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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67화 (67/155)

00067  4. 마탑의 시온.  =========================================================================

거울을 계속 쳐다보자니, 이내 후회가 찾아들었다. 난 그래도 색이 죽고 명도가 낮은 붉은색을 기대했는데, 막상 이런 걸 입고 나돌아다니자니…….

“어울리기는 하는데, 이건 꼭 신호등 같잖아요.”

경고의 신호로 빨간색을 쓰는 건, 그게 가장 눈에 띄는 색상이기 때문이라지. 빨간 불이니 다른 사람들 눈에 참 잘 들어오겠다 싶었다. 아무 행동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해도 주목을 모으겠어. 도주를 꾀하는 내게 바람직한 차림 같지는 않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띌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단다.”

당신은 좋은 색을 골랐으니까 그렇겠지. 내가 새초롬하게 올려다보자, 란델이 미소를 띤 채로 찬찬히 말했다.

“아직 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엘리야의 로브는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란다. 어느 사람보다도 눈에 띄지.”

……아, 맞아. 엘리야의 로브는 금빛이라고 했지. 나와 만났을 땐 탑 내라 챙겨 입지 않은 모양이다. 그건 정말, 보지 않아도 그다운 차림이리라. 그 모습이 신의 사자일 법하여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즐길 그의 심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실은 그 넘쳐나는 자신감이 이해 가지 않았다.

매력적이기에 자신감이 넘치는 걸까, 자신감이 넘치기에 매력적인 걸까. 닭이 먼저인지 알아 먼저인지 잠시 고민하던 난 냉큼 말했다.

“로브 고마워요.”

가져오는 수고는 했다지만, 란델이 사비를 들인 건 아닐 테고 마탑의 재정으로 만든 것일 텐데 마탑은 마스터의 소유다. 그러면 마스터께도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마스터가 직접 ‘아힌의 로브를 만들어라.’라고 명을 내렸을 리는 없겠지. 난 결국 내가 감사하다고 말하든 마스터가 전혀 개의치 않을 거라는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냈다. 바람직한 예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사회생활이란 참 어렵다.

“엘리야가 널 그리워하더구나.”

란델이 뜬금없이 꺼낸 말에, 난 잠깐 당황했다. 날 그리워한다고? 우린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고 오래 떨어져 있지도 않았던 데다가, 엘리야는 누군가를 그리워할 만큼 감성 풍부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내 어떤 짐작이 떠오른 난 표정을 굳히며 짚었다.

“그가 그렇게 전해 달랬어요?”

날 당황하게 하려고. 란델이 웃는 얼굴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다고도 전해달라고 했지. 아무래도 그가 찾아와서 수다를 떨 수는 없지 않겠니? 네가 그를 찾아갔으면 하는데.”

확실히, 친목 도모에 관심 없는 마스터라고 해도 면전에서 떠드는 데 가만히 있지는 않을 듯싶다. 괜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를 멀리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엘리야를 만나긴 해야지. 내친김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갈까요?”

“그 차림 그대로 가면 엘리야가 좋아할 거야. 마스터, 제가 아힌을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여기가 마스터의 방이고 내가 마스터가 특별히 신경 쓰는 존재인 걸 잊지 않았다는 듯이 란델이 바로 허락을 구했다. 그가 여상히 그러라고 말할 줄 알았던 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도록.”

그 음성에 가슴이 내려앉은 듯했다. 서서히 시선을 옮겨 마주한, 홍채까지 암흑에 삼켜진 그 눈이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마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눈 그때에도 사위를 적요하게 감싼 채 잠자코 귀 기울이고 있던 그 어둠처럼.

엘리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고 계시는 건 아닐까. 실제로 난 들은 것뿐이었는데 죄를 지은 양 가슴이 떨린다. 그러나 경고처럼 한 마디 던진 마스터는 막아설 마음은 없는 양 곧바로 우리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얼어붙은 채 이끌려 방을 나서자마자 란델이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그리 동요해서야 어디 가서 거짓말도 못 하겠구나.”

“마스터가…….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에요?”

엘리야가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란델도 들었음 직하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내가 마스터를 멀리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눈길을 받은 란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마스터가 마탑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어디까지 아실 수 있는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니까.”

“그런데 그런 이야기 해도 괜찮아요?”

대놓고 뭐라고 한 건 아니지만, 마스터의 이야기를 한 건 사실이고 대부분 부정적인 논조였다는 점에서 볼 때 험담이라고 판단한 여지가 있었다.

“이세벨이 죽었을 때는 잠잠하긴 했지만, 우리는 원래 종종 마스터의 냉혹함에 대해서 논하곤 했지. 글쎄 마스터께서 우리들의 소소한 의견 교환에 신경 쓰실지는 모르겠구나.”

“그럼 방금은 왜 그러셨을까요.”

란델은 잠잠히 날 바라보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기색에 순간 열이 올랐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나는 모르겠구나. 짐작이 가는 건 없니?”

내가 마스터를 피한다는 걸 눈치채셨나. 그렇다고 벌벌 떠느라 성취가 늦거나 수련에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마스터야 내가 그를 두려워하든 상관없잖아. 만일 마스터가 바란 게 내가 그를 따르는 것이었다면, 첫날부터 그런 모습을 보였을 리 없다.

곰곰이 생각하는데 란델이 첨언했다.

“내가 말했지 않니, 마스터는 네게 신경 쓰고 있어. 그 이유가 뭔지 짐작할 수 있는 건 너뿐인 것 같구나.”

“전혀 모르겠어요. 사실 며칠 전에 엘리야를 만나고 온 후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거든요. 늘 그렇지만요.”

“그래.”

란델은 미소로 예리한 눈빛을 갈무리하며 그걸로 궁금증을 접었지만, 정작 질문을 들은 난 기분이 몹시 싱숭생숭했다. 그러나 곧 엘리야의 방에 다다랐기에, 그도 곧 잊혔다.

눈부신 빛이 드리운 방에 가까워지자 꽃향기가 아찔하리만치 물씬 풍겨왔다. 그간 또 무언가가 바뀐 모양이다. 인공 태양이 드리운 듯이 환한 내부는 온통 꽃밭이었다. 색색의 꽃들이 커튼을 따라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도 군데군데 피어난 꽃 덤불이 모습이 작은 실내 온실을 보는 듯했다. 잡지에나 나오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건 무슨 센스야? 먼저 가라고 뒷짐 지고 선 란델을 제치고, 시야를 가리는 하늘하늘한 은빛 레이스커튼을 휘젓고 앞으로 나아가며 난 커튼에 장식된 꽃을 뭉개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커튼을 걷어 올린 그때에, 난 멈칫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새 둥지 같은 독특한 소파 위에 길게 드러누운 엘리야는 보랏빛 눈동자를 농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곁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익었다. 공기 중에 부서지는 빛처럼 찬연한 금발이었다. 이어 지중해의 바다처럼 푸른색과 초록색이 채도 높게 뒤섞인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지그시 나를 향했을 때, 난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블레셋.

마치 그간 무수한 세월이 흐른듯한 모습이었다. 키도 이전보다 반 뼘쯤 커졌고 묘하게 가는 선은 여전했지만, 천사 같기만 하던 얼굴은 성인답게 고혹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더 사람 같고 남자 같아진 모습, 그래 블레셋은 이제 완연한 성인 남자였다. 짐작한 바대로 그는 남자가 되길 선택한 듯싶었다. 그 와중에도 절세의 미녀가 되었을 그의 미모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길고 늘씬한 체형을 하얀 로브에 감싸고 선 그는 인정하기는 싫지만, 부잣집 도련님처럼 우아하며 귀족적이었다. 변화를 겪는 와중에 꽤 시달렸을 법한데, 그의 몸에서 풍기는 마력은 여전히 생생하리만치 강력하다. 난 그를 후려쳐 주겠다는 발상이 생각보다 더 이루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날 보고 우아하게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린 그는 이내 모른 척 시선을 떼어낸 체 엘리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의도한 부름입니까?”

그도 이제 막 도착했던 걸까. 엘리야가 홀릴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에게 손을 내밀며 치사를 던졌다.

“예뻐졌구나.”

블레셋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남자가 된 이상 예쁘다는 소리가 기분 좋지는 않은 것 같다. 벌써 성별에 따른 자의식을 확립하다니.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어떤 면에서 엘리야가 한 말은 진실이었다. 곱게 예뻐진 건 아니지만, 전보다 깊이 있고 성숙해졌다. 여유롭기 그지없는 엘리야를 한 차례 노려본 블레셋은 한숨을 푹 내쉰 뒤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다른 시온들이 그러했듯이 이내 그 손을 받아들여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힌, 너도 오랜만이구나.”

인사가 끝나자마자 순서에 따르듯 엘리야는 내게 말을 건넸다. 그 은근한 뉘앙스가 마치 며칠 간 찾아오지 않은 걸 질책하는 듯이 들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수련하느라 바빴어요.”

“그래? 내가 심란한 소리를 하긴 했지. 하지만 난 그 이야기를 해야만 했어. 너도 알아야하지 않겠니.”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 때문에 혼란스럽긴 했지만, 모르는 거보단 나았겠죠. 근데 사이가 안 좋은 걸 빤히 알면서도 블레셋과 날 함께 부른 건 무슨 경우야. 쟤랑 화해하라고?

의미심장하게 웃은 엘리야가 마지막으로 내 비스듬한 뒤편에 서 있는 란델을 바라보았다.

“아힌을 내게 데려오느라 수고했구나, 란델.”

“언제나 저는 당신의 충실한 종이지요.”

충성스럽다기보단, 그답지 않게 비딱한 투로 대답한 란델이 엘리야에게 의례 하던 대로 예를 갖추었다. 앞선 두 남자가 엘리야의 손등에 입술을 대는 것을 바라보며 난 심각한 갈등에 휩싸였다.

진짜 나도 해야 하나? 나만 저거 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한다고 입술이 닳지는 않겠지만, 막상 내가 그에게 저런다고 생각하니 사지가 오그라들고 엄청난 거북스러움이 몰아쳤다. 거기다가 더해서 스스로 존엄성을 포기하는 느낌이다. 표정을 굳히고 서 있는 내 고뇌를 알아차렸는지, 엘리야가 풋, 소리 내며 웃었다.

“너는 할 필요 없단다. 그렇지, 이건…….”

묘한 빛이 흐르는 엘리야의 눈이 오만스레 블레셋과 란델을 시야에 담았다.

“나를 마음으로 따르고 있다는 증거니까.”

……묘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실질적으로 시온의 주인은 마스터이지만, 그를 향한 충성은 힘의 관계에 의한 불가항력적인 것. 시온들 사이에서 엘리야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였다. 에스겔과 블레셋 사이는 알 수 없지만, 시온들은 제각기 성격이 독자적이었다. 자존심과 힘이 넘쳐나, 충동할 것 같던 그들은 뜻밖에 서로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심점에 위치한 것이 엘리야.

그건 그렇다 치고, 왜 하필 그런 독특한 인사방식으로 마음을 증명해야 하는지 모를 노릇이다. 보는 내가 낯 뜨거워지는 기분이니. 내가 볼 때 저건 순전히 엘리야의 취향이었다. 발등에 키스하라지 않는 게 다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현 여부를 떠나서 난 그의 발등에 키스하는 시온들의 모습을 목격하지 않는 데 안도했다.

“그렇지, 모두 앉지 않겠니.”

엘리야의 제의에 블레셋이 털썩 그의 좌측에 붙어 앉자 난 자연스레 우측으로 다가가 앉았다. 블레셋과 한 자리에 있는 건 분명히 내키지 않았지만, 여기서 까탈을 부리는 건 내 손해일 듯싶었다. 게다가 이전까지 그를 싫어하는 마음이 강경했다면 지금은 여전히 싫긴 하되 그 마음이 좀 모호하게 흐려진 기분이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기도 했지만, 블레셋은 흡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만큼이나 달라졌다.

일단 기본적인 베이스는 같을망정, 성별이 바뀌었으니까……. 난 블레셋을 훑어보며 관찰하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란델은 앉을 생각이 없는 듯 팔짱을 낀 채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고, 엘리야는 내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친근하게 속삭였다.

“그 로브, 잘 어울리는구나. 옷감은 내가 골랐지. 더 화려한 걸로 하고 싶었는데 란델이 반대를 해서.”

============================ 작품 후기 ============================

조만간 또 올라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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