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5. 탑의 계약. =========================================================================
세찬 바람이 소리를 내어 결계를 두드린다. 유난히 바람이 이는 날, 휘몰아치는 대기는 흡사 소용돌이와 같아서, 사람 한 명쯤은 종잇장처럼 휩쓸어버리고도 남을 만치 거셌다. 결계를 치지 않았다면 몸을 지탱하느라 손잡이를 꽉 부여잡은 손안 쪽의 여린 살이 화상을 입은 양 새빨갛게 부풀어 올랐으리라.
하지만 약간의 소음을 제외하면 난 안전하고, 안온한 상태로 새 위에 올라 상공을 날고 있었다. 투명한 막이 외부의 바람을 막아주어 차단된 느낌은 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여전히 다리가 떨릴 만큼 아찔한 높이다.
하지만 난 란델의 팔을 으스러트릴 듯이 부여잡았던 과거와는 달리, 눈을 질끈 감고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공포심을 이겨냈다. 눈앞에 떡하니 귀신이 나타난다고 해도 매달릴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있었으므로.
엘리야와 만남을 끝내고 홀에서 마주한 블레셋은 고아한 성자처럼 보였다. 하얀 로브를 뒤집어쓰고 긴 금발을 드리운 그는 나를 보며 적의를 여실히 드러냈던 그때와는 달리 감정 없는 시선을 내게 주었다. 보석처럼 깊이 있는 광채가 어린 눈동자였다. 그는 날 흘끗 일별하고, 따라오라는 듯이 등을 돌렸다.
그 등을 따르는 건 정말로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날 살해하려고 한 사람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엘리야의 방을 나서면서 몇 번이고 그냥 남겠다고 돌아가 말할까, 갈등했다.
그러나 난 그러지 못했다. 마스터에게로 가는 건 불이 난 집에 그대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그 타는 듯한 열기에 괴로울 지경이라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엘리야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는다는 건, 안 되는 일이다. 그가 내게 퍽 잘해주고 있다지만, 상냥함과 선함은 다른 것이고 엘리야는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마탑의 그 누구도 내 편은 아니지.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단 게 새삼 공허하게 가슴을 휘돌았다.
“너, 맡은 임무가 뭔지는 알아?”
목적지에 도달했는지 새가 고도를 낮출 무렵 문득 블레셋이 침묵을 깨고 말을 걸었다.
“아니요.”
난 딱 잘라 답했다. 마탑을 벗어나기 전까지 불친절할 정도로 임무에 대해 설명이 없는 게 전통 아니던가. 블레셋은 차분하게 읊조렸다.
“그냥 따라와서 내가 하는 대로, 보고 있기만 해. 어차피 별거 아닌 일이니까.”
그 말투가, 흡사 혼자로도 충분하니까 괜히 방해하지 말라는 식으로 들려서, 울컥한 기분에 난 내뱉었다.
“내가 오는 게 싫었으면, 엘리야를 설득하면 되었잖아요?”
그랬으면, 나도 당신과 동행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아주 사소한 임무라도 다른 걸 달라고 말해볼 수 있었을 거야.
“네가 오는 걸 왜 내가 싫어해야 하지? 착각하지 마. 이건 임무일 뿐이야. 누구와 함께이든 상관없어.”
마스터 코스프레를 하는지 쿨하게 내뱉는 말에 명치를 다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묘하게 어긋난 듯이 들려서, 난 곰곰이 되짚어 봐야 했고 이내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블레셋의 말은 꼭…….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 같잖아.
그가 나를 불러 세웠을 때부터, 블레셋이 달라졌단 건 감지한 터. 뭐, 아무래도 좋아. 나는 마스터에게서 떨어져 있었고,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이 임무를 맡은 걸 달가워해야 하는 상황이다. 블레셋이 나와 원만하게 지내고 싶다고 한다면, 내게도 나쁠 건 없으니.
난 새삼스러운 눈으로 블레셋의 뒤통수를 훑어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곧 서서히 속력을 낮추며 거의 지면에 다다른 새가 살포시 땅에 내려앉았다.
둔중한 충격과 함께 막이 걷히자 난 부리나케 뛰어내려 땅에 발을 디뎠다. 얼어붙은 눈이 발에 눌려 파삭거리는 소음을 냈다. 하얀빛이 시리게 눈을 파고든다. 사방은 온통 투명하고 차가운 얼음 눈이 깔린 숲이었다. 아래를 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던 터라, 갑자기 풍경이 달라지자 색다른 기분이 든다.
마탑은 한결같이 온통 흐린 안개로 가득한 채로 서늘한 기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입은 로브에는 몸 전체의 온도를 일정한 상태로 유지해주는 마법이 걸려있어서 추위가 실감 나지 않았다.
난 주변을 슥 돌아본 뒤 블레셋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설명해주시죠.”
그 대단찮은 임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블레셋은 앞장서며 차분한 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기드온이라는 북방의 영지야. 보다시피 내린 눈이 녹질 않아서 땅은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여있지. 사람 살기에는 혹독한 곳이지만, 우리에게는 유용한 땅이야.”
“유용한…….”
이곳 기드온과도 계약을 맺고 있을 테지. 샤자한에서는 마력석을,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무얼 받아내고 있을까?
“가공된 마력석은 마지막으로 룻들의 손에서 마력정제의 과정을 거친다. 그걸 우리는 마력석이 열린다고 표현하지. 그 과정에는 특별히 제조된 정제수가 필요해. 그리고 눈과 얼음, 차가운 대기의 마력이 녹아든 이곳의 정제수는 마력석을 정제하는데 최적의 것이야. 샤자한이 마력석을 통해 부를 이룩했다면, 기드온에게는 정제수가 그런 품목이지.”
“그래서 마탑은 정제수를 대가로 받고 있겠군요.”
“기드온과의 계약은 샤자한과의 계약보다도 훨씬 오래되었어. 눈사태로 산맥에 고립된 영주에게 그를 구해주는 대가로 정제수를 받기로 한 것이 시작이었지. 마탑의 지원이 있어 정제수 제조가 발전한 것이기도 하고. 그 후로 우리는 그들에게 룻을 파견하여 성주를 호위하거나 소소한 자연재해를 해결해주고 있지.”
“그럼 이번에는 왜 룻이 아닌 우리가 가는 건가요?”
그와 나를 엮어서 우리라고 표현하는 게 내 귀에도 퍽 어색하게 들렸다.
“성주에게 부탁이 있다더군. 그리고 엘리야가 하급마법사로서는 수행할 수 없는 문제라 판단했어. 자세한 건, 가보면 알겠지.”
블레셋이 말을 마칠 즈음, 숲길도 거의 끝에 이르러 이윽고 나뭇잎에 가려졌던 빛이 쏟아졌다. 안개가 끼지 않았음에도 드높은 창공은 회청색을 띠었고, 내리쬐는 햇볕도 얼음 결정처럼 공기 중에서 차게 부서졌다. 그야말로 겨울만이 자리한 세계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산기슭에 펼쳐진 야트막한 숲이었나 보다. 나와서 돌아보니, 저편에 아찔하게 높은, 희게 얼어붙은 산맥이 우뚝 서서 거대한 육신을 드리우고 있었다. 산 아래쪽에 깔린 푸르름과 대조적인 깎아지른 듯한 산맥의 단면에는 하얗게 눈이 서려, 범접할 수 없는 기세를 풍겼다. 난 그 경이로운 풍광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본 적 없는 내게 사진으로만 본 풍경이 눈앞에 놓여 있으니 낯설고도 신비로웠다.
“바로 이동한다.”
블레셋이 말을 걸지 않았다면, 난 한참 동안 멍하니 그 장관을 바라만 보고 있었으리라. 그가 슬쩍 내 어깨에 손을 얹자 곧바로 마력이 나를 휘감았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
기드온 영지는 산맥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도 그럴만한 게 저 거대한 산에서 눈사태라거나 산사태가 난다면 영지가 전체가 모조리 묻혀버릴 테니까. 산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되 평원과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기드온의 성은 독일의 고성처럼 웅장하고 격조 높았다. 우리가 도착한 마을 너머로 군림하듯 굳건한 자태를 내비치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감상에 도취된 내게 블레셋이 시큰둥하게 말을 걸었다.
“이런 곳은 처음인가 봐.”
“처음이죠.”
한국에는 이런 산맥도 없거니와 중세풍의 성도 없다고. 블레셋이 냉담하게 속삭였다.
“뭐, 구경하는 건 좋은데 정신 차리라고. 다 왔으니까.”
마탑의 시온답게 얼빠지게 굴지 말라는 듯한 소리에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우리는 마을 입구에 다다라 있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거기에는 경비병들이 있었다.
이 추위에 털가죽으로 몸을 꽁꽁 둘러싼 채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고생스럽다 싶기도 했지만, 얇은 로브 한 겹만을 걸친 채 마을 입구에 선 나와 블레셋과는 무척 대조되어 보이는 차림새였다. 개중 한 명은 추위에 헛것을 보았다고 착각했는지 블레셋을 보며 눈을 마구 문질러댔다.
그야 블레셋은, 얼음 산맥에서 내려온 신의 사자와 같은 모습이었으므로. 그가 품에서 꺼낸 패를 우아하게 쳐들자, 병사들이 그것을 받아들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는 마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당연히 족히 영하 20도는 될 거라고 짐작되는 곳에서 ‘나 마법사다’라고 광고하듯 로브를 입고 나타난 우리에게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두꺼운 털가죽 옷을 두르고 부쩍 덩치가 커진 채로 옹기종기 모여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었다. 블레셋보다는 내가 확연히 눈에 띄는 색상의 로브를 입고 있음에도, 덜 부담스러웠던 건 그에게 가는 시선이 더 많았던 탓이다.
블레셋은 실로 오연했다. 마탑의 시온은 모두가 그러한 듯싶었지만, 그 역시 시선을 받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양 당당하기만 해서 오히려 그게 당연한 듯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초여름의 햇살처럼 금빛이었고 눈빛은 녹음 깊은 에메랄드 색깔이어서, 이 얼어붙은 영지의 사람들은 여름의 한 자락이 흘러든 듯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경탄 어린 시선에 우쭐댈 줄 알았던 블레셋은 내 생각만큼 어리지는 않은 모양인지 무심한 표정을 고수했다.
물론, 그는 어리지 않았다. 백 살이 넘었다고 했지……. 괴리감에 빠져들려는 찰나, 경비병의 연락을 받았는지 급히 지긋한 나이의 중년인이 달려와 우리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귀빈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부디 저를 따라오시지요.”
블레셋은 거만한 태도로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까닥였고, 우리는 중년인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귀빈이라고 칭한 게 의례적으로 손님을 높여 말했던 건 아닌 듯싶다. 우리는 성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린 듯이 안내되어 바로 성주를 만나볼 수 있었다.
“오는 길은 평안하셨습니까. 워낙 추운 곳이다 보니 오시는 길이 고생스럽지 않을지 걱정이 되더군요! 아 이렇게 말하면 제가 감히 마탑의 마법사님들을 얕보는 게 되는 겁니까? 하하.”
직접 우리를 마중 나온 성주는 강렬한 눈빛을 지닌 활력이 넘치는 젊은 남자였다. 키도 건장하니 크고 근육이 배겨진 듯한 육신이 탄탄해 보였다. 척 보기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임에도 원체 햇빛이 강하지 못한 곳이라 그런지, 피부색은 희었다.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인상이 호감을 줄 만했다.
그리고 성주가 어떤 사람이든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블레셋은 전혀 그의 환대에 응하지 않고 잘라 물었다.
“부탁할 내용은?”
“하하, 이것 참. 조급하게 구실 것 없습니다. 그간 마탑의 높으신 분들을 뵐 기회가 없어서, 모쪼록 좋은 대접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휴양왔다고 생각하시고 일단 느긋하게 식사부터 하지요. 그리고 후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어쨌든 성주는 냉대에 굴하지 않을 만큼 대범한 사람인 것 같기는 했다. 성주는 호들갑스레 손짓하며 우리를 이끌었고 블레셋은 내게 힐끔 시선을 준 뒤, 대답 없이 그를 따라갔다. 블레셋이 서두르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나도 이견 없이 그를 따랐다.
뭐든 즐길 만한, 그래서 신경을 빼앗길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사소한 임무라면 금방 끝마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결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떠나오기 전 상황을 되짚자 마탑에 떼어두고 온 것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어,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난 단상을 뿌리치며, 애써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