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4 4. 마탑의 시온. =========================================================================
“마스터께서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분다운 투로 답하셨지. ‘네 감정은 내게 하등 쓸모가 없다.’”
제법 훌륭한 모사였다. 멎어든 숨이 밀려드는 안도에 다시금 내쉬어질 새도 없이 엘리야는 말을 이었다.
“가엾은 이세벨은 마스터에게 호소했어. 사랑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그녀를 바라봐 달라고. 마스터를 처음 본 순간 운명이라고 믿었다고. 거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엘리야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드리워졌다.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겠지.”
비밀을 속삭이듯이 한껏 낮추어진 음성이 귀에 감겼다.
“그 말이 마스터의 무엇을 건드렸는지는 몰라. 무표정한 얼굴도 태도도 여전했지만, 난 마스터에게서 변화를 느꼈어. 공기가- 움직였거든. 마스터는 마치 화가 나신 것처럼 보였지.”
“…….”
“그 순간 난 처음으로, 마스터가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어.”
그 무심한 마스터가 그렇듯 거부 반응을 보였다고? 고백한 순간, 상대가 그런 기미를 내비친다면 그게 얼마나 참담한 기분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기분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먼 과거의 이야기인 것을 알면서도 가여워하기 이전에 안심하고만 나 자신에 난 이를 악물었다.
“마스터는 말씀하셨지. ‘정말로 저항할 수 없는 걸 네게 주마.’”
“…….”
“그 말이 끝났을 때, 이세벨은 그 자리에서 산 채로 재가 되어 부스러졌어.”
전율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일어났다. 마스터가 한 사람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가는 광경을 난 이미 본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처럼 구역질 나는 모습은 아니었을망정 두려움이 덜했을 것 같지는 않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인 죽음이었다.
“참혹하고……. 초라한 죽음이었지. 누구도 막지 못했어. 당연히,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왜 그녀를 말리지 않았어요?”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가닥이 닿자, 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안이하게 생각했으니까. 자비로운 분은 아니지만, 마스터가 시온에게 손 대신 적은 없었단다. 그래, 오히려 관대했다고 해야겠지. 시온은 마스터의 유용한 수족이니. 종종 블레셋을 벌하긴 하셨지만, 그때뿐이었어. 마스터는 늘 모든 것에 무심하셨지.”
엘리야는 내리깐 눈을 들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서 이세벨이 죽음을 맞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야. 모두가 차라리 이세벨이 호되게 벌을 받고 제 감정을 포기하게 되기를 바랐지. 하지만 결과는……. 이제까지 시온이 죽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단다.”
엘리야는 짚어내듯이 속삭였다.
“제 감정을 내세우는 그녀가 용도에 맞지 않는다고, 판별한 게 아닐까.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
엘리야는 가느다란 미소를 띄워 올렸다. 흥미롭다는 투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마스터의 눈빛을 잊지 못해. 혐오, 분노, 증오……. 그분을 지배했던 건 그중 어떤 감정이었을까.”
애초에 별로 감수성이 넘치는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았지만, 엘리야의 반응은 슬픔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세벨의 죽음을 그리 깊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싶다. 그도 실은 무척이나 냉정한 사람이 아닐까.
하긴 마탑에 오래 있지 않았다고 했잖아.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면 엘리야와 함께 한 시간도 길지 않았을 터. 그럼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건 적어도 과거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배려일까.
“최악의 상대를 사랑하는 건, 한 명으로 족해.”
“블레셋은 아직도…….”
마스터께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던데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엘리야가 피식 소리를 냈다.
“그 아이는 이미 포기했어. 그저 포기한 자신을 납득할 수 없어서 떼를 쓰고 있을 뿐이지.”
그러면서 엘리야는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나를 사랑했다면 적어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뜬금없는 말이었다. 엘리야는 턱을 괴며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러니 생각해 봐, 너도.”
이건 내 하렘에 들어오면 어떻겠냐는 섭외 혹은 유혹인가. 난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멋대로 남을 휘두르는 사람인 건 알겠지만, 이 가라앉은 분위기에 그런 농담이 나와? 엘리야는 태연스레 답했다.
“이 마탑은 마음을 공허하게 만드는 장소야. 그리고 나는 항상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주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보답 받을 수 있는 상대를 택하는 게 낫지 않겠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는데 기가 턱 막혔다.
“그렇지만, 그 보답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거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건 유일하지 않잖아요. 마음은 그런 식으로 충족되지 않아요. 내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던 난 문득 입을 다물었다. 엘리야가 날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네 의견은 잘 들었다. 물론, 나는 항상 의견을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
그럴 내용도 그럴 의도도 아니었는데, 엘리야의 한 마디에 난 어쩐지 그에게 나만 사랑해달라고 징징거린 꼴이 되어버렸다. 당황하기도 하고 짜증이 솟구친 난 나도 모르게 엘리야를 향해 쏘아붙였다.
“아무튼, 전 필요 없어요!”
“그리 정색할 건 없잖니, 상처받게.”
상처받았다고 하기엔 뻔뻔스러울 만치 여유 넘치는 얼굴이다. 흥분을 삭이며 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일러주었다.
“저는 이세벨이라는 그 사람과 같은 꼴을 당할 생각 없어요. 그렇다고 대체품으로 엘리야를 택하지도 않을 거고요!”
“어째서? 내게 네가 사랑하기에 부족한 점이라도 있는 거니?”
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하는지 속이 탈만큼 민망하고 어지러웠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렇게 마음대로 누구를 좋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면서 설명했다.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응해주는 건 원하지 않아요.”
특히나 그런 이유로 응해준다는 걸 알고 있다면, 얼마나 비참한 기분일까.
“세상에 동등한 감정은 없어.”
엘리야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애정을 품고 있지만, 그게 그들이 품은 감정과 같지는 않단다.”
“네에.”
그건 척 듣기에도 깊이가 얕을 만하다. 감정도 에너지니까. 에너지의 절대량은 한계가 있고 그게 많은 사람에게 흩뿌려진다면 당연히 개개의 상대를 향하는 건 얄팍할 수밖에. 그래, 당신이 이세벨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겠지.
어떤 의미에서 엘리야는 마스터처럼 냉정한 사람이다. 감정적으로 기복이 없고 해수처럼 늘 일정한 높낮이만을 유지하는. 너르고 고르게 사랑하는 건 편애하지 않기 때문이지.
“엘리야는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져본 적이 있어요?”
놀랄 만큼 빠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있지.”
그게 누구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스터는 내게 빛이었단다. 나는 그의 혈육이 되고 싶었지. 처음으로……. 느껴본 갈망이었어.”
자식처럼 사랑받고 싶었단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엘리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리 강렬한 마음은 아니었단다. 마스터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분이시지. 나는 그의 첫 번째 시온이지만, 마스터는 내게 의미를 두지 않았거든.”
그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는 양 엘리야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속삭였다.
“아마 내가 이세벨과 같은 말을, 이세벨처럼 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야.”
겉보기로는 좀 독특한 구석이 있고 성격도 별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끝맺음이었다. 그런데 마스터는 남자잖아? 엘리야는 어지간한 여자보다, 심지어 샤자한의 이리스보다도 아름답지만,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두 배쯤 화가 났을 듯싶었다. 재도 남기지 않았을지도.
토를 달고 싶은 충동을 삼키며, 난 다른 화제를 꺼냈다.
“란델이나 그 에스겔이란 사람은 어땠나요.”
“란델은 영리한 아이였어. 오래지 않아 기대를 지워낸 뒤 그 아이는 더 이상 마스터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에스겔도 느리긴 했지만, 비슷했지.”
엘리야는 차분하게 원인을 짚었다.
“우리는 다들 천애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였지. 그렇기에 우리를 구원해준 마스터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리고 당신은 마스터를 대신해 애정을 돌려주는 역할을 맡았다는 건가. 진짜 이상한 시스템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했더니.”
문득, 어디선가 낮은 음성이 들려와 난 퍼뜩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
“결론은 간단하잖습니까, 엘리야. 쓸데없이 늘어지는 이야기 할 필요 없어요.”
“에스겔.”
“마스터에게 우리는 자식도 제자가 아닌 쓸만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
성큼 걸음을 내딛으며 말하는 사람의 키는 꽤 컸다. 딱 부러지는 발음만큼이나 대단히 세련되고, 깍듯한 인상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미남이었고, 밤색 머리카락에 녹색이라고 하기에는 채도 높은 투명한 비취색 눈동자가 도드라졌다.
맑고 깨끗하지만, 그만큼이나 선명하여 거리감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새로운 시온이 마스터에게 빠져들까 봐 염려라도 되셨던 겁니까. 여자아이라서.”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난 반갑다는 뜻으로 웃어 보여야 할지 망설였다. 첫 만남이니까,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척 보기에도 까다로운 사람 같다. 내가 무언가 행동하기 전에 엘리야가 지적했다.
“인사를 생략했구나.”
그러면서 손등을 보인 채 손을 내미는 게……. 나한테 한 말이 아니었어?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에스겔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당연한 듯이 무릎을 꿇고 엘리야의 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몸에 익은 것처럼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란델도 그랬지만, 저게 엘리야 전용 인사방식이라도 되나? 마스터가 저런 걸 요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쓸데없지만 중대한 고민이 움텄다. 난 저거 안 했는데……. 나도 해야만 하는 걸까.
시간 낭비할 것 없다는 듯 에스겔이 일어서며 내게 툭 말을 던져 상념을 끊어냈다.
“다음부터는 사람들 눈앞에서 구경거리가 되지 않길 바란다.”
아, 경매……. 날 샀다는 사람이 이 사람이었지. 참 첫 만남부터 냉정하게 후벼 판다.
“벼, 변명하자면 저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어요.”
“애초에 거긴 왜 올라간 거지? 엘리야처럼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닌 듯한데.”
에스겔은 특유의 깔끔한 발음으로 진정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야를 숭배하는 것처럼 굴어놓고 평가는 자못 객관적이었다. 내가 거기에 납치당했다는 사실은, 솔직히 잘못도 아니고 그럴 만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곳 세상이 그리 인신매매가 성행할 만큼 험한 곳인 줄 어떻게 알았겠어?
그러나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어도 내가 ‘마탑의 시온’이라는 전제가 달린다면 그 모든 게 이상하리만치 여지가 사라진다. 별로 소문내고 싶지도 않고. 그걸 아는 건 란델과 마스터 둘이면 족하다. 난 퉁명스럽게 얼버무렸다.
“그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엘리야가 말리는 척 나섰다.
“그리 탓할 건 없단다. 좋은 구경이었는데. 에스겔의 시야로 본 것이지만, 꽤 흥미진진했단다.”
……약을 올리려는 건지 편을 들려는 건지.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아. 내게 화사하게 눈짓하는 얼굴이 지독하게 얄밉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 작품 후기 ============================
좋은 하루 되세요!
곧 한편 더 올라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