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4. 마탑의 시온. =========================================================================
난 란델에게 감사의 눈길을 건네며 입으로는 엘리야에게 인사했다.
“마음에 들어요. 감사해요.”
노랑 노랑 병아리색을 주장하기에 란델의 센스도 의심한 적 있는데 얼마나 무대 의상 같은 옷감을 골랐으면 그가 말리기까지 했을까. 날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취향을 관철하고 싶었을 것 같지만, 신경 써준 건 사실이니.
“나도 고르면서 즐거웠단다.”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은 엘리야가 곧바로 블레셋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나?”
“네, 완전히.”
“중간에 네가 미쳐서 폭주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견뎌냈구나.”
……내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던 것 같지? 내가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마탑에 시온들이 우르르 몰려있기에 왜 그런가 싶었는데, 블레셋 때문이 아니었을까. 장하다는 듯이 엘리야가 그의 뺨을 쓰다듬자, 블레셋은 낯을 확 찌푸렸다. 근데 그게 싫어서라기보다는, 몸둘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성격적으로 심히 결함이 있는 그라도, 엘리야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버릴 따름이었다.
란델이 설명을 보탰다.
“일시에 전신이 마력이 방출되어 위험할 뻔한 순간이 있었는데, 잘 넘겼습니다. 아시다시피, 마력통제가 에스겔의 주특기니까요.”
“에스겔에게 맡기길 잘했구나. 기분은 어떠니.”
“그냥 그래요.”
착각이었을까? 냉담하게 대꾸한 블레셋의 시선이 순간 엘리야를 넘어서 내게로 향하는 듯싶었다. 내가 시선을 피하자, 그가 낮아진 음성으로 되뇌었다.
“……빨리 임무를 받아 나가고 싶군요.”
“그래, 그동안 답답했겠지. 안정기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신체가 변화했으니 적응이 필요할 텐데, 괜찮겠니?”
“문제없어요.”
“아모스를 한 명 붙여주는 건 어떨까. 그렇지, 요엘은 어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군요.”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게 묵묵히 서 있던 란델이 설명을 보탰다.
“아모스 중에서도 가장 실력 있는 마법사란다.”
아, 그렇지. 시온 밖에 보지 못하다 보니 이 마탑에 시온 외에도 수백 명의 마법사가 속해 있단 걸 잊어버리고 만다. 시온 아래, 아모스. 아모스 아래 룻. 마스터 아래에서 마탑의 계급체제는 아주 단순한 구조만을 가진다. 시온 다음가는, 수십 명에 달하는 아모스는 개개인이 강력한 마법사이다. 개중 가장 실력 있는 아모스라면 이제 갓 시온이 된 나보다도 더 강하지 않을까.
내가 룻과 아모스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마탑은 심처중의 심처라, 룻은 이곳에 어지간해서는 올 수 없다. 마탑에 속해 있되 수장은 보기 힘든, 하급 인력이랄까. 모든 것이 마법으로 해결되는 이곳에서는 따로 허드렛일을 할 사람이 필요치 않아서, 룻이 마탑에 있을 이유가 없다.
아모스는 그 룻을 관리하는 이들로, 세계각지로 파견된 터라 탑에 머무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내가 처음 왔을 때에도 블레셋과 란델 밖에 보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나다닌 그 짧은 기간 동안 아모스를 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리라.
아마 나도 시온으로서 실력을 갖추면, 마탑을 떠나 있게 되겠지. 하지만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일이었다.
“아모스는 엘리야의 관리하에 있지. 시온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일은 별반 없으니 네가 몰랐을 만도 하단다.”
……늘 소파 위에 늘어져 있길래 놀고먹는 한량과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하는 일이 있었구나. 난 엘리야를 무례하게 재평가했다. 언제나 느긋해 보이는 그였지만 이렇듯 인테리어에 신경 쓰는 세심한 일면을 보자면, 꼼꼼히 일을 잘할 것도 같다. 내 로브까지 소소하게 챙기고 말이야.
“그럼 임무 배정은 누가 하는 거예요?”
“룻과 아모스는 내가, 시온은 마스터께서. 거의 그렇지.”
엘리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시온과 아모스가 세계에 개입하기 위한 손이라면 룻은 마스터의 눈이란다. 룻들이 보낸 정보는 모두 마스터께로 가지.”
“어떤 정보요?”
“마력의 비정상적인 움직임, 급격한 기상이변, 국가의 정세 변화. 대상은 광범위하지만 대개는 이런 것들이지.”
마스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룻 중의 하나가 이상을 감지하고 보고 올렸기 때문인가.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차원의 틈새가 벌어진 특정 지역에서 마력이 뒤틀리는 현상이 나타났음 직하다. 그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마스터의 흥미를 끌었을 수 있겠지.
“그 정보들을 뭐에 쓰시는데요?”
란델이 설명을 보탰다.
“그건 생각보다 유용하단다. 특정한 위치에 놓인 특정인의 소원을 들어주며 대가를 취하는 거지. 주기적으로 계약이 이루어져야 영향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으니.”
“그렇게- 영세토록 부귀영화를 누리는 거지.”
엘리야는 턱을 괴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마탑은 아주 부유하단다. 몇 세기에 걸쳐서 긁어모은 재화는 어느 나라와도 비할 수 없지. 그 돈을 쓸데가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저야 연구에 마음껏 사치를 부릴 수 있어서 좋긴 합니다만. 애초에 윗사람한테 돈을 타서 써야 하는 구조가 잘못된 겁니다. 어느 룻이, 어느 아모스가 선뜻 사욕을 차리는데 손을 벌릴 수 있겠습니까.”
“임무마다 경비는 넉넉히 책정한다고. 다들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서 말이지. 로브에 보석도 달고 길에 나가서 돈도 펑펑 뿌리고 하면 좋잖아? 아무도 그런 취미가 없으니. 언제나 음습하게 몸을 숨기면서 어둠 속에서 서식하지.”
엘리야가 비꼬는 듯한 투로 비난하자 란델이 핀잔을 던졌다.
“그런 식으로 재화를 흩뿌리는 것도 세상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일이니, 마스터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누가 그걸 모르겠니. 그래서 내가 마스터께 이 탑의 외관을 금과 보석으로 장식하면 어떠냐고 권했는데, 마음에 드시지 않는 모양이야. 바로 거절당해버렸단다.”
“당연히 거절하시지 않겠습니까. 투과성 있는 마력석도 아니고 금속을 덧씌우면 마력 전이에 문제가 생길 텐데 룻들이 마법을 운용할 때 애 먹을지 모릅니다.”
“그건 힘을 빌려다 쓰는데 너무 익숙한 나머지 성취에 소홀했기 때문이지. 마탑의 마력을 잘 끌어다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신의 마력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단다. 알겠니? 아힌.”
“네에.”
어쩐지 잔소리로 끝나버려서, 난 고개를 끄덕이며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룻들에게 뭐랄 수 없는 게, 마스터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보고 뭐고 아직도 난 저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리라. 비록 원치는 않은 것일지라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을지도……. 생각하던 난 곧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몹시 타락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란델과 엘리야는 그 후로도 쓸데없는 듯이 들리지만 가치 있는 정보로 가득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나도 엘리야 앞에서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거니와 블레셋은 그야말로 도도한 자태로 대화를 듣고만 있다가, 간간이 질문이 떨어지면 그제야 제 순서가 돌아왔느냐는 듯이 시큰둥하게 입을 열곤 했다.
블레셋을 보자마자 불편한 자리가 될 줄 알았는데, 엘리야는 그와 내가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한다든가 부러 말을 시키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선상에서 나와 그를 한 자리에 두었다. 그는 한계선 상을 지키는 데 능숙했다. 그가 마스터를 대신하여 마탑의 모든 걸 총괄하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그가 마스터의 첫 번째 시온이며 마스터 다음가는 강력한 마법사라는 점을 떼어놓고 보아도 엘리야는 사람을 다룰 줄 알았으니까.
그게 묘하게 꺼려졌다. 엘리야 자체는, 물론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그 반면에 경계심이 움트게 했다. 나를 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지나치게 능력 있는 사람과 가까워지는 건 흡사 자의식을 빼앗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 목표는 분명한데, 그가 내게 갖는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마음이 흔들려 버릴지 모르니까.
마탑의 사람들은 내가 한순간에 모두 버릴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해. 그러면서도 내가 선을 그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지.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내 연기력이 시원치 않기도 했거니와, 호의로 날 대하는 사람을 밀어내자니 가슴이 따끔거린다.
시간이 흘러 엘리야의 변덕으로 모임이 끝을 맺자, 난 인사를 남기고 먼저 방을 나섰다. 돌아가는 대로 바로 마법 수련에 열중할 셈이었다. 그래야 탑에서 자주 임무를 맡아 파견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걸음 옮기자마자 바로 뒤를 따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꼭 따른다고 할 수는 없겠지. 탑 중앙으로 가고자 한다면, 그냥 가는 길이 같은 걸 수도 있어. 나는 재빨리 상대가 누구일지 추리해보았다. 몹시 게으른 행태를 보이며 앉아서 방문자들을 불러들이는 엘리야일 것 같지는 않았다. 란델이었다면, 분명 내게 뭐라도 말을 걸었을 것이다.
블레셋? 긴장감으로 몸이 쭈뼛 곤두섰다. 한적한 복도에서 그를 등 뒤에 놓고 있다고 생각하니, 으슥한 길목에서 뒤따라 붙는 험상궂은 남자를 연상케 하는 섬뜩한 감마저 있었다. 난 티 내지 않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가 나보다 키가 크니, 걸음이 빠를 건 당연지사였다.
미묘하게 빨라진 걸음 덕에 그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거의 홀에 다다라 돌아갈 일만 나아서 마음을 놓고 있는데, 뒤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너.”
너무도 짤막한 부름이라,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는 유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한 방에 있으면서도 블레셋은 내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처럼 아주 쿨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못들은 체할까 짧은 고민을 마친 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이대로 가버리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고, 그렇게 보이는 건 내가 결코 원하지 않는 바였다.
블레셋은 멈추어 선 채로 나를 막연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기보다는, 나를 불러 세우는데 의의가 있었다는 듯이. 포말 부서지는 여름 바다빛 눈동자가 어떤 감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에메랄드 빛 눈은 보석과 같아서, 순수하리만치 감정에서 벗어나 있었고 나를 향한 적의나 분노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한순간이나마 내게 더할 수 없는 살의를 내보였던 그때와 무관한 것처럼.
할 말이 없는 듯했기에, 나는 기다려주지 않고 바로 마스터의 방으로 이동하는 마법을 시행했다. 블레셋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를 같은 시온으로서 존중해주었다.
다시금 깨닫게 되는 건- 그는 변했다. 깨끗이 적의가 사라진 얼굴은 이전의 그와 지금의 그가 달라졌다는 걸 실감케 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블레셋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으므로.
그는 까칠한 성격을 가진 이들이 의례 그러듯 사과하지 않을 이였다. 그리고 나는 제대로 된 사과를 듣지 않으면 흐지부지 넘어갈 수 없었다.
감정이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한 결심에 가까웠다. 그를 순순히 용서해버린다면 내 목숨을 노리는 사소한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게 되어버리니까. 이리스 라하느야 감옥으로 끌려가서 수난도 당해보았지만, 블레셋을 벌할 이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마스터는 네 일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말했고. 내가 호락호락하고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입증할 수 있는 건 결국 나 자신의 행동뿐이다.
돌아오자마자, 난 나도 모르게 마스터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떠나기 전 마스터가 한 말이 묘한 압박감으로 다가온 듯싶다. 내가 시온들과 쓸데없이 어울리는 게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겠단 의무감.
“블레셋이 변화를 마쳤어요.”
난 강조하듯이 부연했다.
“그는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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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조만간=3일 이내.
성경 속 이름이 많이 보이는 이유는 편하게 거기서 이름을 따오기 때문이에요.
마치 신화에서 이름을 따오는 것처럼(...)
마탑을 바벨탑처럼 거대한 탑으로 설정하긴 했어요. 이거 초창기표지도 그래서 바벨탑이었구요.
요즘은 참 맥주가 맛있더라고요(수입) 술못드시는 분들께 에딩거를 추천드림(무알콜 병맥주) 무알콜인데 맛있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