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달무리 금빛 숲-66화 (66/155)

00066  4. 마탑의 시온.  =========================================================================

“악수도 해야 하지 않겠니?”

뭘 바라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엘리야가 느긋하게 턱을 치켜들고 시선을 주자, 그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되었다. 내가 엉거주춤 일어나 손을 내밀자 에스겔이 바로 맞잡아왔다. 골격이 도드라지는 매끈한 손가락은 겉으로 보이는 흰 살결 그대로 차가웠다.

예의상 아래위로 흔든 뒤 서툴게 맞물린 손을 떼어내려 할 때, 손끝에 찌릿한 감각이 흘렀다. 방어 반응? 이건 설마…….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엘리야가 재미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에스겔은 탐구심이 강하지.”

빌어먹을 정신계 마법! 난 얼굴을 확 찡그리며 에스겔의 손을 내팽개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제 손을 갈무리하는 뻔뻔스러운 낯짝을 보니, 기분이 확 나빠진다. 에스겔은 내 불쾌감에 반응하는 대신,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가벼운 탐색이었는데 가로막힐 정도면, 마스터가 너를 단단히 방어하고 있구나. 네 안에 무엇이 있기에-”

말을 맺을 즈음에 그의 눈에 드리운 명암이 짙어졌다. 심히 부담스러운 눈길이다. 장신의 남자가 날 내려다보는 모습이 묘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찰나, 엘리야가 몸을 일으켜 달래듯이 차근히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화내지 말렴.”

나긋하게 속삭이는 음성에 가슴이 근질근질하다.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이면서 엘리야는 지나치게 거리낌 없이 달라붙고 있었는데, 그게 거북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끈적하기보다는 동성 친구처럼 태도가 담백해서,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마음대로 화도 낼 수 없다니. 엘리야의 지배력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까.

“저 가볼게요.”

부러 단호한 투를 자아내며 난 그에게서 벗어났다. 다행히 엘리야는 순순히 나를 놓아 주었다. 에스겔을 매몰차게 지나치면서 난 마탑이고 시온이고 하나같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참으로 흔쾌히 이루어진다. 그럴 능력만 있다면 뭐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싶다. 이곳에서 대면하는 무수한 비상식 앞에서 내 상식은 초라하게 빛을 잃고 말았다.

엘리야의 방은 내가 떠나고자 마음먹으면 벗어날 수 있는지, 혹은 그가 날 보내준 건지 성큼 걸음을 내딛자 텅 빈 복도가 나타났다. 문득 돌아보니 등 뒤로는 깨끗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실로 마법 같은 일이다.

……이제 이런 것도 일상이지. 들은 이야기는 무거웠지만 그렇기에 더욱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알면 알수록 더 막막해지는 느낌이었다.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어 홀 중앙에 도달한 난 금속성을 내는 선 위에 발을 얹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 지금은,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

새삼 마스터를 보고 질겁하거나 두려움에 벌벌 떨 필요는 없었다.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이고 과거에 어떤 짓을 벌였든, 마스터는 그대로 마스터였으니까. 그는 항상 위험한 이였고 나는 그걸 다시금 새기게 된 것에 불과했다. 뇌리로 인지하고 있는 그 사실에 내 몸은 제법 잘 따라주었다. 적어도, 나는 평소와 다른 태도로 마스터를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은 난 목구멍까지 들어찬 질문을 끄집어내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어째서 이세벨을 죽였는지, 그녀의 무엇이 마스터의 역린을 건드렸는지. 그게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애초에 엘리야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가 에스겔이나 란델과 함께 모의하여 내게 거짓을 말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편애를 다툴 일 없는 마스터 아래에서 우리 시온은 한 우산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어떤 대답이 올지, 혹은 그가 질문을 용납하기나 할지 두려워 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차라리 마스터가 이세벨을 싫어해서, 그녀를 해쳤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걸까. 그건 그나마 인간다운 일이었으니.

마스터는 내가 엘리야를 만나고 온 일에 대해서 묻지 않았고, 시름에 잠긴 채 며칠이 흘렀다. 나는 그간 단 한 번도 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세상과 외떨어진 섬 같은 방에 머무른 채로, 마스터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으며 난 오로지 마법에 몰두했다.

이따금 고요한 대기가 폐소공포증에 걸린 양 숨 막힐 듯이 답답하게 느껴지고, 잡념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 가슴이 온갖 감정으로 미어지곤 했다. 난 그때마다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들이쉬며 내 안에 쌓이는 모든 것들을 삭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내 그 모든 것은 물밑으로 가라앉아 태풍의 눈에 자리한 양 조용해졌다.

마스터가 방을 비울 때조차 내가 나가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는 엘리야를 만나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두려웠다. 그가 말한 게 한 올 한 올 질긴 실이 되어 나를 서서히 옭아매는 것 같았다. 내가 진정 알고 싶었던 이 마탑을 벗어날 방법. 그게 있기나 할까.

이 마탑에서 살아남고, 자리하는 법을 알려주듯 엘리야는 마냥 다정했지만 그가 말하는 것에 희망이라곤 없었다. 그의 말은 마스터가 그토록 냉혹한 사람이기에 죽음으로밖에 마탑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상기하게 했다.

나를 이세벨에게 대입해보는 건, 무의미하다 못해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지만 난 마스터에게 매달리다 무참히 재로 스러져가는 내 모습을 그려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상념과 고뇌로 점철된 와중에 이어간 마법수련은, 의외로 진전이 있었다. 마스터가 나를 몇 번이고 도와주었던 그 일들이 내게 길을 열어준 양 몸에 쌓이는 마력은 빠르게 늘어갔다. 그건 어쨌든 현실에서 마법을 써본 경험이 도움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내 뇌리 한구석에 스며 있다가 이따금 밀려 올라오는 기억. 꿈에서 마스터와 마주했던 그 순간들- 때로 그를 떠올리며 설레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나를 힘주어 감싸 쥐었던 하얀 손가락, 코앞에서 살랑이던 검은 머리카락, 그 서늘한 감촉…….

잠시나마 매혹당하거나 시선을 빼앗겼던, 누군가에게 느낀 그 어떤 감정과도 달랐던 건- 내가 수도 없이, 그 모든 기억을 곱씹으며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뿌리치려 애쓰고 있다는 것.

내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었던 때의 마스터는, 그게 비록 필요에 의한 것일지라도 다정했다. 따스하게 느끼기 어려운 무심한 수용이, 그 감정 없는 배려가 가슴에 닿았다. 아무 뜻 없는 선의가 때로 마음을 적시는 것처럼 내가 마스터에게 받았다는 것만은 사실이었기에, 난 처음 만났을 때 몸서리치기만 했던 마스터를 이해하려는 데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미 마스터를 규정지은 듯한 엘리야와 다른 시온들에게 마스터의 잔혹함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리 항변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그에게 기울었기 때문이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그 모든 게 바른 흐름이 아니란 것도 난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난 마스터를 부러 모른 체하며,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애초에 마스터는 내게 용건이 있을 때만 말을 걸기에, 함께 방을 쓰면서도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양 침묵은 위력적으로 유지 되었다.

두문불출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건 있었다. 혹시 엘리야가 에스겔이 한 짓에 내가 몹시 기분 상해서 그를 피한다고 오해하는 건 원치 않는걸. 다시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막연하게 만남을 뒤로 미루었다. 에스겔의 행동에, 화를 내기는 어려워도 납득이 가질 않는다. 도대체 이 시온들이란! 물론 정석적인 기준을 이곳에서 적용하는 건 불량배들 앞에서 도덕책을 읊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난 깨닫고 있었다.

단절된 며칠이 지난 뒤, 란델이 찾아왔다.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마스터가 눈을 들어 고요히 시선을 던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그가 마스터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건 참 묘한 느낌이었다. 엘리야 앞에서도 복종을 바치듯이 몸을 낮추는 그였건만, 그때보다도 자연스럽고 익숙하되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손등에 입 맞춘다거나 하지 않으니 담백했지만, 그 어딘가에 마음이 비어 있었다.

“용건은?”

“아힌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시선이 닿자, 난 괜스레 죄책감을 느꼈다. 마스터와 연결하는 것도 꺼린다고 했으니, 마스터의 방에 찾아드는 건 더욱 내키지 않았을 터였다. 내가 밖에 있었다면 기회를 보아 접촉했을 텐데, 방안에 꽁 박혀있으니 결국은 찾아오게 된 듯싶었다.

“그동안 잘 지냈니?”

웃는 얼굴로 인사해오는 란델은 여전했다. 온화한 낯도, 부드러운 말투도, 친근감 어린 눈빛도 그려낸 듯이 완벽하다. 보고를 마치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길래, 그에게도 나름대로 일이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그리고 난 이제 그 일이 무엇일지 짐작하고 있었다.

블레셋이 맞이한 변화. 에스겔이 블레셋에게 가 있었다면, 란델도 그랬을 확률이 높았다. 란델과 블레셋은 꽤 친해 보였으니까. 그게 섭섭하다면, 내가 그에게 과한 기대를 가진 것일 테지.

“잘 지냈어요. 란델, 제게는 어떤 볼일이?”

그의 용건이 퍽 궁금했기에 난 바로 물었다.

“내 안부는 묻지 않는 거니?”

진지한 얼굴로 장난스레 되묻기에, 난 흘끔 마스터의 존재를 의식했다. 시온끼리 친목을 도모해도 되는……. 거구나. 난 변함없는 마스터의 낯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괜히 신경 썼네.

마스터는 란델이 내게 용건이 있다고 말한 순간부터 모든 관심을 끊고 명상에 몰두해 있었다. 듣기는 듣고 있을 텐데, 뭐 상관없겠지. 어쨌든 마스터는 내게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주었던 것이다.

“얼굴에 잘 지냈다고 쓰여 있어서 굳이 안 물어 봤……. 어?”

란델이 말하고 있는 내게 냅다 무언가를 안겨주었다. 언제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난 붉은 색 옷감덩어리를 손에 들고 이게 뭔가 싶어서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떠올렸다.

“아, 그때 말한 로브!”

“그래, 색이 예쁘게 나왔지? 어디 한 번 입어보렴.”

그가 기대 어린 눈초리를 하고 있었기에 부담을 가지면서도 난 엉거주춤 로브를 몸에 둘렀다. 사륵거리는 감촉이며 가벼운 무게, 그러면서도 얇지도 않고 도톰하여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옷감이었다. 아마도 마법이 깃든 물건이겠지. 색은 아주 짙고 화려한 빨강이었다. 스칼렛레드라고 해야 할까. 나보다는 화려한 외양의 다른 시온에게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잘 어울리는구나.”

란델이 눈을 휘며 건넨 칭찬이 마치 진심처럼 들려와 쑥쓰러우면서도 난 거울을 보고 싶어졌다. 이런 눈에 띄는 색상은 매치시켜 본 적이 없어서, 그의 말이 진실일지 알고 싶었다. 난 아무래도 무채색이 좋은데, 마스터나 블레셋이 먼저 독차지해 버려서 어쩔 수 없었단 말이지.

란델은 혼자 말하고도 모자랐는지, 구태여 마스터께도 말을 걸었다.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오래도록 함께 해 와서 그런지 란델은 대범한 구석이 있었다. 잠시 명상을 뿌리친 마스터는 내 쪽을 힐끔 보고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렇군.”

그 대답이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니 긍정하는 게 맞겠지.’ 정도로 들려와 바짝 긴장했던 난 김이 빠지면서도 안도했다. 적어도 이상하지는 않다는 거잖아. 물론 마스터의 취향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화려한 걸 선호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기어코 거울을 찾아내 모습을 비춰보니 내가 보기에도 그럴듯했다. 어깨 위에서 떨어지는 선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웠고, 몸을 감싸는 감촉도 부드러웠다. 거의 입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그 화려한 붉은 색상이 의외로 잘 받는지 창백하기만 했던 낯빛이 화사하고 눈동자가 선명해 보였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할 만하네.

============================ 작품 후기 ============================

블레셋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는 곧 공개.

좋은 주말 되세요! 조만간 또 올라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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