절하게 구는 것일 뿐, 혹독한 북방의 영지를 다스리는 기드온의 성주들은 대대로 잔인한 성정이었지. 지금의 성주도 비슷하다고 들었어. 거기에 더해 의뭉스럽고 교활하기까지 하지.”
블레셋의 서늘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의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 얕보이면 물어뜯을 작자니까.”
그렇게 내뱉은 그는 바로 돌아서 근처의 방으로 들어갔다. 탁,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난 입술을 깨물었다. 뭐 이런 살벌한 동네가 다 있어. 당장에라도 탑을 떠나고 싶어 도피처로 생각했던 곳이 내게 도피를 허락할 만큼 안이한 장소가 아니었단 걸 깨닫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하기야 그렇게 쉬운 임무였다면, 시온에게 맡길 리 없겠지.
그런 와중에 난 블레셋이 들어간 방 쪽에 새삼스러운 눈길을 주었다. 그래도, 사소한 불편도 참지 못해 피를 볼 만큼 냉혹한 성격은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기는 싫지만, 은근히 맺고 끊음이 확실한 란델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내일 성주가 어떤 부탁을 해올지가 관건이었지만, 내일 일을 미리 고민해봤자 무의미하다. 하녀가 내온 차를 마시며 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조경이 아름다운 장소였기에, 어느덧 석양이 드리운 이곳 기드온의 전경을 난 가만히 감상했다. 성 한쪽의 고풍스러운 외벽과 그 옆에 해 질 녘의 얼음 산맥은 부드러운 주홍빛을 머금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 아래에서 시리기만 했던 은빛의 눈도 누르스름하게 젖어들었다. 이 한빛의 영지가 가장 따스해 보일 시간이 아니었을까.
여리게 남은 빛이 잦아들어 이윽고 별 비치는 밤이 찾아들면 혹독한 추위가 온기를 모조리 앗아가겠지만,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난 어둠이 내릴 때까지 줄곧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게 닥친 일들이 매우 불운하다고 여겼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난 기후에 얽매이지 않는, 타인이 부러워할 만한 강력한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온통 하얗기만 한, 어쩌면 이곳 사람들이 저주스럽다고 느낄 경관을 마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나도 언제나처럼 대지를 적시는 밤을 보며 어둠을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몸은 자유롭되 정신은 그러지 못한 탓이다. 미루어두었던 독배를 들이키듯, 그 모든 상념이 한순간에 밀려들었다.
“마스터.”
난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그를 불렀다. 가슴에 은근한 통증이 스며들었다. 이만큼이나 멀어져, 도망쳐 왔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를 좇고 그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니.
내 진심에 대해 깨닫는 건 맙소사, 말도 안 돼. 내가 하필 마스터를 좋아하다니! 따위를 외칠 만큼 벼락같은 소식은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고, 예감하고 있었음에도 그저 너무 가벼이 생각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 없는 사람이 사랑이란 단어를 우습게 여기듯, 나 역시도 오만했다.
그래서, 정작 그 모든 게 막연한 예상을 넘어 닥쳤을 때 돌이킬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알게 된 이상, 내가 어찌해야 할지는 명확한 것이었음에도. 난 이 감정을 뿌리째 뽑아 없애려고 다짐해 보았다. 아주 갈아서 없던 것처럼 소각해버리고 싶었다. 악귀를 몰아내는 것처럼, 바닥에 소금을 뿌려대는 미친 짓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비약적인 상상도 소용이 없었다.
난 마스터가 좋았다.
그 말이 굳어진 명제처럼, 깊이 뿌리를 내린 채 내 안에 있었다.
어째서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내 세계였다면 살인마에 불과한 사람인데. 그를 좋아한다고 하면 누구나 손가락 할 거야. 부모님이 아시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 모든 부정의 말들이 효력 없이, 무의미하게 스러져갔다.
통제할 수 없는 들불이 가슴속에서 타오르도록 내버려두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무력하고 비참했다. 드러내어 거절당한다면 차라리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였다. 난 마스터를 좋아할 만큼 어리석었지만, 고백에 죽음을 무릅쓸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난 이제는 식어버린 차를 성급하게 들이마셨다. 속에서 밀려 올라오는 감정은 뜨거웠지만 중간에서 꽉 막힌 듯이 답답하여, 눈물도 나지 않는다. 내가 안고 있는 감정의 불덩이는 너무도 뜨거워서 저 산맥에 서린 얼음을 퍼마셔도 해소되지 않을 것 같았다.
막막한 심정으로 완전히 깜깜해져 온통 희무스름하게 빛나는 산맥을 바라보고 있는 내 시야에 문득, 그것이 보였다.
하나의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던 탓에, 흐릿한 시선으로 잘못 보았나 생각했다. 그런데 저 멀리, 산자락에서 환영처럼 일렁이는 밝은 형체. 마치 나를 부르듯이- 거기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마력. 반사된 빛이라 하기에는 붉었고, 횃불이라고 해도 이 먼 곳에서 붉게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이상한 점을 깨달은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법사가 된 덕에 신체능력이 향상되어 시력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건 시력이 좋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력을 가진 자, 혹은 특정 상대만이 감응하여 볼 수 있는, 일종의 마법적 신호였다.
신호라니, 누구를 향한? 나를 부르는 걸까. 아니, 굳이 내가 아닐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저게 대체 뭐지?
또 다른 혼란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빚어냈다. 저것을 확인하려고 산맥까지 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는 온갖 마법을 다 펼칠 줄 아니까, 내 몸 하나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난 공간이동 마법을 뇌리로만 떠올리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날 제지했다. 경솔하게 낯선 여자가 준 물을 받아마셨다가, 노예상에 납치된 기억이 발목을 붙들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가진 힘이 다르다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경계심을 품고 바라보니 더 수상쩍게만 보였다.
============================ 작품 후기 ============================
좋은 한 주 되세요!
쿠폰주신 달빛 돼지님, thisbe님 셔르딜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