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달무리 금빛 숲-62화 (62/155)

00062  4. 마탑의 시온.  =========================================================================

“실은, 궁금했단다. 왜 처음부터 네게 직접 마법을 가르치려고 하신 걸까. 아무리 시온을 들인다고 해도 마스터께서 그런 수고를 감수하실 이유는 없는데.”

제가 다른 세계에서 와서요. 가늠하듯이 날 들여다보면서 턱을 괴는 엘리야에게 그 간단한 진실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마스터의 경고를 새겨들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샤자한의 왕 앞에서 경솔한 말 한마디에 생사의 고비를 오가야 했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뚜렷했다. 내게 걸린 금제가 어디까지 적용되는지 알 수 없는 이상, 난 항상 입을 조심해야만 했다.

하지만 엘리야가 말한 바에 대해서는, 나도 궁금한 게 있다. 어째서 마스터는 나를 구해주셨을까. 내가 그에게 살려달라고 말했다고 한들,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버렸으면 되었을 텐데. 그리고 마스터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데. 혹여 내게 그가 필요로 하는 무엇이 있었다면…….

물론 이 모든 게, 그저 내 과도한 의미부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스터가 날 구한 건, 그저 내가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기 때문일 수 있겠지. 마침 시온이 필요했기에 날 주워간 거라면.

“네가 여자라서일까.”

엘리야가 스스로 말하고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럴 리 없지.”

네, 아니겠지요. 실은 마스터와 동거 생활을 오래 하면서 하도 의식하지 않은 나머지 성별을 잊어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건, 내가 설사 좀비라해도 마스터가 조금도 개의치 않을 거라는 사실 뿐이다. 엘리야가 말한 건 그런 뜻이리라.

아니면 설마 내가 너무 못나서 마스터가 내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낄 일이 결코 없단 뜻은 아니겠지?

가늘게 좁혀드는 눈매가 마음이 들지 않는지 엘리야가 손끝으로 꾹 눌러서 폈다. 내 얼굴 근육도 마음대로 못하나? 독재자가 따로 없다고 내심 투덜대고 있는데,

“헛된 기대는 접어.”

이어 흘리는 말에 난 눈을 크게 떴다.

“가여운 이세벨처럼 되지 말고.”

낯선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여자의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었다. 음영이 지듯 깊어진 눈을 마주하며 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이세벨이 누구지요?”

“포도 덩굴처럼 짙고 탐스러운 녹색 머리카락과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지.”

오래된 가락을 읊조리듯 여운이 담긴 음성이었다.

“이제는 재가 되어 버렸지만.”

“재가…… 되었다고요?”

상이 맺히듯 보랏빛 동공에 희미한 그림자가 어렸다. 엘리야의 시선이 내게로 곧게 박혔다. 달싹이던 입술이, 한순간에 내게 작별을 고했다.

“……이만 가보렴.”

돌연 끊어내는 듯한 느낌에, 난 당황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변덕스러운 사람이라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저, 엘리야.”

“오늘은 여기까지.”

쉬이- 소리를 내며 모호하게 웃은 엘리야가 날 밀어냈다. 너무도 순순히 난 소파에서 밀쳐져 바닥에 발을 대었다. 그리고 일순, 취한 듯이 시야가 아찔해졌다. 눈을 깜빡이던 난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텅 빈 홀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꿈을 꾸고 온 듯한 감각이다. 얼떨떨한 나머지 난 바삐 좌우를 돌아보았다. 뺨이라도 꼬집어볼까? 선 채로 잠이 든 게 아니라면 이 무슨 조화일까. 그때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의 초대에 응한 모양이로구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해 화들짝 놀란 난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공중으로 튀어 오를 뻔했다.

“라, 란델. 놀랐잖아요.”

“미안하구나.”

별로 미안해 보이지 않는 상큼한 미소였다.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느낌이 그랬다. 보고를 마치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지만 그래도. 내가 운을 떼기 전에, 란델의 말문이 먼저 트였다.

“엘리야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주의하렴.”

그 충고에는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이미 휘둘리고 있는 거 같은데요.”

이대로 가면 엘리야의 신도 중 하나로 합류하게 되지 않을까 부쩍 우려된다. 내가 진지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란델이 곤란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야는 매력적이고 아름답지. 그의 마력 역시, 그런 속성이니 저항하기 어려울 테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리야의 마력은 강력하되 짙은 장미향처럼 상대를 물들여 지배하는 느낌이다. 란델은 간단하게 엘리야를 정의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원하게 만드는 이란다.”

“그래서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요?”

입이 딱 닫히는 걸 보니, 그로서도 달리 방도가 없는가 보다. 란델도 엘리야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긴 했지만, 마치 신하처럼 굴지 않았던가. 이미 본인부터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지자 란델이 헛기침을 했다.

마침 엘리야가 말하다 만 내용이 궁금했기에, 난 기습을 가하듯이 빠르게 질문을 꺼냈다.

“이세벨이 누구인가요?”

자연스럽게 흐르던 공기가 일순 정지하는 듯했다.

“누가, 그 이름을…….”

란델의 입매가 뻣뻣하게 굳었다. 푸른 눈이 온화한 기색을 잃고 차게 얼어붙는다. 내가 잘못 꺼낸 걸까. 하지만 엘리야가 그 이름을 말한 건, 실수로 보이지는 않았다. 대답을 미루었을망정 차라리 내가 그걸 알도록 의도한 것처럼 들렸는데……. 란델이 그늘진 투로 물었다.

“엘리야가……. 그것까지 말하더냐.”

“네.”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알려고 들 걸 원치 않았다면 애초에 그 이름을 내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어쩌면 엘리야는 내가 궁금해 하길 원해서 그 이름을 언급했는지도. 내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자, 란델이 기가 찬 듯 뇌까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말씀해 주실 수는 없나요.”

재촉하듯이 말할 수 있었던 건, 그 질문이 상처가 될 만큼 란델이 민감하거나 연약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있는 다섯 번째 시온의 자리에 원래 있었던 아이.”

란델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이제는 없는 사람이야. 더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지.”

나 이전에, 시온이었다고?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심장을 긁고 지나가는 듯이 전율이 일었다. 섬뜩한 예감이 가슴을 조였다.

“왜, 이제는 없는데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약간 늦게 돌아왔다. 침잠된 눈빛이었다. 그의 낯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어둠이 깔렸다. 폐허를 목격한 듯한 표정으로 란델이 속삭였다.

“……죽었거든. 재가 되었지.”

……죽었다고. 난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래, 마탑의 사람이 마탑에 없다면 그런 이유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마탑의 시온이 죽을 수 있었던 거지?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몰려든다. 차가운 안개에 둘러싸인 듯이 이상하리만치 스산했다. 몸이, 가슴이 피가 빠져나가는 양 온통 싸늘해진다. 엘리야도 그 이세벨이라는 사람이, 재가 되었다고 했지. 그게 단순히 화장했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정말로 재가 되었다고…….

누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의혹을 담고 올려다보는데 갑자기 강력한 마력이 물밀 듯이 내게로 밀려들었다. 전신을 옭아매는 저항할 수 없는 마법. 그리고 란델이 입이 움직이는 걸 마지막으로, 시야가 뒤바뀌었다.

나는 이 현상을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소환.

아주 간단하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마스터의 뜻대로 방으로 돌아왔다. 난 눈앞의 인영을 향해 신음처럼 내뱉었다.

“마스터.”

마스터는 막 방으로 돌아와서 나의 부재를 알아채고 소환한 듯이, 자리에 앉지 않고 방 중앙에 서 있었다. 그 적막한 시선이 나를 담았을 때, 거세어진 맥박이 고막을 지배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쿵쿵 울리는 소리에 어지러웠다. 죄를 지은 듯이 조마조마하다. 아니, 고작 그 정도가 아니다. 두려움에 속이 저릴 지경이다.

란델에게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의 답을, 알 것 같았다. 나 이전에 시온이었던 사람이 죽었다고.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여자가.

누가, 어떻게.

적어도 그것만큼은 답을 알 것 같았다. 모른 체 할 수 없는 선연한 깨달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발이 주춤거리며 그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통제할 수 없는, 본능적인 움직임.

마스터가 시온을 죽였다. 그리고 새로운 시온으로 나를 들였다.

섬뜩하다 못해 공포증에 걸린 양 모든 것을 백지로 만들어버리는 두려움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게 꼭 나를 죽인다는 인과로 연결되지는 않을지언정, 나는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마스터는 언제든 나를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건 생각보다 더 간단하고, 생각보다 더 손쉬운 결정일 수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간 마스터의 저울질 속에서 나는 아슬아슬하게 삶 쪽의 무게를 더했을망정 수도 없이 죽음 쪽에 기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체화된 공포는 낭떠러지에 매달린 것처럼 아찔했다.

그래, 물론 사람은 언제나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지나가는 아주 평범한 사람조차도 그건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엄연히 벽이 존재한다.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힘은 가졌으되, 살인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 힘은 가졌으되 사람을 죽일 냉혹함을 가지지 못한 이. 가치관, 금기, 법 그 모든 것이 누름돌이 되기 마련.

그러나 그 누름돌이 존재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게 바로 마스터였다. 마스터에게 그 모든 장벽은 무용한 것. 그토록 강력한 마법사니까. 지금 나를 소환한 것만큼이나, 나를 죽이는 것이 그에게 손쉬운 일이라면-

내가 어떻게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던가? 아니, 마스터는 처음부터 내게 보여 주었어. 내게 보여 주려고, 날 만난 첫날 그 사내를 죽였지. 혹여 그럴 의도가 아니었을지라도, 그게 마스터에게 지극히 간단한 행위였음은 자명하다.

그때, 마스터에게 주먹을 내지른 사내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굴러떨어진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6개월이나 지났음에도-

그 때문에 더욱 도망치고 싶어졌고, 마법에 몰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기억은 선명한 반면 그 일을 현실과 연결 짓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놀라웠다. 때로 이래선 안 된다고 경각심을 되새기는 일은 있을지언정, 한순간의 다짐에 지나지 않았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를 찾고 그의 앞에서 징징거리지 않았던가.

사람이 아무리 편의적인 생물이라지만 나는 어째서 그리도 까맣게 잊고 있었나.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변명하자면, 그럴 만한 구석은 있었다.

그간 마스터와 함께 지내면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정이 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정이 드는 정도를 떠나서……. 엘리야에게 매혹된 이상으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 좋아하고 있어.

그게 거창한 의미에서의 좋아함이 아니기를 빌고 있을지라도. 그게 돌이킬 수 없이 열렬한 감정이 아니라고 믿고 있을지라도. 그렇기에 그가 정말로 악인일 수 있고, 지독한 냉혈한이라 날 당장에라도 살해할 수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해치지 않았으면 바람이 믿음으로 화한 걸까.

아니, 어쩌면 반대로 난 너무도 깊이 깨닫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스터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고, 그가 나를 조금쯤 좋아하기를 바라는 건……. 순수히 내가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그게 마스터의 누름돌이 되어주기를 원해서는 아닐까. 무수히 많은 여인을 살해한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 마침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목숨을 건진 세헤라자데처럼, 나도…….

그렇게 되어서……. 결국 내가 도망쳐도 내버려둬 주길. 그런 소망이 있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두려운 것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듯이, 마스터를 응시했다. 깨달음은 이내 슬픔으로 화해서 가슴에 퍼져나갔다. 욱신거리는 심장이 공포심을 벗어내고 통증을 알렸다.

============================ 작품 후기 ============================

위키드의 for good(노래제목) 글리버전을 들어보세요.

우정노래의 최고봉이랄까.

좋은 한주 되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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