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 4. 마탑의 시온. =========================================================================
폭주하는 마력이 통제력을 찾으면 그 반동으로 안정을 찾을 때 주변의 마력을 끌어들여 양적 증가세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블레어는 이전보다 더 능숙하게 기운을 숨겨내는 느낌이었다. 내가 진보한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그는 강해졌다. 이제 막 걸음마를 내딛기 시작한 내가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일 수 있겠지만, 막상 말을 꺼내놓고 보니 마음이 초조해진다. 경주에서 뒤처진 경주마가 된 느낌. 입술을 깨물고 있는 내게 냉막한 음성이 들려온다.
“예정된 결과였다.”
불길한 형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일으키듯, 검은 로브가 장막처럼 일어섰다. 망설임 없이 나를 담는 어둠에 찬 눈동자가 검게 드리운 수면에서 형체 불분명한 무언가가 다가오는 양 섬뜩하다. 그에게 섣불리 말을 건 나를 원망하며, 난 어떻게 말을 맺어야 할지 고민했다. 저는 왜 이 모양일까요. 라든가 어떻게 하면 저도 그처럼 마력이 확 늘어날 수 있을……. 난 깨물던 입술에 힘을 가했다.
그 방법은 뻔하지 않은가. 금제에 걸려 몸부림치던 꿈속에서의 마지막 만남에서도, 나는 필요로 그에게 입술을 허락했다. 그걸 생생하게 상기하는 내게, 마스터는 무심한 투로 말했다.
“네게는 손쉽게 강해질 방법이 있지.”
물러서고 싶을 만치 강렬한 존재감을 숨기지 않으며, 마스터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블레셋의 강함을 논한 자체를, 강해지는 걸 원한다고 받아들인 듯했다. 어리석은 난 간과하고 있었지만 자연스러운 논리였다. 나 다음으로 내가 강해지길 원하는 건, 마스터일테니까.
그 고요한 대기가 서서히 중력이 가해지듯, 압박감으로 나를 눌렀다. 그의 눈, 그의 침묵이 그 단순한 말 한마디를 절대적인 명령으로 만들었다. 파동처럼 떨림이 번져나간다. 그리고 이내 날 뿌리째 흔들었다.
나도 모르게, 비틀거리던 발을 앞으로 내딛자, 긍정의 신호로 읽었는지 마스터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밀랍처럼 희고 매끈한 손가락이었다. 허공에 정지해 있는 그대로 생동감이 없어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저승에서 내뻗는 악령의 손길처럼 한기가 흘렀다. 동시에, 그 손은 사람 하나쯤 단숨에 으깨어버릴 수 있는 무한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거역할 수 있을 리 없다. 조종당하는 듯이 저절로 걸음이 움직였다. 사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양 위기감이 차올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저 본능이었다. 마스터는 포식자였고, 얼마나 성장했든 간에 난 그의 앞에서 피식자에 불과했다.
아마 나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느릿하게 뻗은 손이 마스터의 손과 겹쳐졌을 때, 뱃속이 떨렸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기가 솟아, 막연히……. 시험하고 싶었다. 엘리야가 들려준 이야기가 내가 마스터에게서 멀어지도록 했는지. 그 때문에 내 마음이 그에게서 진정으로 거리를 두었는지. 내가 며칠간 쌓아올린 벽이 얼마나 견고할지.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손에 놓인 깃털을 가져가듯 전혀 힘들이지 않고 그가 날 끌어당긴다. 윤활유를 들이부어도 이처럼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운 움직임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짙은 어둠에 잠기듯 난 균형을 잃고 마스터의 품 안에 떨어졌다.
내가 어디에 앉은 건지. 심장이 튀어 오르고 속이 조인다. 다시 멋모르고 일어나려는 찰나, 사고를 멎게 만드는 건 그 무색무취의 감정 없는 얼굴. 백자처럼 희고 달빛으로 빚어낸 듯이 고왔다. 단려한 이목구비 속에 자리한 암흑이 고스란히 담긴 두 눈이 지독하게 생생하다. 그리하여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 같았다. 나는 그처럼 완전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얼굴이 가까워지고 이내, 입술이 닿았을 때-
난 내 안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성벽을 느꼈다. 부스스 무너져 내리는 그 소리가, 이명처럼 고막을 울렸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그와 직면하고 있다는 게, 거세게 내게 부딪혔다.
그간의 시간이 무용한 것이었다고 비웃듯, 고통스러울 만치 그의 목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 충동이 너무도 강렬하여 가슴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그간 그에게 느꼈던 설렘과 두근거림이 단계를 뛰어넘어 치닫는 것 같았다. 통제할 수 없는 마음에 눈물샘이 젖어들었다. 난 주먹을 세차게 틀어쥐고 뻗어 나가려는 손을 막는 데 안간힘을 썼다.
그를 경계하겠다는 다짐이 청개구리처럼 내 마음을 반대로 밀어냈나 보다. 어리석게도.
그간 마스터를 향한 마음을 재어보며, 재어볼 수 있으니 태만하게 여겼다. 난 마스터를 이만큼 좋아하니까, 아직은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래 여기까지 하자, 라며.
그리고 오늘 그 모든 것이 폭풍에 휩쓸렸다.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걸 멈춰야 해. 더 이상은 안 돼. 그게 널 죽일 거야. 머릿속에 빨간 등이 켜지듯 경계신호가 온몸을 울렸다. 해악이라는 걸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인 마음.
그리하여 마스터가 입술을 떼어냈을 때, 나는 몸서리치듯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혐오스러운 어떤 과정을 겪어낸 양 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도 혹여 그가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여, 우습게도 난 그를 살피고 있었다. 실은 줄곧 그러했다. 못 박은 듯이 시선이 그에게 박혀서, 떨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현실을 깨달은 듯이 낯설었다. 이런 나 자신이, 그리고 내 감정이. 그리고 그 속에서 여전한 건 오직 퇴색되지 않는 마스터의 무심함뿐이었다.
……결국, 엘리야의 말은 내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흐름에 거부하려 했던 나를 징벌하듯 내 마음은 너무도 반항적이었다. 그래서 멋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포기도 안 되었다. 억지로 꺾어 부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내버려두어서도 안 될 일이다. 이미 차오르는 감정이 수위를 넘나들었다. 이게 넘쳐버리면, 나는 어떻게 될까. 쫓기는 듯한 심정이 저절로 입을 열렸다.
“제게 임무를 주세요.”
잠긴 음성이 스스로 도망칠 구실을 안긴다. 난 차분한 투로 다시금 말했다.
“다른 임무를 맡고 싶어요.”
다행히 떨림 없는 음성은 내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도저히 이대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여기에 있을 수가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이제껏 그 누구를 향한 마음과도 달랐다. 이처럼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강렬하고, 절대적으로 나를 흔든 적이 없었다.
떨어져 있다면 괜찮아질 거야. 아니, 그래야만 해. 활활 타오르는 불길도 전소해버리면 그뿐, 더 이상 장작을 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잦아들리라. 내가 그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면, 꿈에서 마스터를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마음을 지우려 애쓰면서도, 사나운 의문이 차올랐다. 왜 당신은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으면서 내 마음을 잡아끌지? 못내 그를 탓하고 싶은 기분.
그리고 마스터의 답변이 자르듯이 떨어져 내렸다.
“내일, 엘리야가 네게 임무를 줄 것이다.”
변함없는 표정으로 마스터는 내게서 시선을 떼어낸 뒤,
“그를 찾아가라.”
그것으로 말을 맺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마스터가 눈을 감으면, 그대로 이 넓디넓은 방안에서 그와 나의 세계는 단절된다. 그게 다행스러우면서도, 부쩍 예민해진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그게 마치 나와 마스터의 일방향적인 관계를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난 주춤거리며 일어나 내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쓰러지듯이 그 위에 누웠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침대에서 웅크리고 자다 일어났을 때, 마스터는 방에 없었고 급작스레 공허감이 몰려들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이 외로웠다. 그제야 난 엘리야를 향한 다른 시온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를 찾아서라도, 채우고 싶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게 엘리야였던 것뿐이다. 그는 저 먼 곳을 좇는 마음이 머물기엔, 최적의 사람이니까.
잠든 사이 쿵쿵 뛰던 심장도 잔뜩 올랐던 열도 말랐던 목을 축인 양 어느덧 가라앉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스터가 자리를 비운 것에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는 게 두려운 상대라니, 최악이지. 마음대로 좋아할 수 없는 게 괴로웠고, 그게 나를 죽일 수도 있단 것엔 숨이 막힌다.
난 로브를 챙겨 들고 탈출구를 찾듯이 곧바로 밖으로 이동해, 엘리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제 마스터가 그를 찾아가라 하셨으니, 언질해두셨을 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순순히 내 청을 들어주는 게 달가우면서도 서운한 기분이 든다. 이성에 의존하지 않고 멋대로 기대를 피워 올리고 실망하기를 반복하는 나 자신이 지긋지긋할 지경이다.
엘리야를 부르는 마음에 응하듯, 곧바로 나타난 팔랑거리는 나비는 어제처럼 내 앞길을 인도했고 난 이전과는 달리 단출한 방안에 앉아있는 엘리야를 발견했다. 하얀 벽면에 검은 소파. 엘리야답지 않은 인테리어 선정이었지만, 물을 기운도 정신도 없었다. 다행히 그는 혼자였고 그 사실만은 기꺼웠다.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내게 손짓했다. 말없이 다가가 그의 옆자리에 앉자, 엘리야가 손을 뻗어 내 턱을 끌어올렸다. 그는 흥미로운 투로 속삭였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
“하지만 마력은 강해졌어.”
마스터의 마력전달이 감정의 격화가 연관이 있는지 마력량이 이전보다 더 상승했단 건, 나도 느끼고 있는 바였다. 다행히 내 마력이 갑작스레 증가한 사유를 묻지 않고 엘리야는 날 놓아주며 특유의 가벼운 투로 말했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쉬고 싶을 줄 알았는데. 글쎄 마스터가 네게 임무를 주라고 하시더구나.”
“제가 원한 거였어요.”
“그래? 오랜만에 내 공간에 방문하시기에, 취향에 맞게 인테리어를 바꿔 보았지. 난 마스터의 첫 시온이잖니. 항상 그분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진지한척 하는 소리에, 부정적인 감상이 어쩐지 잊힌다. 난 떨떠름하게 응답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평해주지 않으셨어.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던 걸까. 마스터의 취향은 이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색채일 거라고 확신했는데.”
상심한 듯 고뇌하는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마탑에서 가장 쓸데없는 데 몰두하며 한가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이 엘리야일 것 같다고, 난 불순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제 임무는요?”
시큰둥하게 묻자, 엘리야가 기다렸다는 듯이 화사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안 그래도 널 보낼 생각이었거든. 마침 좋은 기회다 싶어서.”
“네에.”
“블레셋이 이번에 맡은 임무가 있는데, 그가 변화를 마치지 않아 아무래도 걱정이 되지 않겠니? 그의 상태를 살필 겸 너도 함께 나가면 좋겠구나.”
“네?”
나와 그를 한 자리에 둘 때부터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짐작했지만, 설마하니 블레셋과 날 붙일 줄은 몰랐다. 당장에라도 나가고 싶다지만, 이건 아니라고. 난 굳어진 얼굴로 반문했다.
“제게……는 블레셋을 살필 만한 능력이 없는데요.”
“어쩔 수 없단다. 다른 시온들은 각자 맡은 임무가 있어. 요엘이 금방 귀환할 줄 알았는데 시기가 늦어지게 되었단다. 나중에 합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난 입을 꾹 다물고, 다른 핑곗거리를 찾았다. 엘리야가 놀리듯이 얄미운 투로 물었다.
“혹시 그가 남자라서, 같이 다니자니 쑥스러운 건 아니겠지?”
이거다 싶어서, 난 도덕책 읊는 양 확고하게 답했다.
“네, 란델 때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남녀가 둘이 붙어서 행동하는 것은 아무래도 비도덕적인. ……제가 살던 곳에서는 그랬다고요.”
“교미를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단다. 그는 네게 손대지 않을 테니까.”
피식 웃으며 하는 적나라한 말에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난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그냥 놀릴 셈으로 던진 말에, 잘 낚였다 싶었다.
“아무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전혀 납득할 수 없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내는 날 보며 엘리야는 그 기다란 손가락으로 느긋하게 머리카락을 꼬았다.
“블레셋과 정 가기 싫다면, 하는 수 없지. 네게 맡길 다른 임무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마치 당장 떠나고 싶은 내 심리를 유추한 듯한,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날 향해 엘리야가 손을 내저었다.
“블레셋이 홀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거기서 더 반론을 끄집어내지 못한 것으로,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