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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63화 (63/155)

00063  4. 마탑의 시온.  =========================================================================

누군가에게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걸 실감하는 건, 가슴이 싸늘해지는 일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하고, 불에 덴 양 아팠다. 그리고 못내 우스웠다. 마스터가 나를 아껴서 나를 치워버릴 수 없기를 바라다니. 정말로, 태평하기도 하지. 그건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희망이라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가능하다면 진작에 다른 시온들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의 첫 번째 시온인 엘리야. 누구나 매혹시킬 만한 그 사람이라면-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웠다. 나 자신의 이기심이. 끄집어내어 진 속내는 내가 진심이라고 믿고 있던 것을 배반하고 있었다. 그게 되돌아와 가슴을 후벼 팠다.

이토록 계산적인 내가 그를 냉혈한이라고 비난할 자격이 있나? 나는 마스터에게 진심인데, 그는 내게 조금도 마음 주지 않는다고……. 내가 그에게 바라고 서운해할 자격이 있던가. 이게 그를 이용하려 드는 것과 뭐가 다르지. 이런 내 얄팍한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면 마스터가 날 좋아하지 않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러다 이내 타협과 위로의 속삭임이 나를 휘돌았다.

……어쩔 수 있겠어? 감정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아.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야. 평생을 그에게 얽매여서 여기서 살 수는 없잖아. 마스터는 결코 날 돌려보내 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난 돌아가고 싶은걸. 그를 이용해서라도 그렇게 하겠단 게 왜 나빠? 이렇게 되길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데. 난 재난에 휩쓸려버린 피해자일 뿐이라고! 누가 비난하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내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무언가에 막혀버린 듯이, 나는 그 의무적인 뇌까림에 감정을 불어넣지 못했다. 가슴을 꽉 메우고도 남을 그리움과 서글픔, 불안감으로 왈칵 눈물을 쏟다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기에 무의식적으로 주의를 돌렸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분명한 건, 그러기 위해서는 마스터의 애정이 필요하다. 좋아하니까 필요하고, 필요하니까 좋아하고. 내겐 그 둘 다였다. 그 두 가지가 내 안에서 때때로 충돌하며 치열하게 우위를 다투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마스터가 나를 좋아하되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가장 바람직했다. 그러나 전자는 이루지 못했고 후자는 내 안에서 모호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어느 것도 내게 유리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나를 혼란하게 휩쓸어낸 상념과 감정은 서서히 가라앉아갔다. 마스터는 막막한 눈으로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내가 그저 몰래 나갔다가 소환되어 당황하거나 겁먹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질책할 의도는 없는지 그가 고요히 물었다.

“엘리야를 만났나.”

내 몸에 묻어있는 마력의 자취를 읽어낸 듯했다. 방에 없다는 걸 알고 바로 소환했을 정도면, 내가 도망칠 거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떨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가까스로 답했다.

“……네.”

그가 토로한 사실이 민감한 문제일 수 있다는데 가닥이 닿은 난 재빨리 덧붙였다.

“벼, 별 이야기는 안 했어요!”

흐트러진 음성이 퍽 수상쩍게 들려온다. 어째서 마스터 앞에만 서면 이렇듯 실수를 연발할까. 수많은 사람의 이목 속에 선 것보다 마스터는 나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그는 원하는 대답을 능히 이끌어낼 수 있는 자이니,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사무적으로 말한 마스터는 그대로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그걸로 용건이 끝났다는 듯한 태도였다. 굳은 채 서 있던 나는 이윽고 찬찬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잠들어버린 양 완만한 선을 그리며 내리깔린 눈꺼풀은 미동도 없었다.

완벽한 단절감. 이럴 때의 그는 무수한 세월,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온 아스라한 절경 같다. 시간의 흐름조차 멎어버린 듯한 생기 없는 정적. 그의 모호한 무심함이 가슴에 사무쳤다. 차라리 당신이 내게 못되게 굴었다면 나는 속 편히 당신을 배척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나는 그에게 너무도 많은 것들을 받았다. 호의나 호감에 기반을 둔 게 아닐진대 그는 나라는 씨앗을 길러내듯이 물과 양분을 흠뻑 뿌려주었다. 그 베풂에 목마른 내가 혹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아주 천천히 그렇게 되었다.

묻고 싶은 말들이 가슴께에서 어른거린다. 두려움에 목이 메어 내뱉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이세벨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녀를 죽여야만 했는지. 나를 왜 데려왔는지. 그리고 왜 이 마탑을 세웠는지…….

그러나 난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기척을 느낀 그가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면,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한순간 치밀어 올랐던 감정의 잔재가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가장 어리석은 꼴은, 날 돌려보내 주면 안 되느냐고 그의 발목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거겠지.

그래선 안 돼. 울렁이는 목울대가 감정을 내리누른다. 나는 천천히 침대가로 다가가 앉았다. 잠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 즉 마법을 배우는데 몰두하기로 했다.

그래야 진정이 될 것 같았기에.

나는 마스터에게 외출을 암묵적으로 허락받았다. 그가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그건 적어도 해서 안 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를 소환했던 것과는 별개로 마스터는 내 외출을 금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루가 지난 뒤, 온종일 마법 수련에 힘을 기울였던 난 마음이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또다시 마스터가 자리를 비운 걸 발견하자, 다시 엘리야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시 그를 만나러 오길 원해서 일부러 말하다가 만 게 아니었을까. 그 점은 좀 의심이 간다. 내가 궁금해서 안달 나 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건지도 모르지. 그는 남을 휘두르는 걸 좋아하니까!

정말, 악취미야. 부글거리는 심정으로 홀로 이동한 나는 어제처럼 어느새 날아든 나비를 따라갔다. 나를 맞아들이는 엘리야는 근심이나 걱정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것처럼 여전히 반짝반짝했다.

“어서 오렴.”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화사하게 미소를 짓는 그를 보자 불만은 씻은 듯이 잊혔다. 수면으로 끌어올려져 빛이 깃드는 양 모든 게 환하기만 하다. 내게 시름을 안겨주었던 이가 도리어 내 기분이 나아지게 한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것도 능력이겠지.

이 사람이 내가 살던 세상에 있었으면 신흥 종교의 교주가 되지 않았을까? 순식간에 신도를 갈퀴로 끌어모으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야. 마스터가 그를 표현했던 말들이 다시금 떠올라 인상 깊게 되새겨졌다.

‘원하는 대답을 능히 이끌어낼 수 있는 자.’ 첫 번째 시온이라면 마스터의 첫 제자일 텐데. 애정이 담겨있기는커녕 지독히 객관적이고 거리를 둔 표현이었다. 이 엘리야 역시도 마스터의 마음을 사는 데에는 실패했던 걸까.

갑갑해진 난 그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오늘은 인테리어가 바뀌지 않았다. 수시로 새로운 소파를 조달하는 건 그에게도 귀찮은 일이지 않을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 지, 망설이는 내게 엘리야가 먼저 말을 걸었다.

“만 챠드는 언제 갚을 거니?”

……아니, 빚 독촉을 했다.

“……네? 그거 제가 갚아야 해요?”

뜬금없는 소리에 난 당황해서 반문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날 사달라고 했느냐고. 난 그냥 정 안 되면 경매장을 박살 낼 생각도 했는데. 근데 그 돈 정말 내긴 한 걸까? 의심쩍게 쳐다보자 엘리야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빙빙 감아올리며 피식 웃었다. 아니꼽도록 우아한 자태다.

“갚을 수는 있고?”

“저 돈이 없는데…….”

정말 거짓말이 아니고 단 한 푼도 없었다. 납치되었을 때 다 털리고 그 이후로 돈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 돈을 왜 갚아야 해?

“물론, 농담이란다. 값을 치르긴 했는데 바로 돌려받았어. 그러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렴.”

‘마탑의 시온이 없어 보이면 곤란하니까.’라고 웃는 엘리야에게, 난 떨떠름하게 답했다.

“네에. 다행이네요.”

별로 순순히 돌려주었을 것 같진 않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만 좀 놀렸으면 좋겠는데 아쉬운 게 있으니 화도 못 내겠고. 내가 아쉽지 않아도 쉽사리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본론으로 접어들 참인지 엘리야가 내게 몸을 기울이며 지그시 눈빛을 보냈다.

“내게 궁금한 게 있지 않아?”

“어제 하시던 말씀.”

좀 더 자세히 해주셨으면 해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엘리야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세벨은 너와 비슷한 나이에 마탑에 들어왔단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무거운 화제로 바로 파고들면서도 엘리야의 표정은 여전히 가벼웠고 눈빛은 아스라했다. 감정은 있되,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을 옅은 잔재가 그에게 남아있는 듯이 보였다.

“에스겔이 그 아이를 돌봤지. 그리 오래는 아니었어.”

모든 게 덧없다는 투로, 엘리야는 여유롭게 속삭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으니까.”

“왜죠?”

“그 아이는 어리석었어.”

잔영이 어리듯 보랏빛 눈동자에 희미한 깊이가 깔린다.

“마탑에 있는 무수한 미남을 놔두고 하필 사랑해서 안 될 사람을 사랑했지.”

그는 짐짓 농담처럼 들리게끔 말했다. 나는 답을 알면서도, 확인하기 위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누군데요?”

“마스터.”

쿵. 무언가가 큰 소리를 내며 머릿속을 울렸다. 그리고 어딘지 모를 진원을 떠나 온몸으로 떨림이 번져나간다. 예상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눈앞이 아득해지는 이 감각.

“이세벨은 재능이 뛰어났어. 그래서 마스터께서 그 아이를 선택하신 거겠지.”

느릿하게 흘러드는 음성이 숨겨진 비사를 끄집어냈다.

“그 아이는 마스터를 원했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엘리야의 눈이 기이한 윤을 냈다.

“마스터께서는 다른 이들이 쉽사리 그를 갈망하게 하거든.”

나는 말없이 동조했다. 이제는 알 것 같아. 왜 블레셋이 그리도 애타는 눈길로 마스터를 좇았는지.

엘리야와는 다른 의미로 마스터는 특별했다. 그는 존재 자체에 사람을 허덕이게 하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었다. 흠 없이 무결한 도자기의 윤기 흐르는 표면이 사람을 매료시키듯 본질에서 비롯된, 온기가 결여된 비인간적인 완전성이 이질로써 마음을 사로잡는다.

모든 존재를 합리적이고 명료하게 파악하고 활용하는 기계적인 면모는 그 완전성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마스터는 사고하고 숨 쉬는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이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는 이들을 매혹시켰던 것이다. 그건 지극히 본능적인 끌림. 그러하기에 나 역시도…….

“블레셋이 그랬고, 이세벨도 그랬지. 하지만 블레셋과 이세벨의 감정은 분명히 달랐어. 블레셋은 사랑받지 못한 아이처럼 막연히 애정을 갈구한 반면 이세벨은 열정적이고 담대했지.”

“…….”

이상하게, 그 소리가 듣기에 거슬렸다.

“그 아이는 제 마음을 참아내지 못했어. 어리기도 했거니와 이세벨에게 사랑은 곧 소유였지. 알다시피 시온은.”

엘리야는 화사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 자제심을 교육받지 않거든.”

확실히 당신은 제멋대로인 쪽 같아. 란델도 그러하거니와 성격은 각자 특색이 있되, 그들은 하나같이 자존감이 충만했다. 나만 빼고. 엘리야가 한층 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래서 그 아이가 마스터에게 고백했을 때-”

나는 숨을 죽였다.

============================ 작품 후기 ============================

이번 주가 얼마 안남았으니 다음편도 조만간 올라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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