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4. 마탑의 시온. =========================================================================
그리 깊이 질책할 의도는 없었는지, 에스겔은 흥미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엘리야를 똑바로 바라보며 용건을 꺼냈다.
“블레셋이 깨어났습니다.”
블레셋이……. 내심 그가 보이지 않는데 긴장하면서도 의심쩍어하고 있던 터였다. 내가 이렇게 탑 내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한 번쯤 나타나서 시비를 걸만도 한데 소식이 없으니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깨어났다는 건 잠들었다는 소리잖아.
하지만 에스겔의 말은 단순히 자다가 깨어났음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었을 지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난 여전히 블레셋에게 악감정을 쌓고 있구나 싶었다. 엘리야가 느긋하게 물었다.
“상태가 어떻든?”
“전보다 안정된 눈치였습니다. 아마 곧 엘리야를 만나러 올 수 있을 겁니다.”
“그 애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구나. 미리 말해주지는 말렴.”
“말할 생각 없었습니다.”
쓸데없이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듯이 굳이 무안을 주는 게, 감정적이라기보단 굉장히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원래 말투가 저런 사람인가 보다. 밖에 나가면 적을 많이 만들 상이지만, 엘리야는 소소한 것에 기분 상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섬세하지 않다고 하기보단, 여유롭고 자기중심적이라 남의 발언은 안중에도 없다고 보는 게 걸맞겠다.
어쨌든 에스겔의 첫인상은, 좀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도 그렇고 엘리야나 란델과는 달리 붙임성도 없는 듯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깐깐하게 규율을 따지는 선생님 상이니. 그리고 그런 사람 앞에서 학생인 내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너도 알고 있었니?”
말을 걸까 말까 우물쭈물하는데 엘리야가 나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쳤다.
“뭘 알아요? 블레셋을 본 적은 있어요.”
“블레셋이 널 죽이려 했다고 들었는데.”
……참 민감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낸다. 내가 심약한 사람이었다면 트라우마를 앓고 있었을지도 모르건만. 물론 내가 겉보기에 그리 심약해 보이지는 않지. 엘리야라면 그답게 잘난 자신이 그 모든 걸 치유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랬었죠.”
그 때문에 그를 다시 보게 되면, 갚아주겠다고 다짐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건 치기이고, 감정의 선상에 있는 비이성적인 다짐에 불과하다. 내가 그간 비록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블레셋에게 한 방 먹여주는 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블레셋이 백 년 넘게 살았다면 그 세월만큼 나와 그 사이에는 격차가 존재할 테니까. 더군다나 그 재능 때문에 기어오르는 것도 마스터가 일정 부분 용인했을 정도면, 그가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라는 걸까.
“마음에 담아두고 있니?”
엘리야가 소곤소곤 물었다. 그렇게 묻는다고 에스겔이 못들을 것 같지는 않은데……. 게다가 들으면 어때? 블레셋 귀에 들어갈 위험성이 있다고는 하나 블레셋도 내가 저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을 거라고. 에스겔은 비켜난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었다. 나는 그를 의식하지 않는 척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연히 담아두고 있죠.”
당신이라면 당신을 난데없이 습격해서 마구 팬 다음 죽이려고 들었는데, 그걸 순순히 용서하겠어? 엘리야라면 다른 사람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특유의 묘한 냉정함으로 용서 비슷하게 넘겼을 수 있겠지.
하지만 어쨌거나 블레셋은 내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으며, 그가 용서를 구했다고 한들 내가 그를 꼭 용서해줘야 하는 건 아니었다. 내겐 그를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렇듯 사그라지지 않는 반감은 처음이었다.
……란델도 첫날부터 내게 정신계 마법을 걸었었지. 하지만 내가 그걸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건 그는 적어도 풀어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곤란한데.”
엘리야가 턱을 괴며 날 지그시 응시했다. 이건 눈빛 공격일까. 흡사 다수의 군중에게 비난받는 것과 비슷한 압박감이 날 짓눌렀다.
“시온끼리 사이가 나쁜 건 좋지 않아. 함께 일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리고 마스터는 임무 배정에 개개인의 감정을 고려하시지 않을 거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는 이제까지 내 청을 들어주셨으니까 만약 블레셋과 함께 뭔가를 하게 되어 그걸 바꿔달라고 말씀드리면…….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그런 이내 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마음대로 돌아가는 내 머리통을 때려주고 싶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새긴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내 사고란 이렇듯 편의적으로 흐른다.
어쩌면 내 최후는 내 어리광을 이기지 못한 마스터가 날 재로 만들어서 초래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걸요.”
이건 엘리야의 말에 대한 변명이며, 나 자신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걸 어쩌겠어. 엘리야가 과장되게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끌어안았다. 방어할 새도 없이 난 그에게 푹 파묻혔다.
“그때 많이 놀랐나 보구나. 가엾기도 하지.”
지금이 더 놀랐어요……. 놀라다 못해 코에 확 스며드는 향기로운 체취에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무슨 남자한테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향수라도 뿌렸나. 소파 취향이며 인테리어 센스를 보건대 엘리야는 몸에 향수를 뿌릴 만큼 세심한 남자이긴 했다. 그 아찔한 향취에 엘리야의 품에 안겨있단 게 확 의식이 되며 심장이 떨렸다.
나한테 미인계를 쓰고 있는 건가. 이유는, 블레셋을 용서해달라고? 당사자도 신경 안 쓰는데 왜 당신이 그를 감싸는 거지. 벗어나려고 해보았으나, 근육이 별로 없어 보이는 매끈한 외양과는 달리 엘리야는 생각 외로 힘이 세었다. 등 뒤를 두른 손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난 항의하고 싶었다. 물론 당신의 박애 대상에는 블레셋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간 함께 보낸 세월을 고려할 때 블레셋을 향한 감정이 그의 안에서 조금이나마 더 비중이 있을 거야. 그래도 엘리야가 블레셋의 편이라는 생각이 들자, 묘하게 서러운 기분이 든다. 머리 위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하지만 들어보렴. 그때 블레셋은 정상이 아니었단다.”
블레셋의 성질머리는 확실히 정상 같지 않았다. 하지만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는걸. 사람과 상황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은 멀쩡해 보였다고.
“블레셋은 너무 오래도록 선택을 미뤄왔어. 그게 그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 거지.”
“선택이라고요?”
“그래, 블레셋은 릭샤 족이잖니. 성년이 되면 성별을 선택하게 된단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이야기라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 그랬었지. 릭샤 족은 무성이라고 했어. 희귀한 종족이라고도 했고,
“그런데 블레셋은 열여섯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선택을 지금껏 미뤄왔어. 릭샤 족은 최대 서른 살 남짓까지 선택을 미룰 수 있단다. 그 이후로도 성별을 정하지 않는 건 릭샤 족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번데기가 나비가 되지 못하면 죽는 것처럼, 그들도 그러하기에 위기를 느낀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변하거든. 그게 릭샤족의 타고난 마력의 근거이기도 하지.”
설명하는데 신경이 쏠렸는지 팔이 느슨해져, 난 그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붉어져 있을 내 뺨에 시선을 두며 엘리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블레셋은 마법사이지. 그것도 마탑의 시온. 그렇기에 그는 제 몸의 생체반응을 정지시키면서까지, 분화를 보류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것도 최근 한계에 다다랐지. 조만간 블레셋은 성별을 결정해야 했어. 아니면 정말로 죽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블레셋이 다혈질이고 까칠한 건 사실이지만, 원래 다짜고짜 탑의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생각 없는 아이는 아니었단다.”
그 전제가 좀 마음에 걸리는데요. 탑의 사람이 아닌 그냥 사람은 다짜고짜 죽이려고 했단 뜻인가요? 꼬집어 묻기도 전에 엘리야가 줄줄 읊었다.
“그 아이에게 드러난 건 극단적인 공격성, 본능에 입각한 사고. 피할 수 없는 변화를 앞두고 그 애는 초조했을 거야. 조만간 찾아올 거라는 건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 변화가 언제 시작될 몰랐고 마침 마스터가 탑을 비운 터. 블레셋은 마스터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지. 그에게 성별을 결정해달라고 하거나, 적어도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마스터를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미련은 남아있었거든.”
그때 엘리야와 에스겔은 모두 탑을 떠나 있었다고 했다. 란델은 마침 일이 끝나고 돌아와 막 블레셋이 나를 죽이려는 순간 막아설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 타인에게 배타적인 편인 블레셋은 마스터의 곁에 있는 너를 보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이세벨에 대한 기억이 겹치면서 더욱 공격적이 되었던 거란다.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네 존재를 블레셋의 비틀린 정신이 그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지. 그게 적개심과 살의로 연결되었던 거야.”
퍼뜩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마스터가 블레셋을 징벌한 게……. 그건 순전히 블레셋이 마스터에게 대들었던 탓이지만 그 원인은 날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마스터가 고통스러운 벌을 내렸는지 블레셋은 굉장히 아파 보였으니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기에 그 아픔이 나 때문에 초래된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연결 지었다면……. 추측의 흐름을 놓지 않으며 난 토를 달았다.
“란델을 보고도 물러나던데요.”
“말했잖니? 본능적이라고. 본능이라는 건 아주 예민하단다. 란델은 블레셋보다 강하니까. 그래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거지.”
이렇게 들으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긴 하다. 피치 못하게 일종의 정신이상이 온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까. 하지만 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내가 그의 사연을 너그러이 이해해줘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멀쩡해진 블레셋은 내게 용서를 구한다면 모를까.
“시온을 살해하려 한 바도 있거니와 그 이후로 블레셋은 급격히 불안정해져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단다.”
뭐야, 그럼 내가 6개월 동안 방 밖에도 나서지 않고 마법 수련에만 몰두할 이유도 없었잖아.
“그리고 최근에 그는 변화를 맞이했단다. 보통은 사나흘이면 변화가 끝나지만……. 이번에는 꽤 오래 걸렸지. 열흘 즈음?”
마음이 풀려가는 걸 느끼면서도 난 퉁명스레 물었다.
“그래서 블레셋은 여자가 되었어요? 남자가 되었어요?”
“이런, 내가 에스겔에게 알려주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직접 볼 거란다.”
엘리야가 정말로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는지, 다급히 막자 내게도 궁금증이 싹텄다. 하지만 이 사람들과 함께 그를 보러 갈 만큼 친근한 사이도 아니었으며,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다니 내가 누군지 기억이나 할까 모르겠다.
하지만 바람은 있었다. 이왕이면, 여자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내가 이길 수 있잖아? 여기서 육체적이라는 말은 ‘외모’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폭력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분위기를 환기하듯 엘리야가 가볍게 손을 짝 맞부딪혔다.
“그나저나 둘이, 인사는 해야지?”
“에스겔이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에스겔은 팔짱을 끼고 선 채 참으로 담백하고 심플하게 제 이름을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흉내 내려는 건 아니지만, 말할 수 없는 게 많았으므로 나 역시 간결하게 답했다.
“아힌이에요.”
나에 대해서 별로 궁금해할 것 같지도 않으니. 그제야 나는 에스겔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반듯하고 단호한 느낌을 주는 턱선이며 콧날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아주 남자답다거나 굵직하게 생긴 건 아니었지만, 마탑의 시온 중 유일하게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다른 시온은 아무래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쪽이 어울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